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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온지 다섯 달 만에 제대로 문화생활을 했다. 상하이에서 연극 워 호스(War Horse)’를 본 것이다. ‘워 호스는 영국 작가 마이클 모퍼고의 소설(1982)이 원작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로도 유명하다. 영국 국립극장이 제작한 연극은 2007년 런던 초연 이후 각종 상을 휩쓸었던 화제작이다. 소년 알버트와 그가 사랑하는 말 조이의 이야기가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알버트는 전쟁에 징발당한 말 조이를 찾기 위해 가족 몰래 군에 입대해 전장에 뛰어든다.

연극 전반부는 알버트가 어린 시절부터 조이를 키우면서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 후반부는 조이와 알버트가 겪는 전쟁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실제 크기로 만들어진 말 인형의  연기가 압권이다. 정교한 말 인형은 남아프리카의 핸드스프링 인형극단에서 몇 년에 걸쳐 제작한 것이다. 길이 3미터, 높이 2.4미터에 무게가 54킬로그램에 이른다. 인형을 조종하는 배우들은 말의 호흡과 소리, 움직임, 감정까지 세밀하게 표현하며 사람과 말의 교감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워호스 중국 공연 배우와 스태프들. 사진 중국 국립극장>

연극 워 호스의 중국어 버전은 영국 국립극장과 중국 국립극장의 공동 제작으로 2015 9 4일 베이징에서 막을 올렸다. 이전에 9개 국가에서 3개 언어로 4천 회 이상 공연된 적이 있지만, 아시아 공연은 중국이 처음이다. (한국에서는 서울 장충동에 있는 국립극장에서 영국 국립극장 공연 영상을 중계하는 ‘NT 라이브프로그램으로 소개된 적이 있다. 관객 반응이 좋아 앙코르 상영까지 이뤄졌다.) 성공적인 베이징 공연 이후 상하이에서는 11 17일 공연이 시작되었다.

마침 상하이 여행 기간에 워 호스를 볼 수 있게 되어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중국 칭다오에 살기 시작하면서 제대로 된 공연을 볼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국립극장에서 ‘NT 라이브로 상영했을 때 놓쳐서 무척 아쉬웠었는데, 바로 그 작품을 중국까지 와서 실연으로 보게 된 것이다.

12 29일 화요일 저녁 7 15분 공연. 평일이라 그런지 다행히 표가 남아있었다. 공연 전날 두 번째 좌석등급인 380위앤(한화 7 5천쯤 되려나)짜리 1층 가장자리 좌석을 인터넷으로 예약하고 알리페이로 간편하게 지불을 마쳤다. 일가족 4명이 다 보려니 1500위앤이 넘게 들어 적지 않은 지출이었지만 아깝지 않았다. (최상등급 자리는 880위앤인데, 주말 공연에선 1080위앤까지 올라간다. 꽤 비싸다. ) 공연장인 상하이 컬쳐스퀘어는 건물을 위로 올리지 않고 지하로 파 내려가, 지상층이 객석 3층이 되는 구조로 지어진 인상적인 극장이었다.

 



중국어 대사를 잘 알아듣지 못하지만 영어 자막이 제공되어 다행이었다. 무대 양편에 설치된 자막 보랴 무대 보랴 아무래도 시선이 분산되어 아쉬웠다. 하지만 공연을 즐기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인형 연기는 대사가 없으니 자막도 필요 없었다. 후반부에는 일부러 자막을 되도록 보지 않고 귀를 쫑긋 세운 채(아는 중국어 단어 하나라도 들어보려고!) 무대에만 집중하려 애썼다.

다른 버전을 보지 못해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과연 말의 연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처음엔 말을 조종하는 배우들이 눈에 먼저 들어왔지만, 어느새 배우 개개인은 보이지 않고, 배우와 인형이 혼연일체로 이뤄낸 말 한 마리가 종횡무진하고 있었다. 말들이 격돌하면 잔뜩 긴장해 숨 죽이고 지켜봤고, 말이 쓰러져 죽어가면 내 마음도 아파왔다.    

워 호스의 무대는 허전하다 느껴질 정도로 간결하다. 이렇게 단순한 무대에서 전쟁을 어떻게 그려낼까 궁금했는데, 적절한 영상과 조명, 음향, 소품에 연기가 더해지니 전쟁의 참상을 그 어떤 사실적 묘사 못지 않게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인형 모형이 생기 넘치는 말이 되고, 텅 빈 무대가 어느새 전장으로 바뀌는 것. 이런 게 바로 무대예술의 매력 아닐까.

<공연 시작 전에 찍은 무대 모습. 구름 같기도 하고 방금 스케치북에서 찢어낸 종이조각 같기도 한, 흰색 스크린이라 해야    할까, 하여간 이게 무대장치의 전부다.> 


칭다오대극원에서 두 차례 공연을 보면서 객석 분위기가 말할 수 없이 어수선했던 것을 봤던 터라 이번 공연에도 그러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관람 분위기도 정숙한 편이었다. 공연 중간에 사진을 찍으려고 휴대폰을 꺼내드는 사람들이 좀 있기는 했지만, 공연장 직원들이 효과적으로 이를 통제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중국 공연관람 문화에 대해서도 좀 써보려 한다.  

공연을 보고 나서 관련 기사들을 찾아보니 워 호스의 중국 공연은 영국 국립극장과 중국 국립극장이 2013년 공동제작에 합의한 이후 2년 이상의 준비 기간을 거쳤다 한다. 가장 공 들인 것은 역시나 인형 연기다. 인형 연출을 맡은 류샤오이는 2014년 초 런던을 방문해 배우 오디션과 훈련 관련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몇 달 후 열린 인형 연기 배우오디션에는 중국 전역에서 천여 명이 지원해 최종적으로 15명이 뽑혔다.

배우들은 먼저 2주 동안 말 목장에서 숙식하면서 말의 습성과 생태를 익히는 과정을 거쳤다. 말 한 마리를 세 명의 배우가 맡아 연기하는데, 공연 때는 서로 대화는커녕 눈짓도 나누지 못하는 상황에서 각자 맡은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말의 움직임을 표현해야 한다. 이들은 1년 이상 장기간 연습을 통해 완벽한 호흡으로 말을 연기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 제작진 중 인형 마스터인 토미 루더는 베이징 공연 개막 몇 달 전부터 중국에 머무르면서 배우들을 지도했다.

워 호스의 중국 공연은 최근 협력을 강화하고 있는 중국과 영국의 공동 프로젝트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영국은 중국 자본 유치를 위해 대 중국 협력을 강화하고 있고, 문화예술 분야의 공동 프로젝트 역시 함께 진행되고 있다. 영국의 캐머런 총리는 2013년 말 중국 방문 때 워 호스공동 프로덕션에 대해 언급했고, 2014년 양국 고위급 회담에서 합의한 문서에도 이 공연이 주요 프로젝트로 포함되었다. 개막 1년 전 리허설부터 시작해 상하이 공연에 이르는 지금까지, 영국 BBC와 중국 CCTV 등 양국의 주요 언론이 이 공연을 여러 차례 보도하면서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나는 공연을 보면서 이 공연 제작비는 얼마나 들었을까, 매표 수입은 얼마나 될까 궁금해졌다. 아마도 워 호스공연으로 중국 국립극장이 금전적 수익을 올리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돈으로 따지기 힘든 성과를 얻은 것 또한 분명해 보인다. 자국 관객들에게 좋은 공연을 보여주는 게 국립극장의 중요한 목표이니, 이는 충분히 달성된 셈이다. 베이징과 상하이 이후에는 광저우와 톈진 공연이 예정되어 있고, 공연 도시가 더 늘어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중국 국립극장은 또 이 프로젝트를 통해 공연 한 편 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무대 기술과 운영, 배우 훈련, 공연 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20148, 베이징 국가대극원에서 오페라 시몬 보카네그라가 공연되었다. 무려 플라시도 도밍고가 출연해 화제가 된 프로덕션이었다. 호세 카레라스,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함께 쓰리 테너로 유명했던 플라시도 도밍고는 바리톤으로 전향해 지금도 무대에 서고 있다. 여기에 유명 연출가인 일라이자 모신스키가 연출을 맡았고, 정명훈이 국가대극원 전속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나는 가보지 못했지만, 현장을 다녀온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공연을 무대에 올리다니, 공연예술 분야에서도 중국의 발전이 놀랍다고 입을 모았다. 음악 칼럼니스트 황장원은 중국 정부의 아낌없는 지원에 힘입어 자본과 물량을 아낌없이 투입한 무대라고 표현했고, 극장 전속 오케스트라도 선전했다고 평가했다. 그가 성장하는 중국 공연 문화의 증거라는 제목으로 쓴 베이징 국가대극원 방문기에는 이런 표현이 있었다. 

 “
그 자존심 강한 중국인들이 ‘서양의 고전’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봤고, 최근    들어 답보도 모자라 퇴보 기미까지 보이는 우리나라 공연계의 현실을 돌아봤다. 한편으론      부러웠고,  한편으론 자괴감마저 들었다.” (
주간동아 2015 9 1005)

상하이 여행 잘 하고, 오랜만에 문화생활까지 해서 기분 좋았는데 한편으로는 묘하게 찜찜한 느낌이 남아 왜 그런가 했었다. 중국이 공연에 아낌없는 지원과 투자를 하고 있는 걸 보면서 약간의 부러움 섞인 걱정을 했던 게 아닌가 싶다. 괜한 걱정이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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