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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이야기

중국서 만난 조씨고아

soohyun 2016. 11. 19. 02:10

(사진 중국 국가화극원 제공)


외국에서 한국 예술가들의 공연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영국 연수 시절,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공연을 보기 위해 기차 타고 런던으로 ‘상경’했던 추억이 있다. 한국에서 공연 볼 때보다 훨씬 반갑고 좋았다. 중국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말 중국 국가화극원 극장에서 열렸던 한국 국립극단의 연극 ‘조씨 고아, 복수의 씨앗(중국 공연명은 赵氏孤儿)’을 보러 베이징으로 ‘상경’했다. 

‘조씨 고아’는 제목 그대로 조씨 성을 가진 고아의 이야기다. 원나라 때의 작가 기군상이 쓴 희곡이 원작으로, 중국 진나라를 배경으로 삼은 복수극이다. 중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고 할 만한 고전이라 중국 영화로, 드라마로, 연극으로, 여러 차례 만들어졌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공연된 중국 고전으로 ‘동양의 햄릿’으로 불렸다. 2012년에는 영국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양한 버전으로 공연되며 사랑받아온 작품이다. 

간략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군의 총애를 받던 문신 조순을 질투한 도안고 장군은 간교한 계략으로 누명을 씌워 조씨 집안을 파멸로 몰아넣는다. 조순 일가 300명이 모조리 죽지만, 손자인 ‘조씨 고아’는 이 집안의 식객이었던 시골 의원 정영에게 맡겨진다. 의리 있는 정영은 조씨 고아를 지켜내기 위해 뒤늦게 낳은 자신의 귀한 아들과 바꿔치기한다. 정영의 아들은 조씨 고아 대신 도안고에게 죽음을 당하고, 정영의 처는 자결한다. 도안고는 조씨 고아를 정영의 아들로 알고 그를 양아들로 삼아 무예를 가르친다. 20년 후 정영은 조씨 고아에게 참혹한 과거사를 알려주며 복수할 것을 당부하고, 조씨 고아는 믿기 어려운 진실 앞에 고민하다 복수에 나선다.   


고선웅이 연출을 맡고 장두이, 하성광, 유순웅 등이 출연한 국립극단의 ‘조씨 고아’는 지난해 11월 명동예술극장에서 초연 무대에 올라 국내 주요 연극상을 휩쓸었다. 이번 베이징 공연은 한국 국립극단과 중국 국가화극원(영문 명칭은 National Theatre of China) 상호교류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지난 4월에는 국가화극원의 ‘리처드 3세’가 국립극단 초청으로 서울에서 공연된 바 있다. 사드 이후 한중 문화교류에 비상등이 켜진 상황 속에서도 이번 베이징 공연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2그런데 공연이 올라가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던 것을 보면, 알게 모르게 ‘사드 한파’의 영향이 있었던 모양이다. 공연 임박해서도 국가화극원 극장 안팎에서 조씨 고아 공연 배너나 포스터 등 홍보물을 찾아보기 어려웠고, 예매 사이트에서는 언제부터인지 티켓 판매가 중지된 상태였다. 한국서 가져간 무대장치는 제때 통관되지 못해 국립극단 관계자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결국 무대장치 일부는 설치하지 못한 채로 공연을 올려야 했다. 극단 관계자들은 공연 시작 전까지 관객이 얼마나 올지, 오더라도 반응이 어떨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러나 공연이 일단 시작되자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10월 28일과 29일, 이틀 공연에 1,300여 명이 관람했는데, 주중 한국문화원을 통해 공연 소식을 접한 한국 유학생이나 교민들뿐 아니라 중국 현지 관객들이 많았고, 특히 중국 연극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연출가, 배우, 평론가들의 관심이 높았다.


고선웅은 ‘조씨 고아’ 원작을 거의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적절한 각색으로 이 작품을 새롭게 창조해냈다. 중국 이야기지만, 처음부터 한국 작품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배우들은 중국에서 공연한다는 점을 감안해 ‘취바올러(吃饱了: 배부르다는 뜻)!’ 같은 일부 간단한 대사들은 중국어로 처리했는데, 중국 관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커튼콜 때는 객석의 환호가 끊이지 않았고, 둘째 날은 기립 박수가 5분 가까이 이어졌다. 

‘관객을 웃기고 울린다’는 표현은 공연 소개에 흔히 등장해 진부하게까지 느껴지는 문장이지만, ‘조씨 고아’는 진정 중국 관객들을 웃기고 울렸다. 관객을 웃기다가 금세 울리는 건 고선웅 표 연극의 특징이기도 하다. ‘조씨 고아’에는 분명히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중인데도 웃음이 나오는 장면이 곳곳에 있다. 정영이 장성한 조씨 고아에게 가족사를 알려주고 복수를 당부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정영은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묘사한 두루마리 그림을 죽 펼치면서 과거사를 조목조목 이야기해주고, 조씨 고아는 과장된 동작과 어조로 반응해 (“이 사람은 누군가요?” / “아, 정말 예의 없는 사람이군요!” 등등) 관객의 웃음을 자아낸다. 긴장이 고조되는 이 장면에서 웃음이 나오다니  참 역설적인데, 까불거리던 조씨 고아는 곧 그림 내용이 자신의 이야기라는 걸 깨닫고 괴로워한다. 정영은 충격적 진실 앞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조씨 고아를 설득하기 위해 결연히 자신의 손목을 자른다. 이는 허공에서 내려뜨리는 팔 모양의 오브제와 붉은 천을 활용해 간결하면서도 강렬하게 표현된다. 


평론가 김중효의 설명에 따르면, “만화적 상상력과 즉흥적 언어유희로 구성된 연극성은 극중의 심각한 장면을 느슨하게 만들어준다. 역설적으로 그러한 느슨함은 비극의 진부함을 지우면서 비장한 장면을 도드라지게 한다……. 엄숙과 비장의 감정이 오히려 웃음의 밀도를 높여주면서 모순적 상황을 구축하는 요상한 고선웅 스타일의 연출 방식이다(국립극단 리허설 북에서 인용)” 그리고 이는 중국 관객들에게도 통했다.   


조씨 고아는 복수에 성공하지만 이 연극은 통쾌한 복수극이 아니다. 고선웅은 ‘도안고에게 보복을 하고 난 정영의 기분이 어땠을까 무척 궁금했다’고 했다. 그 기분이 후련하고 만족스러웠다면 이 연극은 통쾌한 복수극이 됐을 것이지만, 복수를 했는데도 형언할 수 없는 공허가 밀려왔다면 복수에 대한 다른 주제를 다루는 연극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후자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 연극의 주제는 ‘복수는 필요하면 반드시 해야 한다. 하지만 반드시 후련해지는 것은 아니다’가 되었다.


판단 잘못으로 조씨 일가를 멸했던 주군은 이번엔 아무렇지도 않게 도안고 일가를 몰살하라 명한다. 권력자는 권력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언젠가 참사의 와중에 살아남은 누군가가 다시 복수에 나설지 모른다. 조씨 고아는 원수를 갚았으니 기뻐하라고 하지만, 정영의 심정은 허망하고 쓸쓸하다. 극의 마지막은 묵자가 담당한다. 검은 옷을 입고 나오는 묵자라는 인물은 극중 내내 대사 없이 등장인물의 얼굴에 검은 부채를 펼치는 동작으로 그들의 죽음을 표현하는데, 결말에서는 핵심적인 대사로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런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마시고 부디 평화롭기만을. 금방이구나, 인생은. 그저 좋게만 사시다 가시기를.“ 


공연이 끝난 후 몇몇 중국 관객들에게 관극 소감을 물었다. 그냥 공연이 보고 싶어 간 것이었지 취재가 목적은 아니었는데, 공연을 보고 나니 중국 관객들은 어떻게 봤는지 궁금해져 어느새 인터뷰가 되어버렸다. 맨 처음 만난 관객은 ‘조씨 고아는 중국인은 다 아는 이야기이고, 이전에도 영화와 드라마로 봤던 터라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아주 새로웠고 한국적 정서가 느껴지는 것도 좋았다’고 호평했다.


다음에 인터뷰한 관객은 상당히 전문적인 내용을 이야기해줬는데, 알고 보니 상하이 희극학원 푸샤오핑 교수라 했다. 이 공연을 보기 위해 일부러 상하이에서 베이징까지 왔다며, 지금까지 자신이 봤던 수많은 ‘조씨 고아’를 초월하는 훌륭한 작품이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정영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 인상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정영을 영웅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필부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 것이 설득력 있었다. 또 정영의 아내가 죽은 자식을 묻는 장면은 이전의 어떤 버전에서도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정영이 조씨 고아에게 진실을 밝히고, 조씨고아가 복수를 결심하는 장면도 억지스럽지 않고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중국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된 작품이지만, 이 정도로 성과를 낸 적은 없었다.” 

역시 공연장에서 만난 베이징 중앙희극학원의 우잉지에 교수는 한국 배우들의 역량이 뛰어나다고 칭찬했다. 유희적 연극성을 구현할 때 지나치면 맥락 없는 코미디가 되기 쉽지만, 배우들의 균형 잡힌 연기가 고선웅의 독특한 스타일을 제대로 살려냈다는 것이다. 우 교수는 공연이 끝난 후에도 바로 돌아가지 않고 정영 역을 맡은 하성광 등 배우들과 제작진을 만나 얘기를 나눴다. 정영 역의 하성광을 비롯해, 한국 배우들의 혼이 실린 연기, 겸손한 자세가 감동적이었다고 했다.


사드 배치 결정 이후 한중 문화교류 분위기가 싸늘해진데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의 주요 등장 인물인 차은택이 중국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던 시기라, 이 공연은 한국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첫날 공연이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중국 관계자들 사이에 입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한다. 둘째 날 공연이 끝난 후 바로 산동화극원 측에서 내년 여름 국제연극제 초청 의사를 밝혀오기도 했다. 공연에 대한 중국 문화계의 관심을 현장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칭다오로 돌아오고 며칠 후, 중국 언론에 실린 공연 리뷰를 발견했다. 중국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양션이 쓴 글이었는데, 국립극단의 ‘조씨 고아’가 중국 원작을 완벽하게 한국화하는 데 성공했다며 연출, 연기, 모든 방면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관중을 웃기고 울리고, 연극이 끝난 후에도 계속 생각이 남는다.’ 많은 중국 연극들이 이런 선전문구를 쓰지만, 실제로 이런 작품은 매우 드물다. 필자는 중국의 ‘조씨 고아’ 여러 버전을 봤지만, 이 한국판 ‘조씨 고아’만큼 감동적인 작품은 없었다……. 한국 극단은 중국 극단이 대작을 만들 때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자본으로, 중국 극장에서, 중국 이야기를 가지고, 중국 관중을 정복했다!”


외국에서 한국 공연을, 그것도 좋은 공연을 만나는 것은 한국에서는 잘 몰랐던 행복이다. 한국에선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건지 실감하지 못했다. 여기선 어쩌다 한 번, 자주 누릴 수 없지만 그런 만큼 감흥도 크다. 이전에 잘 몰랐던 중국 고전의 매력을 알게 되었고, 한국 연극의 저력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으니 ‘조씨고아’ 보러 왕복 9시간 기차 타고 베이징 다녀온 보람이 있다. 다시 또 중국에서 이런 공연을 만났으면 좋겠다. 칭다오에서 볼 수 있다면 더 좋겠다. (*'조씨고아'는 내년에 다시 서울에서 공연될 예정이다.)  
   

*SBS 뉴스 웹사이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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