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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딸이 몇 달 전부터 노래와 무용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어서다. 공연을 많이 보러 다닌 편이긴 하지만, 자기가 직접 배우가 되겠다고 나설 줄은 상상도 못했다. 어릴 때부터 노래하는 걸 좋아하기는 했지만, 무대에서 연기를 하겠다고? 혹시라도 학과공부가 힘들어 일종의 도피처로 생각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워, 보기보다 험난한 길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지만, 딸은 다 알겠다고, 그래도 해보겠다고 했다. 

레슨을 받기 시작한지 한 달쯤 지났을 즈음부터, 딸은 온 몸이 너무 아프다고 호소했다. 본격적인 무용 수업에 들어가니 몸이 못 견뎌내는 모양이었다. 좀 지나면 익숙해져서 나아질 거야, 하고 달랬지만 딸은 날마다 고통스럽다며 우는 소리를 했다. ‘왜 공부가 제일 쉽다고 하는지 알겠다. 그렇게 한동안 고생하더니 어느 정도 적응을 했나 싶었는데 얼마 후엔 다른 고민이 시작됐다.

엄마, 나 요즘 너무 힘들어. 너무 쉽게 생각했나 봐. 내가 연기랍시고 하고 있는 게 다 껍데기고 거짓말 같아. 경험해 보지도 않은 걸 그냥 흉내만 내는 거잖아.”


. 그건 본질적인 고민이긴 한데……그렇다고 모든 배우들이 다 자기가 직접 경험해 본 것만 연기하는 건 아니잖아. 범죄자 역할을 하려면 직접 범죄를 저질러 봐야 해? 그런 건 아니지. 무대는 현실과 닮았지만 현실 그 자체는 아니잖아.”

아무리 그래도 내가 평소에 전혀 상상도 못했던 상황을 연기하려니까 너무 힘들어.”


그러니까 간접 경험이 중요하다는 거지. 책 읽고 공연 보고 생각도 많이 하고. 그러면 조금씩 감이 올 거야.”

정말 그럴까?”

한동안 잠잠해졌던 딸은 요즘은 뮤지컬 배우에 대한 친구들의 오해 때문에 속상하단다.


엄마, 애들이 내가 뮤지컬 배우 될 거라고 했더니 공부 안 해도 되고 매일 춤추고 노래만 하면 되니 얼마나 좋겠냐고 해. 춤추고 노래하는 건 뭐 그냥 되나. 그것도 다 공부인데. 그렇다고 내가 학과 공부를 안 하는 것도 아니고.”

딸은 그래서 친구들이 심심하면 , 노래 좀 불러봐하는 것도 짜증이 난다고 했다. 자기한테는 노래 한 곡 부르는 것도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닌데, 남들은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면서. 또 정작 노래를 부르면 별로 열심히 들어주지도 않는 것 같아 속상하단다.  

프로 배우라도 된 것처럼 벌써부터 예민하게 구는구나 싶어 웃음도 나왔지만, 내가 문화부에서 일할 때 꽃보직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어떤 기분이었는지 떠올려보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화부 일은 뭔가 치열하지 않고 쉽고 편하게 할 수 있는 일, 설렁설렁 해도 되는 일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인 것 같아 개운치 않았던 것이다. ‘공연 보고 놀면서 돈 버니 얼마나 좋겠느냐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나는 치열하게 일을 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문화부 기자뿐 아니라 공연계 종사자들은 이런 오해를 종종 받는다. 딸에게 이야기했더니 동병상련 같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요 몇 달간 딸과 몇 년치의 대화를 한꺼번에 한 듯하다. 한동안 엄마를 꼰대취급하며 대꾸도 잘 안 하던 딸이 요즘은 엄마는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말이 좀 통하는 것 같다며 곧잘 상담을 해온다. 공통의 관심사가 생겼다고나 할까. 공연을 같이 봐도 예전과는 느낌이 다르다. 연극 리어왕을 보며 대사들이 기가 막히다고 함께 감탄했다. 발레 공연을 보면서도 딸은 저런 동작들이 얼마나 힘든 건지 이젠 아니까 공연이 달리 보인다고 했다.

  문화부에서 일하면서 그 길이 보기보다 매우 험난하다는 걸 알게 됐기에
, 가능하다면 딸에게 딴 길을 권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공연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겠다니, 반갑기도 한 게 솔직한 심정이다. 물론 아직 어리니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관심사가 생길지, 새로운 길이 열릴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딸이 뮤지컬 배우가 되든 안 되든, 앞으로 딸과 공연 이야기, 예술가 이야기는 더욱 많이 하게 될 것 같다. 엄마가 가끔 커튼콜을 꿈꾸던문화부 기자였으니 그렇지 싶기도 하다. 어딜 가든 아빠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듣던 딸이었지만, 결국 엄마를 닮은 구석도 있었던 셈이다.   


*클럽발코니 매거진 1-3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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