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장래 희망이 피아니스트라고 얘기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릴 때 피아노에 소질이 있다는 얘기를 가끔 들었고, 막연하게 음악가에 대한 동경을 품기도 했다. 하지만 연습은 지겹고 싫었다. 콩쿠르 나가는 것도, 시험 준비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예술계 중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일반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나는 점점 피아노와 멀어졌고, 레슨도 그만두었다. 내가 치던 피아노는 뚜껑이 닫힌 채 먼지만 쌓여갔다.  

미련이 남아있긴 했다. 간혹 피아노 연주회에 갔다가 나도 다시 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 때뿐이었다. 막상 해보려 해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7년 영국 연수를 가게 되었다. 다시 학생이 되고 보니 뭔가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학교에는 음악 연습실이 있었고, 악기 교습도 알선해 주고 있었다. 나는 20여 년 만에 다시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시키니까, 콩쿠르에 나가야 하니까, 시험을 준비해야 하니까, 왜 이 음악이 좋은지도 잘 모르고 쳤던 것 같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피아노를 배우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일 때문도 아니고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다. 손가락은 무뎌졌지만, 음악을 하는 즐거움은 더 커졌다. 연습하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게 즐거웠고, 순수한 몰입의 기쁨을 느꼈다.  

연수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정신 없이 바쁜 일상으로 복귀했다. 피아노와 다시 멀어졌다. 영국에선 가능했던 일이 한국에선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가끔 생각나서 영국에서 쳤던 곡을 다시 쳐보려 하면 마치 처음 보는 곡 같았다. 회사 근처 피아노 학원에 등록해 보기도 하고, 레슨을 몇 번 받기도 했지만, 시간 없어 못 치고, 실망스러워 안 치고, 그렇게 몇 년이 흘러갔다. 결국은 가끔 아이들 노래에 반주해 주는 정도로만 만족하고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최근 나에게 커다란 자극이 되는 책을 만났다. <Play It Again: An Amateur Against The Impossible>.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편집국장 알란 러스브리저(Alan Rusbridger)가 쓴 책이다.  알란 러스브리저는 1975 <가디언>에 입사했고, 1995년 기자 투표에서 압도적 지지로 편집국장이 되었다. 위키리크스 외교 문건 보도, 머독이 소유했던 <뉴스 오브 더 월드>의 폐간을 이끌어낸 해킹 폭로, 에드워드 스노든의 미 국가안보국 감청 폭로 등 세계적 특종을 일궈냈을 뿐 아니라, 스마트폰이 나오기도 전에 <디지털 퍼스트>를 선언하며 저널리즘의 혁신을 이끌어왔다

 그는 이 책에서 기자 직업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일에 애정을 드러내는데, 바로 피아노 치는 일이다. 그는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웠고, 지금도 가끔 피아노를 치는 아마추어이다. 이 책은 그가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직접 연주하겠다고 결심하고, 1년간 이를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그린다. 제목 그대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한 아마추어의 이야기다.

그는 2010년 피아노 캠프에 참가했다가, 택시 기사로 일했던 아마추어 연주자가 이 곡을 능숙하게 연주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꼭 직접 연주해 보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쇼팽 발라드 1번은 굉장히 어려운 곡이다. 영국에서도 기자는 무척이나 바쁜 직업이다. <가디언>의 편집국장이라면 더더욱. 과연 연습할 시간이 있을까?

그는 매일 아침 20분씩 연습했다. 아무리 바빠도 사실 하루에 20분 내는 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그는 피아노 덕분에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몰입의 즐거움을 누리고 생활의 균형을 되찾았다고 말한다. 아침에 피아노를 연습한 날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상쾌하게 업무에 임할 수 있었다. 급박한 업무로 해외 출장을 갔을 때는 호텔 로비에 놓인 피아노로 연습하기도 했다.

 날짜 별로 서술된 이 책에는 피아노와 음악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가디언> 편집국장의 바쁜 일상이 그려져 더 흥미롭다. 그는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습한 기간이 편집국장을 맡은 후 가장 바쁜 시기였다고 회고한다. <위키리크스> 외교문건 보도와 <뉴스 오브 더 월드>의 해킹 폭로 보도가 숨가쁘게 진행된다. 그의 일상은 굵직한 사건들과 주요 인사들로 가득한 소용돌이 같지만, 이 와중에도 쇼팽 발라드 1번 프로젝트는 비록 더딜지언정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알란 러스브리저는 56살 때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처음 치기 시작해,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이 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이제 다른 난곡들도 배울 계획을 세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피아노를 일찌감치 그만둔 것을 후회한다고 말한다. 알란 러스브리저는 16살 때까지 피아노 레슨을 받다가 그만뒀다. 하지만 그는 다시 시작하겠다고 결심했고, 결심한 대로 실천했다.

돌이켜보니 나는 영국에 있을 때도 바빴다. 그 때는 한가해서 피아노를 쳤던 게 아니다. 그저 내가 하고 싶었던 걸 시간을 내서 실제로 했을 뿐이다. 학생은 되지만 직장인은 안 된다는 법이 어디 있나. 나는 뒤늦게 피아노의 끈을 붙잡아 쥐었지만, 손가락이 무뎌진 걸 한탄하고, 어려워서, 바빠서 안 된다며 포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 언론계 대선배이기도 한 알란 러스브리저는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 없다고? 너무 늦었다고? 다시 쳐봐요! (No Time? Too Late? Play It Again!)

이건 피아노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여러분도 돌이켜보시길. 엄두가 안 나서 마음에 품고만 있었던,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은 없는지.    


*방송기자클럽회보 3월호에 실렸습니다.


   

 

 

'살며 생각하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춤뻡 파개자  (0) 2015.05.26
"대강 하고 가세요"  (0) 2015.04.20
딸의 배우수업, 모녀의 소통 시작  (0) 2015.01.16
'전문경영인'에 대한 환상  (0) 2014.12.31
내 인생의 책들  (4) 2014.10.1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