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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내 인생의 책들

soohyun 2014. 10. 10. 02:09

요즘 페이스북에서는 '내 인생의 책 10권'을 소개하는 '릴레이'가 벌어지고 있다. (적어도 내 주변에서는 그렇다.) 다른 사람들이 써놓은 걸 재미있게 읽기만 하다가 나도 '지목'을 당했다. 정리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삶의 시기마다 나에게 큰 영향을 줬던 책들이 뭐였나 생각하다 보니, 내 '독서인생'을, 아니, 그냥 '인생'을 중간 결산하는 기분이다. 쉽진 않았지만 의미있는 숙제를 내준 페이스북 친구에게 감사를.   

1. 딱따구리 그레이트북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아버지가 월부로 동서문화사 발간 '딱따구리 그레이트북스'를 집에 들여놨다. 100권짜리 전집이었는데, 표지 빼고는 그림도 별로 없고 활자도 작아서 처음엔 에이 뭐야 했었다. 그런데 제일 먼저 읽었던 그리스 신화가 너무 재미있어서, 진도가 쭉쭉 나갔다. 그리스 신화 책 보다가 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를 전혀 못 들어 엄마한테 혼났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위인전, 동화, 고전소설, 역사, 교양 등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며 내 어린 시절 독서 생활을 책임졌던 전집.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이 책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100권의 목록을 적어놓은 블로그도 찾았다->
http://iblution.tistory.com/2225

2. 오래된 오페라/영화 입문서들


아버지가 보던 낡은 책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책은 비록 흑백이지만 화보로 가득한, 세계 유명 배우들을 소개하는 '천사와 악마의 시' 어쩌고 하는 책이었다. '헐리우드 키드'였던 아버지 영향으로 나도 영화를 어릴 때부터 좋아했고, 유명 배우들과 주요 출연작 얘기가 너무 재미있어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보고 또 봤다. (참고로 나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팬이었다.)

내가 어릴 때 보고 또 보고 한 책 중에는 표지가 찢어져서 제목도 지은이도 모르는 오페라 입문서가 있었다. 오페라를 줄거리 위주로 설명하는, 여기저기 테이프로 땜질한 낡은 책이었다. 돌이켜보니 나는 오페라 대본의 '자극적인 막장성'에 푹 빠졌던 것 같다. 오페라에 흔히 등장하는 출생의 비밀, 살인과 질투, 배반 같은 이야기들이 그렇게 흥미진진할 수가 없었다. 중고생 때까지도 심심하면 이 책들을 봤었는데, 언제 내다버렸는지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  

예전 아이들 키우는 집에 많이 들여놨던 품목 중에는 두꺼운 '세계대백과사전'도 있었다. 우리 집에도 한 질 있었는데, 역시 어느 출판사 것이었는지는 기억 안 난다. 나는 이 백과사전 중에서도 예술 분야, 특히 영화와 오페라에 해당하는 부분만 줄창 읽었다. 실제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영화. 오페라인데도 등장인물이나 줄거리는 책으로 읽어서 마치 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때도 있었다.         

3.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마가렛 미첼)

중학교 들어가면서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이 집에 새로 들어왔다. (역시 월부로) 처음엔
깨알같은 글자에 세로쓰기와 두툼한 두께가 기를 죽였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으면서 극복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극장에서 클라크 게이블과 비비안 리 주연의 영화도 관람해서 더 임팩트가 컸던 것 같다. 나는 당시 레트 버틀러라는 남자에 반했던 듯하다. 당시 내가 썼던 독후감에는 "'남북전쟁'은 사악한 미국 남부와 착한 북부의 전쟁이라고만 여겼었지만, 역사는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내용도 있었다. 


4. 사람의 아들(이문열) 

고 2 때였던 것 같다. 신문에서 이문열 관련 기사를 읽고 호기심이 생겨 책을 샀던 게 아닌가 싶은데 정확하진 않다. 어쨌든 친구 따라 교회 다녀본 경력도 있었던 나에게 이 책은 충격적이었고, 그러면서도 뭔가 새로운 세계에 번쩍 눈을 뜬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교회 열심히 다니던 친구에게 이 책 얘기를 했더니 '그 책은 위험하대. 믿음이 아주 두터워진 다음에 읽어야 하는 책이래'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책을 시작으로 이문열의 소설들을 읽었다. 
훗날 이문열이 보여준 모습에 실망하기도 했지만, 당시 소설가 이문열은 훌륭했다.   


5. 중고생을 위한 김용옥 선생의 철학강의

1986년 도올 선생이 발간한 철학 입문서인데, 한 살 어린 내 동생이 교내 경연대회에서(무슨 경연대회였는지는 역시 기억 안 난다. 이놈의 저질 기억력.....) 입상해 부상으로 받아왔다. 철
학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윤리 시간에 수박 겉핥기로 달달 외웠던 유명한 철학자들과 그 이론의 이름들 정도였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다소 어수선하고, 자기 얘기도 많이 하고, 거침없는 입담으로 한국 사회를 비판하는데, '철학자는 고루한 책상물림'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면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무슨 소리인지도 잘 모르면서 '여자란 무엇인가' 같은 도올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6.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엥겔스)  

고대사회의 특징을 고찰하면서, 생산에 따른 경제적 진보가 결혼과 가족의 형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저술한 고전. 대학에 들어가서, 이른바 '학회'에 가입했던 초창기에 읽었던 책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다. 공식적인 학교 교육에서는 전혀 접한 바 없었던 역사관, 세계관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경찰이 불심검문에서 가방을 뒤지기도 하던 시절이라 이 책을 가방에 넣어온 날은 괜히 긴장했었다. 학회 활동은 한 학기 정도만 열심히 하고 농땡이쳤지만, 이후에도 이 책으로 시작했던 여성학 세미나는 꽤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참가했다. 

7. 세계영화사(잭 씨 앨리스)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 많지만, 나도 한때 그랬다. 대학 시절 혼자서 극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관심이 많아서 관련 강의들을 계속 찾아 들었다. '세계영화사'는 그렇게 들었던 '영화론'강의의 부교재 쯤 됐던 것 같다. 당시로서는 꽤 비싸고 두꺼운 책이었지만 열심히 읽어서 본전은 뽑았을 거다. 대학 졸업 이후에도, 어릴 때 즐겨 봤던 배우 화보집만큼은 아니지만, 자주 들춰봤던 책이다. 공연 취재를 담당하면서 공연의 현장성에 매료되고 영화와 멀어져 한동안 안 봤던 책인데, 생각 난 김에 다시 들춰봐야겠다.

8. 성과 속(멀치아 엘리아데)

종교학자 정진홍 선생의 강의에서 엘리아데를 처음 만났다. 정진홍 선생의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바로 이런 강의를 들으려고 대학에 왔구나!' 했다. 강렬한 지적 희열이었다. 

특별히 믿는 종교가 없다 해도 인간은 근원적으로 종교적인 존재이고, 내 삶 속에 종교의 기억이 있다는 깨달음. 엘리아데를 만났던 그 강의실이, 그 시간이, 내겐 종교적 체험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강의 덕분에 '성과 속'을 시작으로 엘리아데의 저서들을 읽게 되었고, 내 전공인 경영학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이 학문에 매료된 나머지, 종교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해 볼까 생각도 했다. 결국 생각에 그치고 말았지만. 

9. Beloved(토니 모리슨)

미국의 흑인 여성작가 토니 모리슨의 장편 소설. 영문과에서 개설한 중급소설강독 강좌에 들어갔다가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번역되지 않은 영문으로 장편 소설을 읽어낸 것은 그 때가 처음이라 더 기억에 남는 것 같다. 교수님의 지도로 함께 읽는 수업 교재였지만, 아주 어릴 때 죽은 딸의 혼령과 함께 사는 흑인 여인의 이야기에 강력한 흡인력이 있었다. 지독하게 끔찍한 기억들을 담담하게 풀어내는데, 외국어라 100퍼센트 감지하긴 어렵지만, 문체가 독특했다. 나중에 한국어 번역판으로 다시 읽었을 때는 그런 묘미가 살아나지 않아 아쉬웠다. 훗날 토니 모리슨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Beloved 읽던 기억을 떠올리며 반가워했다. '난 그 때부터 이미 이 작가를 알아봤다고!' 이런 생각으로 혼자 으쓱했는지도 모르겠다. 

10. Nightfall (아이작 아시모프)

영어 공부 좀 해보겠다며 사다놓은 영문 소설책 가운데 몇 안되는 '완독'한 책. 대학 졸업 후에 읽은 건 확실한데, 정확한 시기는 기억 안 난다. 처음엔 무슨 가상의 행성 얘기가 나오고 좀 황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읽을수록 빠져들었다. 
2천년마다 종말을 맞이하는 세계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거대한 상상력은, 이전에 읽었던 소설에선 경험하지 못했던 종류의 것이었다. 발동이 걸려 아시모프와 다른 작가들의 사이언스 픽션들을 읽기 시작했다. 역시 영문판으로 샀지만 분량에 질려 일찌감치 포기했던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시리즈는  최근 발간된 한국어 완역판으로 '드디어' 읽었다. 역시나 '거대한 상상력'!!! 


11. 토지(박경리)

둘째 낳고 나서 얻은 출산휴가는 '토지'와 함께 보냈다. 출산 직후 아주 힘든 기간이 지나가고 조금 살만해지면서, 그동안 읽고 싶었지만 엄두를 못 냈던 '토지' 읽기에 돌입했다. 둘째가 잠든 시간에는 어김없이 '토지'에 매달렸다. 당시 솔 출판사에서 새로 나왔던 16권짜리 완결판이었다. 책 보느라 눈 나빠지고, 새벽까지 잠도 안 자고, 산후조리는 완전 엉망으로 했지만, 전엔 출근 걱정 때문에 마음껏 하지 못했던 '몰아읽기' 재미가 쏠쏠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항상 갓난아기 둘째의 숨소리를 배경으로 읽었던 책이라 특별하게 느껴진다.

**2번의 오래된 영화/오페라 입문서들은, 제목도 지은이도 출판사도 특정할 수 없어서 빼버리려 했지만,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했던 책이라 넣어놨다. 그래서 '내 인생의 책 10'이라 했지만 
11번 항목까지로 늘어나 버렸다. 대부분이 학창시절에 읽었던 책들이다. 아무래도 감수성 예민했던 그 시절 읽었던 게 더 기억에 남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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