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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향 북미 취재기 3편을 쓰고 있던 중이었습니다만, 올해 브누아 드 라 당스에 김지영-이동훈 씨 등이 후보로 올랐다는 소식을 입수하고 이 글부터 씁니다.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는 무용계의 아카데미 상으로 불리는 상입니다. 국제무용협회 러시아본부에서 무용가와 안무가, 작곡가 등을 대상으로 매년 시상하고 있습니다. 1992년부터 시작됐으니 올해가 20회째입니다. 국제 무용 콩쿠르도 많지만, 브누아 드 라 당스는 특히 한창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직업 무용수에게 주어지는 상으로, 무용수에게 최고의 영예입니다.

이 상의 역대 수상자를 살펴보면 실비 길렘, 줄리 켄트, 울리아나 로파트키나 등 쟁쟁한 이름들이 즐비합니다. 한국인으로는 1999년 강수진 씨가 ‘카멜리아 레이디’로 이 상을 처음 받았습니다. 2006년에는 우리 나라 국립발레단의 김주원 씨가 ‘해적’으로 수상했습니다.

올해 브누아 드 라 당스의 후보자가 발표됐습니다. 후보들은 각 부문을 합쳐 7개국 20명입니다. 국립발레단의 김지영 씨가 ‘로미오와 줄리엣’, ‘지젤’로 최고 여성 무용수상 후보에 올랐고요, 이동훈 씨가 ‘로미오와 줄리엣’, ‘지젤’, ‘호두까기 인형’으로 남성 무용수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또 영상과 무용 공연이 만난 작품 ‘윤이상을 만나다’로 정의숙. 변혁 씨가 안무가상 후보에 올랐군요. 이 두 사람은 최근 ‘윤이상을 만나다’에 이어 두 번째 시네마틱 퍼포먼스 프로젝트 ‘자유부인’을 선보인 바 있습니다.



아무래도 여성 무용수 부문에 관심이 가서 살펴보니, 후보가 모두 7명이군요. 알리나 코조카루, 라에티시아 퓌졸 등이 김지영 씨와 함께 후보에 올라 있습니다. 알리나는 2004년 ‘신데렐라’로 이미 브누아 드 라 당스 상을 받은 바 있는데, 이번에는 함부르크 발레단 존 노이마이어 안무작 ‘릴리옴(Liliom)으로 다시 후보에 올랐습니다. ‘릴리옴’ 원작은 20세기 초반 활동한 헝가리 작가 몰나르가 썼는데, 리처드 로저스&오스카 해머스타인 콤비의 뮤지컬 ‘회전목마(Carousel)’로도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합니다. 

작곡가 부문에서 두 명의 후보도 워낙 친숙한 이름이라 관심을 끌었습니다. ‘셀부르의 우산’ 등 수많은 영화 음악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곡가 미셀 르그랑, 그리고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가 후보에 올랐어요. 미셀 그르랑은 ‘릴리옴’의 음악으로, 폴 매카트니는 뉴욕 시티 발레단의 ‘오션스 킹덤(Ocean’s Kingdom)의 음악으로 후보가 됐네요.

올해 브누아 드 라 당스의 공동 심사위원장은 볼쇼이 발레단의 유리 그리가로비치와 함부르크 발레단의 존 노이마이어입니다. 유리 그리가로비치는 국제무용협회 회장으로, 이 상의 집행을 주관해 왔습니다. 국립 발레단이 ‘스파르타쿠스’,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등 유리 그리가로비치 안무작을 꾸준히 공연해서 한국 팬들에게도 친숙하지요. 존 노이마이어는 강수진 씨 빼고는 떠올릴 수 없는 작품 ‘카멜리아 레이디’의 안무가로 유명합니다. 강수진 씨는 바로 이 작품으로 브누아 드 라 당스 상을 받았지요.

 

 

다른 심사위원들도 모두 쟁쟁한 사람들입니다. 마뉴엘 르그리, 알레산드라 페리…… 그런데 친숙한 이름이 눈에 띕니다. 국립발레단의 김주원 씨! 2006년에는 이 상의 수상자였던 김주원 씨가 이번에는 심사위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최태지 단장이 2006년 한국인 최초로 심사위원을 맡은 바 있는데, 이번에는 김주원 씨입니다.

올해 수상자는 5월 22일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발표되고, 시상식과 함께 수상자 갈라 공연이 펼쳐집니다. 5월 23일에는 역대 수상자들의 특별 공연이 열릴 예정입니다. 올해는 한국인 후보가 여럿 이름을 올렸고, 심사위원에도 한국인이 있으니, 그만큼 국제 무대에서 한국 무용계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뜻으로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올해 브누아 드 라 당스의 심사 결과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 봐야겠습니다.   

브누아 드 라 당스에 대해 덧붙이자면, 행사 규모가 커지면서 요즘은 바뀌었지만, 원래 이 상은 유네스코가 제정한 세계 춤의 날인 4월 29일에 수상자를 발표했습니다. 세계 춤의 날은 근대 발레의 개척자였던 프랑스의 무용가 장 조르주 노베르(1727-1810)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세계 춤의 날에 이 시대의 위대한 무용가를 선정해 시상하고 축하 공연도 열어 무용인들의 잔치를 벌이자는 취지였던 거죠.

그런데 '브누아 드 라 당스'라는 상 이름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한
국에서는 흔히 ‘무용의 영예’를 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번역이 아닙니다. Danse는 Dance, 즉 ‘무용’이란 뜻이지만, 구글 번역기를 암만 돌려봐도 ‘Benois’는 그냥 ‘Benois’로만 나옵니다. Benois는 고유명사라는 얘기입니다.

‘브누아’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예술가 집안인 브누아 가문에서 따온 것입니다. 프랑스 대혁명 때 프랑스에서 러시아로 이주한 브누아 가문은 대대로 미술, 건축, 조각 분야에서 수많은 예술가를 배출했습니다. 예술가의 피가 흐르는 집안이었던 거죠. 20세기 들어서는 세기의 흥행사 디아길레프가 이끈 ‘발레 뤼스’에 합류해 발레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알렉상드르 브누아와 루이 브누아 형제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전설적인 무용수 니진스키, 안나 파블로바 등이 활동한 ‘발레 뤼스’는 혁신적인 안무와 무대로 서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러시아 발레단의 황금기를 열었는데요, 화가 루이 브누아는 초창기 발레 뤼스의 무대미술과 건축 등에 참여했습니다. 화가이며 작가, 평론가이기도 했던 알렉상드르 브누아는 대본도 쓰고 무대장치, 의상을 디자인하기도 했습니다. 알렉상드르 브누아는 스트라빈스키가 음악을 맡은 발레 ‘페트루슈카’의 의상과 무대를 디자인하는 등 무대미술에 새로운 장을 열었고,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곡을 쓴 발레 ‘세헤라자데’(김연아의 피겨 스케이팅 배경음악으로도 유명해졌죠)의 대본을 썼습니다. 

‘브누아 드 라 당스’의 트로피는 두 사람의 무용수가 새겨진 모양입니다. 이 트로피를 디자인한 사람은 조각가 이고르 유스티노프입니다. 그는 루이 브누아의 딸과 결혼한 유명 배우 피터 유스티노프의 아들입니다. 이고르 유스티노프는 어머니 쪽으로 브누아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셈이지요. 이고르 유스티노프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브누아 가문의 미술관을 갖고 있고, 브누아 가문을 대표해 브누아 드 라 당스 상의 제정에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SBS 뉴스 웹사이트에 취재파일로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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