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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야외공연의 중요한 변수다. 특히 고가의 섬세한 악기가 많이
동원되는 클래식 공연의 경우 궂은 날씨 속 야외공연은 난감한 일이다. 지난 10일 베이징 자금성에서 열린 야외공연에 참가한 상하이 심포니 오케스트라 역시 궂은 날씨로 ‘악전고투’했다. 가을 날씨로는
이례적으로 영상 3도라는 낮은 기온에 바람까지 불어 체감 온도는 영하로 내려갔다.
상하이 심포니의 공식 위챗(한국의 카카오톡에 해당하는
SNS) 계정을 보니 이 공연을 위한 분투를 짐작하게 하는 사진과 글들이 올라와 있다. 상하이
심포니 단원들은 이 공연 연습을 위해 긴 국경절 연휴까지 포기했다. 베이징에 도착해서는 추위와 싸워야
했다. 스태프들은 급히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생강차와 핫팩을 준비했다.
몸에 핫팩을 붙이고 있는 단원들의 사진이 이채롭다. (이하 사진들 출처는 모두 상하이 심포니 위챗)
추위는 연주자뿐 아니라 악기에도 영향을 준다. 몸통이 나무로 만들어진 현악기들이 특히 추위에
민감하다. 추운 실외에서도 음을 일정하게 유지하려면, 실내
콘서트홀에서 할 때와는 다르게 현을 짚어야 한다. 추위에 곱은 손가락으로 제대로 된 음을 내느라 연주자들은
진땀을 뺐다. 기온이 너무 낮으면 관악기도 음정이 달라진다. 관악기
주자들은 연주 도중 짬만 나면 손으로 악기를 감싸고 호호 입김을 불어댔다. 한 단원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얼어도 되지만 악기는 안돼요!”
이렇게 추위 속에 고생했지만 상하이 심포니 단원들은 불평은커녕 감격과 흥분 상태였다. 난생
처음으로 중국을 상징하는 특별한 장소인 자금성(정확하게는 황실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 태묘 앞)에서 연주한 데다, 이 공연이 세계 최대의 클래식 음반사 도이치 그라모폰(이하 DG로 표기)의 창립 120주년을 기념하는 대형 이벤트였기 때문이다. 노란색 로고로 친숙한 DG는 카라얀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많은 녹음을 비롯해, 빛나는 명반들을
보유하고 있어, 클래식 음악의 명가로 꼽힌다.
자금성에서 클래식 음악 공연이 열린 건 1998년 주빈 메타가 지휘한
오페라 ‘투란도트’ 이후
20년만이다. 이번 공연이 20년 전과 달라진
것은 중국인 음악가들이 주역으로 나섰다는 점이다. 뉴욕 타임스가 ‘중국의
카라얀’으로 호칭한 상하이 심포니 음악감독 위룽(余隆)이 지휘를 맡았다.
첫 곡이 중국인 작곡가 류텐화(刘天华)의 ‘량샤오(良宵:멋진 밤)’였던 것 역시 의미심장하다. 이 공연은 곧 중국의 ‘소프트 파워’를 전세계에 과시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클래식 스타군단’으로 불리는 DG답게 협연자들은
다양한 국적의 쟁쟁한 연주자들로 구성되었다. 노르웨이의 바이올리니스트 마리 사무엘슨이 대표적인 현대
작곡가 막스 리히터의 ‘11월’을, 그리고 러시아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손열음이 2위, 조성진이 3위를
한 2011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우승자였다)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협연했다. 또 러시아 월드컵 개막식의
스타이기도 한 소프라노 아이다 가리풀리나 등 유명 성악가들이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를 협연했다.
그런데 왜 DG는 왜 다른 곳 아닌 중국에서 창립 120주년
기념공연을 열었을까. 몇 달 전 이 공연 소식을 처음 듣고 썼던 글에도 언급했지만 이는 ‘시장’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본고장인
유럽과 미주에서 한계에 봉착한 클래식 음악계가 ‘미래의 시장’으로
중국에 공들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기도 하다.
클레멘스 트라우트만 DG 사장은 ‘중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활력 있는 클래식 음악 환경을 갖추고 있다’라고 말한다. 개혁
개방 이후 늦게 발동이 걸리긴 했지만, 중국은 이미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윤디, 그리고 현재 DG 소속으로 활동 중인 ‘월드스타’ 랑랑과 신세대 유자왕 등 여러 연주자들을 배출했다. 과거 한국이 그랬듯 중국의 음악 교육열은 뜨겁고 대도시를 중심으로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일찌감치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던 국제도시이니만큼, 상하이는 중국에서도 가장 오랜 클래식
음악 전통을 자랑하는 지역이다. 상하이 심포니는 아시아에서 가장 처음 만들어진 오케스트라로 내년에 창립 140주년을 맞는다. 위룽 음악감독 체제에서 쾌속 성장해 지난해에는
루체른 페스티벌에 성공적으로 데뷔하는 등 세계 음악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DG가 이번 공연에서 위룽과
상하이 심포니를 전면에 내세운 데에는 이유가 있다.
위룽과 상하이 심포니는 지난 6월 중국 지휘자, 중국
오케스트라로는 최초로 DG와 음반 발매 계약을 맺었다. 내년에
발매될 이들의 첫 DG 음반에는 중국인 작곡가 천치강(陈其钢)의
‘슬픔과 기쁨은 근원이 같다(悲喜同源)’와
‘오행(五行)’, 크라이슬러의
‘중국의 북’,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적 무곡’ 이 수록될 예정이다.
상하이 심포니는 앞으로 3년간 발매하는 음반마다 중국인 작곡가의 작품을 수록할 예정이다. DG 120주년 기념공연과 음반 발매 소식을 알리는 상하이 심포니 계정 글에는 ‘중국의 소리(中国声音)’를
전세계에 전한다’는 자부심이 넘쳐났다.
사실 한국의 서울시향 역시 DG와 계약을 맺은 적이 있다.
서울시향은 정명훈 예술감독 체제였던 2011년, 아시아
오케스트라로서는 최초로 DG와 음반 발매 계약을 맺었다. 당초
5년간 매년 2장씩 총
10장의 음반을 내기로 했으나, 2015년 말러 교향곡
5번 음반까지 총 9장을 내고 정 감독의 사임으로 흐지부지 계약이 종료되었다. 정 감독이 전 서울시향 대표이사와 불화로 갖가지 논란과 소문에 휩싸여
2015년 말 사임한 이후, 서울시향은 아직도 후임자를 찾지 못한 채로 객원지휘자 체제를
이어오고 있다. 상하이 심포니의 약진을 보니 서울시향의 침체가 아쉬워진다.
현장에서 1200여명의 관객이 관람한 이번 공연은 유튜브에서 360도 VR(가상현실) 중계로 전세계 클래식 음악 팬들을 찾아갔다. 유튜브를 볼 수 없는 중국 내 애호가들을 위해서는 중국 IT기업이 온라인 중계를 맡아 다음날인 11일 공연 실황을 공개했다. 또 14일에는 중국 예술채널을 통해 공연 실황이 두 차례 방영되었다. 이 공연 실황은 중국뿐 아니라 독일과 영국, 프랑스 등 전세계 20개국에서 방영되었거나 방영될 예정이다.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연주 열기 가득했던 이 공연은 이래저래 전세계에 클래식 음악에서도 중국의 부상을 알린 상징적인 이벤트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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