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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곧 다시 무대에 오른다. 2001년 초연 이후 10년 동안 꾸준히 무대에 오르고 있는 연극이다. 나는 2001년 초연과 2002년 공연, 이렇게 두 차례 공연을 봤으니, 꽤 오래 전 일이다. 이후 수많은 유명 배우들이 이 무대를 거쳐갔다. 이번 공연에는 김여진 씨를 비롯한 배우 4명이 출연한다. 오랜만에 이 작품을 꼭 다시 볼 생각이다. 2002년 서주희 씨의 1인극으로 공연됐던 무대를 보고 썼던 글을 다시 올려본다. 오래 전 글이라는 걸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버자이너 모놀로그(VaginaMonologue)' 들어보셨나요? 아마 이미 보신 분들도 많을 것 같은데, 얼마 전부터 앙코르 공연에 들어간 화제의 연극 제목입니다

지난주 금요일, 이 연극을 보고 왔습니다. 그리고,지난해 이 연극이 국내에 초연됐을 때 제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는 제목으로 썼던 글을 다시 찾아봤습니다. 글에서 제가 그 당시 느꼈던 감동이 묻어나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이 감동은, 두 번째 연극을 보고 난 지금, 더 큰 것 같습니다. 지난번 쓴 글과 겹치는 부분도 많지만, 처음 이 연극을 접하는 분들을 위해 다시 한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제목에 들어가는 '버자이너(Vagina)'는 여성의 성기, 질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연극은 미국의 극작가 겸 여성운동가 이브 엔슬러가, 수백명의 여성들과 인터뷰를 하고 썼습니다. 1996년 뉴욕 오프 브로드웨이의 작은 극장에서 처음 공연되기 시작한 이 연극은 이른바 '버자이너 현상'을 일으키며 화제가 됐습니다

위노나 라이더, 케이트 윈슬렛, 수잔 서랜든 같은 헐리웃의 유명 배우들이 이 연극을 거쳐갔고, 지금도 뉴욕, 런던에서 절찬리에 공연되고 있습니다. 여성의 성기에 관한, 여성의 몸에 관한 얘기입니다

지난해 5월 이 작품의 국내 초연에서는 김지숙, 이경미, 예지원씨 이렇게 세 명의 배우들이 출연했었습니다. 이후 이 연극은 서주희씨 주연의 모노 드라마로 다시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지난 4 11일부터 앙코르 공연에 들어갔습니다제목도 '서주희의 버자이너 모놀로그'로 붙였습니다. 서주희씨는 제가 연극 '레이디 멕베스'에서 처음 보고 그 연기에 반했던 배우입니다.  

모노 드라마는 배우 혼자서 공연 시간 전부를 책임 져야 하기 때문에 정말 연기력이 좋은 배우 아니면 엄두를 못내는 장르입니다. 세 명이 감당하던 연극을 혼자 하게 된 서주희씨는 기대 이상의 '신들린 듯한 연기'로 무대를 장악했습니다. 여러 여성들의 독백이 이어지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연극에서 서주희씨는 수많은 얼굴로 '변신'합니다. 놀라왔습니다

연극 초반에 서주희씨는 이 연극의 제목에 들어있는 '버자이너'라는 말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합니다. 두려운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서 해야 할 순간이라고, '그 말 바로 버자이너의 우리말인 '보지'라고, 이 연극에 출연하기 전까지는 한번도 소리내서 말해본 적이 없고, 지금까지 공연 때문에 7천번 이상 이 말을 해 왔지만, 여전히 하기 두려운 말이라고. (지난번 글 쓸 때도 그랬습니다만, 저도 이 말을 써야 하나, 아니면 XX로 해야 하나, 잠깐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의 사전적 정의를 읽어줍니다. 모두 이 말을 금기어로 정의하고 있었습니다

'버자이너 모놀로그'라는 제목은 미국에서도 파격적이었다고 합니다. 외국어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조금 중립적으로 들리지만요. 그래서 미국에서는 이 연극의 제목을 'V-모놀로그', 또는 그냥 '모놀로그'라고 하는 경우도 많았답니다. 한국 공연 주최측은 이 제목을 어떻게 번역할까 고민하다가, 직역했을 때 빚어질지도 모를 '오해' '혼란'을 막기 위해 영어 제목을 그냥 사용했다고 밝혔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게 하는 힘이 있다

이 연극이 받았다는 평 가운데 가장 귀에 쏙 들어오는 말이었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여성의 성기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닌데도, 우리 몸의 어엿한 일부분인데도, 여성들은 오랫동안 이것이 없는 듯 살아왔습니다. 함부로 성기를 가리키는 말을 입에 올리지도 못했습니다. 이 말은 '거기', '아래' 같은, 다른 말들로 대체됐습니다그러면서 여성의 자연스런 욕망은 숨겨야 할 것으로 치부돼 왔습니다

이 연극은 여성들이 자신의 성에 대해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말하고, 그러면서 지금까지의 고정 관념을 깨뜨리도록 합니다. 남성들 중심의 역사속에서 성적인 도구가 됐고,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만 존재해 왔던 여성의 몸을 주체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신성하다는 것을 깨닫고, 집중하고, 누리고, 우리 몸의 주인이 되자는 것입니다

남자 친구와의 첫 데이트에 실패한 이후("그가 키스를 했을 때...도저히 참을 수 없는 그 뭔가가내 안에서 흘러 넘쳐서 내 팬티를 다 적시고, 그의 새 옷까지 몽땅 적셔버렸어. 그가 그의 옷을 찢어버렸을 때, 내 마음도 찢어져 버렸어."), 70세가 넘어서까지 자신의 성에 대해 수치심을 느껴왔던 할머니이 할머니에게 '그 곳'은 저기 지하에 있는 어두컴컴한 '창고'이며,'축축하고 냄새 나는 곳'이고, '폐쇄된 지 오래된 곳'입니다. 이 할머니는 결국 자궁암으로 자신의 아기집을 들어내게 됐다면서, 쓸쓸하게 이야기를 마칩니다

언젠가는 백마 탄 왕자가 와서 내 인생을 끌어주고, 오르가즘까지 가져다 줄 거라는 환상을 가졌지만, 오르가즘을 느껴보지도 못하고, 이러다 내 인생 별볼일 없이 끝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 한 여성의 독백도 있습니다. 이 여성은 '버자이너 워크샵'에 참가해 처음으로 경이로운 오르가즘을 경험하고, 자기 자신까지 사랑하게 됩니다

동성애 이야기도 있고, 어린 시절 아버지의 친구에게 성폭행 당했던 한 여성의 체험담도 나옵니다. 성교중의 신음 소리를 건강한 에너지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연구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특히 관객석은 웃느라 '뒤집어집니다'.) 이렇게 평소에 잘 듣지 못했던, 하지 못했던 파격적인 이야기들이 가득하지만, 이 연극의 색깔은 '야한 핑크빛'이 아닙니다. 때로는 유쾌하게 기존의 잘못된 관념들을 깨부수고, 때로는 관객을 숙연하게 합니다

전쟁 중 7만 명이나 강제로 성폭행 당했다는 보스니아 여성들의 비극적인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보스니아 여성들의 증언을 직접 듣고 슬픔과 분노를 참지 못했다는 이브 엔슬러그의 시 '내 자궁은 내 고향마을이야'는 구절구절이가슴을 칩니다. 일본군에 끌려가 성의 노예가 됐던 우리네 할머니들의 한 많은 삶도 떠올랐습니다

"군인들이 내 거기에 길고 두꺼운 개머리판을 박은 다음부터 모든 게 끝났어. 섬뜩하게 차가운 그 쇠막대는 내 심장을 하얗게 지워버렸어. 난 그들이 내 안에 그냥 총을 쏴버릴지, 아니면 뱅뱅 도는 내 머릿속까지 드르륵 긁어버릴지 전혀 알 수 없었어

여성의 몸을 이야기하면서 '출산'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연극 종반에는 이브 엔슬러가 친지의 출산을 옆에서 지켜보고 감동받아 썼다는 시가 낭송됩니다. 이 시에는 여성의 몸의 경이로움, 생명의 신비가 가득합니다

"그녀의 질이 열릴 때 나 거기 있었다
나는 보았다
아이가 빠져나온 그녀의 질을
온통 널려져 모든 것을 내놓고 
잘려지고 부어오르고 찢겨진 채 
온통 피 흘리고 있는 그녀의 보지를 바라보았다
우리를 위해 고통을 느낄 수도 
우리를 위해 죽을 수도 
그리고 피 흘리고, 또 피 흘리며 
우리를 이 힘들고도 경이로운 세상과 만나게 한다
여자의 자궁도 마찬가지
나 거기 있었다
나는 기억한다. 우리 모두 기억한다." 

연극이 끝난 뒤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는 많은 관객들이 남아서, 연출자 이지나 씨와 배우인 서주희씨에게 궁금한 점을 질문했습니다. 저도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었는데, 그 부분을 한 관객이 질문했습니다. 신음 소리가 나오는 부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유쾌하게 웃었지만, 걱정도 좀 됐었습니다. 아무래도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강조되다 보니 혹시나 선정적으로만 비쳐지지 않을까하는 걱정이었습니다. 이지나씨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부분은 극작과 연출의 차원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연극이 중반 이후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거든요. 그리고 연극은 '계몽'이 아니거든요. 메시지만 나열한다면 계몽 캠페인과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관객들에게 연극 보는 재미까지 선사하면서 극적인 효과를 내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많은 관객들이 "이 연극을 다시 보고 싶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서주희씨는.이 연극은 자신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습니다. 관객과 배우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연극을 보고 좋았다면 그것은 관객들이 잘 했기 때문이라면서, 관객에게 감사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연극은 유쾌하고 재미있으면서도, 심각하고 진지합니다. 여성들에게뿐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인생을 바라보는 눈을 바꿀' 질문을 던집니다. 저와 함께 이 공연을 본 저희 회사 동료기자(모두 남성들입니다)들도, 이연극이 던지는 충격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다시 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연극을 두 번 봤지만,또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꼭 남편과 함께 볼 생각입니다.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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