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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요일 밤부터 다음날인 금요일 아침까지, 나는 '야근'이었다. 방송 보도국의 야근자들은 밤을 새며 마감뉴스와 아침뉴스를 만들어 방송한다. 금요일 새벽, 파업 중인 KBS 새 노조가 총리실 사찰 관련 문건 2,600여 건을 입수해 그 내용을 공개한 리셋 KBS 뉴스를 인터넷에 올렸고, 많은 조간신문들이 이 내용을 여러 면을 할애해 비중있게 보도했다. 

그 새벽에 여기저기 전화 취재를 해서 사정을 알아보니, 이 문건과 관련 내용을 KBS 새 노조에서 목요일 저녁에 조간신문들에 제공했고(이를 언론에서는 '풀(pool)'이라 한다), KBS 방송 단독을 유지하기 위해 타 방송사에는 금요일 중에 제공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SBS에는 이 문건이 없었고, 관련 내용을 취재해 자체적으로 쓴 기사도 있을 수가 없었다. 

다른 언론에서 보도한 중요한 기사인데 우리는 없을 경우(이를 '낙종'이라 한다. 또는 '물을 먹었다'는 은어도 쓴다), 취재 부서의 확인을 거쳐 다른 언론이 쓴 기사를 우리도 '받아서' 쓸지 말지를 결정한다. 아침 뉴스에 이 기사를 보도할 것이냐 말 것이냐. 아침 뉴스를 앞둔 급박한 상황에서 보도국 야근자들의 논의가 시작됐다. 

담당 취재 부서에서는 이 문건을 우리가 입수한 뒤에 직접 내용을 검토해 기사를 쓰자는 신중론이 나왔다. 그 당시 우리에겐 다른 언론이 이 문건에 대해 쓴 '2차 자료'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날이 밝으면 이 문건을 입수해 제대로 기사를 써도 늦지 않다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짧지만 심도 있는 논의 끝에, 워낙 중대한 사안이니 아쉬운 대로 '2차 자료'를 바탕으로 이 기사를 '받아' 쓰기로 결정됐다. 

그래서 이 기사는 SBS 아침 7시 뉴스의 주요뉴스로 보도됐다. '파업 중인 KBS 새 노조가 사찰 관련문건 2,600여 건을 입수했다며 이 내용을 인터넷에 공개했다'고 이 기사의 출처를 밝혔고, 기사 내용도 사례 하나하나를 적시하기보다는 중요한 내용을 정리하는 정도로 했다. 우리가 직접 취재한 것이 아니니 이렇게 쓰는 게 정석이었다. 국제부 기자들이 '뉴욕 타임스가 ~라고 보도했다'라는 식으로 타 언론을 인용 보도하는 것처럼. 물론 KBS나 MBC 아침 뉴스에는 관련 기사가 나가지 않았다.

야근을 마치고 퇴근해 자다가 일어나 금요일 저녁 뉴스를 틀었다. SBS가 민간인 사찰 관련 뉴스를 톱단락에, 굉장히 비중있게 보도하고 있었다. KBS나 MBC도 톱으로 보도하긴 했지만, 분량이 적었고, 언론사 사찰과 관련한 민감한 부분은 상세히 보도하지 않았다. 나중에 트위터를 보니 KBS는 이 문건을 'KBS가 입수했다'고 보도하고는, 정작 이 문건을 입수하고 취재해 KBS 리셋 뉴스를 만든 새 노조 소속 기자들에게는 징계를 논의한다 한다.

토요일자 뉴스를 보니 청와대 반응이 나왔다. 의외의 반응이다. 특검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는 했지만, 2,600여 건 중 2,200여 건은 노무현 정부에서 이뤄진 사찰 문건이라며 반격했다. '이 정부에서 작성한 문건은 진정, 제보, 투서, 언론보도 등을 토대로 조사한 400여 건으로 검찰에서 단 2건 외에는 당시 공직윤리지원관실 업무 범위 안에 있는 것으로 판단해 종결 처리됐다'고 했단다. 그리고 사실 관계를 무시한 야당의 정치 공세라고 했단다. 

알고 보니 2,600여 건 모두가 이 정부에 작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다. 지난 정부 때 작성된 경찰청 직무 감찰, 인사 등 단순 보고자료들이 2,200건 정도 된단다. KBS 새 노조는 처음엔 모든 문건이 2008년 이후 작성된 것이니 이 정부에서 작성된 것이라고 했지만, 이후 그게 아니었다며 공식 입장을 냈다. 2,600여 건의 작성 시기를 일일이 확인하지 못해 청와대의 '물타기' 빌미가 된 것에 대해 사과한다고 밝혔다. 새 노조는 하지만 이 사안의 핵심은 이 정부의 불법 민간인 사찰이라고 지적했다.   

다른 언론들도 2,600여 건 모두가 이 정부의 사찰 사례인 것처럼 썼으니 그 점은 아쉽다. (내가 야근하던 날, 그 점이 분명치 않아 SBS 아침뉴스의 기사는 "현 정부가 전방위로 벌인 사찰 관련 문건이 '무더기로' 공개됐다. KBS 새 노조가 2,600여 건의 사찰 관련 문건을 입수했다며 이 내용을 인터넷에 공개했다."로 썼었다.) 민주통합당 박영선 의원도 2007년이라고 표기된 문서를 들고 나와 이게 화면에 잡히면서 꼬투리 잡힐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그렇다고 해도 청와대의 반응은 KBS 새 노조가 지적한 것처럼, 이 정부의 불법 민간인 사찰이라는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라고밖에 안 보인다. 문제가 된 민간인 사찰, 불법 사찰 사례는 이 정부에서 이뤄진 일 아닌가. KBS YTN 등 '언론 장악 시도'와 관련된 사례, 미행하거나 도청한 듯한 불법적 정황이 보이는 사례들은 뭔가. 단 두 건 외에는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업무 범위 안에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니, 그게 비정상적인 거지, 숫자가 틀렸다고 '정치 공세'라고 하다니. 마치 전 정부에서도 문제가 되는 사찰 사례가 2,200여 건 있었던 것처럼 '물타기'를 하는 게 정치 공세 아닌가.  

요즘 하도 큰 사건이 뻥뻥 터지다 보니, 웬만한 사건에는 무감각해지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KBS 도청 파문에 연루됐던 기자가 아직도 국회에 출입하며 총선 관련 보도를 하고 있는 걸 보니, 이렇게 큰 사건도 이미 잊혀졌나 싶고, 이번 사건도 곧 본질은 잊혀지고 정치 공방만 남지 않을까 두렵다. 그러고 보면 상당히 많은 사안이 그런 식으로 진행돼 온 것 같다.     

내 블로그에서는 주로 문화부에서 취재하면서 겪은 일이나 느낀 점 등을 글로 써왔으니, 이 글은 예외적인 경우가 되겠다. 하지만 내가 야근하면서 관여했던 기사이기도 하고, 요즘 정국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것이 많아 이렇게 글을 써본다. 사실 언론 파업 정국에서 MBC KBS YTN이 다 파업 하는데 왜 SBS는 파업 안 하느냐, SBS는 역시 '시방새'다, 등등의 글을 인터넷에서 접하면서 마음이 심란했었다. SBS 뉴스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기사가 없다고 무조건 비방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SBS는 민영 방송이다. 정권의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미치는 방송사는 아니다. 물론 이 정권이 방통위에 커다란 권력을 안겨주고 방송사에 이런저런 통제를 가해 왔으니 SBS도 정권의 영향력에서 100퍼센트 자유롭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다른 공영 방송사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편이다. 사장 선임 과정부터 다르다. SBS는 사장 선임 과정부터 다르다. 노조원들이 정권의 낙하산 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공영 언론사들과는 상황이 다른 것이다. '닥치고 파업'해야 할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SBS마저 파업한다면 그게 바람직한 것인가. SBS 뉴스마저 지금의 KBS나 MBC 뉴스처럼 되는 게 옳은가. 

SBS 기자들은 공정 보도를 내세운 언론 파업의 대의를 지지한다. 파업 중인 언론사 동료들에게 연대와 지지의 뜻을 표명하기 위해 앵커와 기자들이 '블랙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SBS에 대해서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이런 편견이 형성된 가장 큰 책임은 SBS에 있다. 뉴스가 시청자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신뢰를 안겨주지 못했던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처절히 반성한다. 더 노력해야 한다. 다만, 바라건대, SBS를 '닥치고 비난'하지 말고, 제발 무슨 기사가 나갔는지, 어떻게 보도했는지,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비판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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