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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이틀간 유리 테미르카노프가 이끄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내한공연을 한다. 2006년, 그의 공연을 보고 와서 신들린 듯 써내려갔던 '연서'를 다시 올려본다. 





오늘밤, 나는 그를 세번째 만났다. 

처음 만남에서 나는 그에게 반했고, 두번째, 세번째, 만남이 이어져도

그를 만날 때의 설레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은발의 그는, 멋지고 세련된 신사다.  

그가 내가 앉아있는 쪽으로 얼굴을 돌릴 때,

나는 그 온화한 미소를 잠깐이라도 더 보고 싶어

그 순간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지속되기를 바랐다.


 조금 전에 그를 만난 그 장소를 떠나왔지만,

그를 만난 감동으로 내 가슴은 아직도 뛰고 있다.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유리 테미르카노프다.


 나는 그를 2001년 가을에 처음 만났다.

그는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 때

갑자기 지병으로 쓰러져 공연 둘째날 지휘를 못하게 된 쿠르트 마주어 대신 포디움에 섰다.

자신이 이끄는 오케스트라와 일본 순회 공연 도중 단 하루의 여유를,

기꺼이 한국에서의 '대타 지휘'를 위해 바친 것이다.

그가 하루종일 런던 필하모닉과 리허설을 한 끝에 들려줬던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4번,

쿠르트 마주어를 보지 못한 아쉬움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나는 대타 지휘에 혼신의 힘을 다한 그의 따뜻한 인간됨에 반했고, 멋진 용모에 반했고,

무엇보다도 그의 음악에 반했던 것이다.


 그리고 2003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한국을 찾은 그를 다시 만났다.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2번을 연주했던 그 날.

지휘봉을 쓰지 않고 마치 물결이 일렁이듯 손을 유연하게 저어

단원들을 이끌던 그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의 지휘로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가 빚어내던 소리.

그 깊고 풍요로운 음색이란. 박력과 서정을 완벽하게 조화시키던 그 솜씨란.

때는 무르익은 가을이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역시 가을날에 나는 그를 세번째로 만난 것이다. 


그는 더욱 멋있어졌다.

그리고 멋있는 남자를 또 한 사람 데리고 왔다.

역시 러시아가 고향인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펠츠만.  

나는 이미 지난 여름 대관령 음악제에서

펠츠만의 연주에 깊은 인상을 받은 바 있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의,

때로는 장쾌하고, 때로는 한없이 낭만적인 선율을 연주하며

이 두 사람이 주고받는 미소는 너무나 친근하고 따뜻해 보여,

내가 질투까지 날 지경이었다.


연주를 마친 펠츠만은, 관객의 환호성 속에 마치 소년 같은 천진한 웃음을 보이며, 

무대 인사를 하기 위해 날렵한 걸음으로 등퇴장을 반복했다.

그가 예민하고 까다로운 연주자라는, 언젠가 들은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2부에서 테미르카노프가 오케스트라와 함께 들려준 곡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

가슴을 파고드는 강렬한 선율로 시작해, 한 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명연이었다.

지난번 BBC 심포니의 쇼스타코비치 5번도 괜찮긴 했지만,

오늘 연주는 과연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의 '기득권'을 관객들에게 확인시켜 준 듯했다.  

박력 넘치는 관, 깊고 부드러운 현,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은 바로 이 곡을 초연했던 오케스트라 아닌가.

  

 연주가 끝나고 여러 차례 커튼콜 끝에 이어진 앙코르.

나는, 우리는, 그를 빨리 떠나보낼 수 없었던 것이고,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중 님로드는 정말 아름답고 장엄해서,

그가 연주를 마치고 손을 내린 뒤에도 한동안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지휘하는 그의 모습이 마치 무용가 같다는 생각도 했다.


 오케스트라가 두번째 앙코르로  프로코피에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중

티볼트의 죽음을 연주하기 시작할 때, 나는 환희에 휩싸였다.

마이요의 발레를 본 이후부터 이 음악만 들으면 항상 가슴이 뛰었지만,

오늘 연주는 내 심장 박동의 강도를 더욱 높여놨다.


 두번째 앙코르 곡이 끝나자마자 거의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조금만 더 있어주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박수를 보냈다.

아마 나뿐 아니라 다른 관객들도 그를 떠나보내기 싫었을 것이다.  


  아아, 이제 나는 그를 언제 다시 만나게 될까. 

그와 헤어진 지 2시간이 조금 지났는데,

나는 벌써부터 기약 없는 다음번 만남을 기다리게 됐다.


 이게 얼마만인가. 공연장을 다녀오자마자

말들이 저절로 폭포수처럼 흘러넘치는 이런 '연서'를 쓰는 것은.

좋은 공연을 본다는 것은 어쩌면 사랑에 빠지는 것과 비슷한지 모른다.


         <2006년 1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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