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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고등학교 다니는 큰 아이는 연극 수업을 선택해 듣는다. 뮤지컬 '위키드'가 이번 학기의 연극 수업 프로젝트다. 학기말에 모든 학생들이 각자 어떤 역할이든 맡아서 공연을 하게 된다. 한국서 예고 다닐 때만큼 세심한 지도를 해주지는 않지만, 학생들이 함께 공연 한 편을 완성한다는 데 의의를 둔 수업이다. 물론 무대니 의상이니 엄청나게 간소화한 아마추어 공연이다.

큰 아이는 처음부터 앨파바 역을 하고 싶어했었다. 하지만 선생님이 글린다 역을 권유했고, 결국 글린다 역을 맡게 되었다. 은우는 자기가 안 어울리는 역을 맡았다며 걱정이었다. 글린다 역을 함께 맡은 줄리아라는 서양 아이는 평소 성격도 글린다와 비슷한 면이 있어 굉장히 자연스럽게 잘 한다 했다. 학기 중간에 연극 지도 선생님을 만났더니 웃으면서 '은우가 요즘 나를 피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은우가 수업 시간 외에 만나면 자기랑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멀리서 보면 돌아가는 것 같다고. '제가 은우 연기에 대해 지적을 좀 해서 그런가 봐요. 더 잘 할 수 있는데 자꾸 멈칫하고 자신없어 하더라고요. 글린다는 정말 '크레이지'한 역이거든요. 은우가 줄리아를 의식해서 더 그럴 수도 있어요. 전혀 그럴 필요 없는데. 은우와 줄리아는 각각 다른 장점이 있거든요. 그 학생은 연기가 자연스러워요. 은우는 대사 외우는 것도 영어라 더 힘들 거고요. 하지만 은우는 노래가 뛰어나죠. 은우의 글린다와 줄리아의 글린다는 달라요. 그게 재미있는 거잖아요."

아이한테 '네가 요즘 선생님을 슬슬 피하는 것 같다고 하더라' 했더니 '어떻게 아셨지?' 하며 헤 웃었다. 집에서 연습할 때는 '글린다스럽게' 마구 까불면서 하다가도, 학교에만 가면 위축된다 했다. 아무래도 자기는 글린다 역이 안 어울린다는 것 같다며 앨파바 역에 대한 미련을 드러냈다. 게다가 다른 아이들의 '리액션'이 너무 없어서 연기하는 게 힘들다 했다. 몇몇 주역들만 열심히 하지 다른 아이들은 '위키드' 내용도 잘 모르고 건성으로 한다고. '아쭈, 벌써부터 리액션 탓하냐' 하고 웃었지만, 아이는 심각했다. 연기를 진지하게 대하는 아이들과 함께 예고를 다니다 왔으니, 좀 그런 측면도 있겠다 싶기는 했다.  

은우에게 내가 대학 다닐 때 딱 한 번 출연했던 연극 얘기를 해줬다. 나도 안 맞는 역을 맡았다고 생각해 스트레스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나서였다. 대학 1학년 때 소속 단과대 연극반의 재창립 워크숍 공연이었다. 창작극이었고 나는 벼락부잣집 외동딸 역을 맡았는데, 천박하고 문란하기 그지없는 악역이었다. 처음부터 나와 너무 어울리지 않는 역을 맡았다 싶었는데, 대사 수위도 당시로선 높아서 너무 힘들었다. 연극 한 편을 두고도 '운동 노선'을 쟁점 삼아 논쟁이 벌어졌고, 대본은 쉽사리 완성되지 않아서 그야말로 '쪽대본'으로 연습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공연의 막이 올랐다. 처음에는 악역을 맡은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누가 보러 온다 하면 좀 창피했다. 무대 위에선 현실의 내가 아니라 극중인물이 되는 게 당연하지만, 그게 쉽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공연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내가 맡은 역에 몰입하게 되었다. 마지막 공연을 보러 왔던 막내동생이 끝나자마자 무대로 달려와 나한테 일러바쳤다. 자기 옆 자리에 앉았던 아저씨가 누나한테 '미친 년'이라고 욕했다고. 그래서 그 아저씨한테 '왜 우리 누나한테 욕해요!'하고 항의했다고. 동생은 계속 씩씩거렸지만, 나는 기분이 좋았다. 욕을 먹었다는 건 제대로 해냈다는 뜻이니까. 은우가 깔깔 웃었다. 
'삼촌이 진짜 항의했대? 와. 웃긴다. 그 때 삼촌이 몇 살이었어?' 
'글쎄, 초등학교 2, 3학년쯤 됐었을 걸?'
'엄마 근데 그리고 나서는 왜 또 연극 안 했어?'
`'연극이 좋아서 연극반에 잠깐 들어가긴 했는데, 해보니까 난 직접 하는 것보다 보는 게 좋더라고. 그래도 네가 요즘 하는 걸 보면 엄마를 좀 닮은 것 같은데?"
'그런가?'

은우의 걱정은 한동안 조금 잠잠해졌다. 연습을 하다 보니 그나마 연기가 좀 나아진 모양이다. 하지만 요 며칠 전부터 다시 걱정이 시작되었는데, 이번에는 글린다 역에 어울리지 않는 외모가 문제란다. 얼마 전부터는 의상과 가발을 착용하고 연습을 하기 시작해 더욱 심해졌다. 키도 작고, 통통하고, 얼굴도 까무잡잡하고, 눈썹이 검댕인데, 블론드에 핑크 드레스가 웬말이냐고. 어제는 공연 소개에 쓸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이 마음에 안 들어 또 문제였다.

'줄리아는 그냥 딱 글린다야. 근데 나는 이게 뭐냐고. 완전 맹구 같아."
'맹구는 무슨 맹구? 괜찮은데 왜 그래?' 
'아 몰라. 엄마는 팔이 안으로 굽어서 그러는 거야. 글린다는 서양 애가 해야 한다니까. 이게 뭐냐고. "
'한국 배우들도 위키드 공연했는데 무슨 소리야.'
'그 배우들은 다 예쁘다고! 나처럼 못생긴 글린다가 어디 있어!"

아이는 심각한데 나는 왜 실실 웃음이 나올까. 짙은 검정 눈썹에 블론드 가발은 좀 아니긴 했다. 한국에 있는 아이 친구들이 '어설프게 코스프레 한 것 같다'고 했단다. 결국 아이는 연갈색으로 머리와 눈썹을 염색하고 왔다.
아이 학교에서는 며칠 후 한국으로 필드트립을 떠난다. 방문하는 한국 학교에서 뮤지컬 몇 장면을 맛보기로 공연할 예정이라 한다. 그래서 주말에도 학교에 가서 막바지 연습을 하고 들어왔다. 연습에서 '관객을 의식하지 않고 너무 급하게 한다'는 지적을 받았단다. 비록 짧은 맛보기 공연이고, 어설픈 아마추어 무대이긴 하지만, 낯선 관객들 앞에서 공연을 하게 된다. 은우의 글린다가 어떨지 정말 궁금하다. 이번엔 동행하지 못하지만, 연말 이 곳 학교에서 열리는 공연에는 꼭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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