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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국립오페라단의 '사랑의 묘약'을 딸과 함께 봤다. 딸은 이례적으로 이 오페라에 '자발적인 흥미'를 보이며 공연 관람에 흔쾌히 동행해 줬다. 물론 '사랑의 묘약'이란 오페라를 하니까 같이 보러 가지 않겠느냐고 먼저 말을 꺼낸 건 나였지만.

"너 '남몰래 흐르는 눈물' 알지?. 할아버지가 술만 드시면 부르는 노래. '우나 푸르티바 라 그리마~' 있잖아? (우리 아버지는 이 노래를, 술기운이 살짝 올라 기분 좋을 때 즐겨 부르신다. 완전 뽕짝 스타일로.)"

"응, 나 그 노래 알아." 

"그 노래 나오는 오페라가 '사랑의 묘약'이거든, 그거 보러 갈래?"

"사랑의 묘약? 누가 나오는데? (딸은 요즘 조수미에 꽂혔다. 아마 조수미 같은, 자기가 이름 들어본 사람이 나오는 게 아닌가 해서 물어본 것일 터이다)"

"음.... 네가 아는 사람은 없을 텐데.... 아, 맞아! 너 예전에 엄마랑 '피가로의 결혼' 본 적 있지? 거기서 백작으로 나왔던 사무엘 윤이라는 아저씨 있잖아, 그 아저씨 나와."

"아, 그 때 그 야구하는 오페라 말이지? (아아. 기특해라! 아이는 2008년 말에 봤던 이 공연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이 때는 뭔가 딸이 갖고 싶어하던 걸 사준다고 꾀어서 데려갔었다. 야구 컨셉을 빌려와 연출했던 이 프로덕션은 당시 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동 캠퍼스 내 극장에서 공연됐었다)"

딴 때 같으면 이 오페라가 얼마나 재밌는지 줄거리 설명에다, 같이 보러 가면 맛있는 걸 사주겠다든지 하는 '당근'을 제시하며 긴 설득의 과정을 거쳐야 했겠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 정도 대화로 딸이 '오케이'를 외쳤기 때문이다. 

공연은 재미있었다. 안 그래도 이번 공연은 전석매진을 기록하며 인기를 끌었다. 딸도 2시간 반 동안 별로 지루해 하지 않고 잘 봤다. 워낙에 '사랑의 묘약'은 유쾌하면서도 서정성 넘치는 작품인 데다, 단순한 번역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요즘 유행어까지 사용한 한국어 자막은 큰 웃음을 자아냈다. 박미자, 나승서, 김주택 등 출연진도 좋았는데, 특히 약장수 둘카마라 역의 사무엘 윤이 압권이었다. 사무엘 윤은 연습한다고 되는 게 아닌, 너무나 자연스러운 희극 연기를 보여줘서, 어린 시절부터 어딜 가든 남들을 웃기는 끼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궁금증까지 살짝 들었다. 

다만 성악가 개개인의 역량은 좋았지만, 함께 노래부를 때 앙상블이 좀 아쉬웠고, 오케스트라 연주와도 안 맞을 때가 종종 있었다. 오케스트라 연주 속도가 노래보다 많이 앞서간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건 리허설 시간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었을까. 연출 측면에서는 우주를 배경으로 한 컨셉은 상당히 신선했지만, 영상을 많이 사용하다 보니 무대가 어두워 답답했다. 조명은 주로 노래하는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는 역할에 한정됐고, 극중 시간은 흘러가는데 항상 밤 장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 오페라를 보면서 새삼 '오페라스타'라는, 지금은 끝난 프로그램의 위력을 깨달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 첫번째는, 우연히 내 옆자리에 앉게 된 음악평론가 장일범 씨를 보고 딸이 마치 연예인을 만난 양 상기된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처음엔 딸이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몰랐는데, 장일범 씨가 '오페라스타'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것을 기억해내고는 아하, 했다. '장샘, 오페라스타가 세긴 세네요. 우리 딸도 척 보고 알아보는데요?' 했더니 장일범 씨가 쿡쿡 웃었다.

그리고 두번째는 테너 나승서 씨가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부르고 났을 때였다. 서정적인 가창에 박수가 쏟아지는데, 딸이 '엄마, **보다 훨씬 잘해!' 하고 속삭였다. 그 때는 박수 소리가 커서 누구보다 잘한다고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고, 공연 끝나고 나오면서 '아까 누구보다 잘한다고 한 거야? 할아버지보다?' 하고 물었더니, 딸이 킥킥 웃으면서 하는 말. 

"에이, 할아버지가 아니고 김창렬보다 잘한다고!"

'김창렬이 누구지? 성악가 이름인가? 얘가 예전에 이 노래 부르는 걸 본 적이 있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불현듯 '오페라스타'에서 DJ DOC 김창렬 씨가 이 노래를 부른 적이 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 김창렬이 아무리 잘 불렀어도 성악가가 더 잘하는 게 당연하지!" 했더니, 딸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알았어.알았다고. 근데 왜 엄마는 왜 이렇게 소리를 질러?" 했다. 그러고 보니 딸이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라는 아리아를 안다고 했던 것도, 할아버지가 자주 부르는 노래라서가 아니라, '오페라스타'에 나와서 그랬던 것 같다.  

'오페라스타'라는 프로그램의 위력을 다시 실감한 날이었다. 일반인들에게 오페라에서 어떤 노래가 불려지는지, 관심을 갖도록 한 프로그램. '오페라'라는 게 어렵기만 한 게 아니라, 즐길 만하다는 걸 알려준 프로그램. 나는 공연을 취재해 보도하는 일을 오랫동안 업으로 삼아왔고, 공연은, 음악회는, 오페라는, '소수만 즐기는 어려운 취미'가 아니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라는 얘기를 기회 있을 때마다 해 왔지만, 역부족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은, 내 딸한테도 엄마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은가. PD는 아니지만, 클래식 음악 취재를 담당하고 있는 나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것만 같았다. 

어쨌든 어제는 내게 의미있는 날이었다. 딸이 공연 보고 나서 '졸려 죽는 줄 알았어' '다음부턴 공연 안 볼 거야' 라는 말 대신 공연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선심 쓰듯, 별 관심 없는데도 봐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공연을 즐기게 된 것이다. 공연장에서 마주친 지인들이 딸을 보고 '어머, 몰라보게 컸네요' '숙녀가 다 됐네요' 하는데, 내 기분이 왜 이렇게 좋은지. '나는 엄마다'. 이제는 딸 데리고 공연 보는 재미를 제대로 누릴 수 있겠구나 싶다. (하지만 둘째는 아직 멀었다. 어제도 둘째는 아빠가 데리고 집에 있었다.)

*이 글은 SBS 뉴스 사이트 '취재파일'로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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