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딸이 '노다메 칸타빌레'에 몇달째 푹 빠져있다. 이전에는 한 케이블방송의 '오페라스타'라는 프로그램을 즐겨봤는데, 이 두 프로그램 덕분에 클래식 음악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졌다. 아래는 '클럽발코니 픽스' 매거진 이번 호에 기고한 글이다.

'노다메 칸타빌레' 최종악장 영화포스터


지난 일요일, 아주 오랜만에 말러의 교향곡 1<거인>을 집에서 틀었다. 아이들 키우고 일 하느라 바빠서 최근 집에서 느긋하게 음반을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마음 먹고 음량도 좀 키워놓고 듣는 참인데, 딸이 아는 척을 한다.

엄마, 이거 말러 아니야?”

이게 웬일인가. 얘가 말러를 알다니. 나는 반색을 했다.

, 네가 말러를 어떻게 알아? 이 곡 들어봤어?”

. ‘노다메에 나오잖아. 치아키 센빠이가 지휘한 거 아니야?”

몇 달 전 쉬는 날에 딸하고 같이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몇 회분을 온종일 몰아서 본 적이 있다. 남들은 몇 년 전에 섭렵한 드라마를 뒤늦게 찾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노다메 칸타빌레는 잘 알려졌다시피 음악 학교를 배경으로 음악가 지망생들이 펼쳐내는 얘기다. 만화로, 드라마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애환을 재미있게 묘사했고, 연주 장면도 아주 실감난다.

딸은 이 드라마에서 피아노와 지휘에 천재적 재능을 지닌 치아키를 좋아했다. 피아니스트 지망생인 천방지축 여주인공 노다메가 치아키 센빠이’(선배)로 부르며 사모해 마지 않는 인물이다. 나는 이 드라마를 끝까지 다 보진 못했는데, 딸은 계속 꾸준히 보는것 같더니 말러를 알아듣는 쾌거까지 이룩한 것이다. 감격에 겨워 바로 트위터에 이 쾌거를 자랑질했다. ‘노다메 만세. 치아키 센빠이 만세!’라고.

내 트윗에 폭발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그런데 열성적인 노다메팬들이 치아키는 말러 1번을 지휘한 적이 없다고 알려왔다. 나는 드라마를 끝까지 보지 못해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치아키는 말러 1번을 지휘한 적이 없다는데?”

? 그런가? 그래도 이 음악 노다메에 분명히 나왔어. 내가 들었다고(나중에 확인한 거지만, 말러 1번은 드라마 5회분에서 지휘자 슈트레제만이 등장할 때 배경음악으로 깔렸다. 분명히 이 음악이 나오는 걸 들었다는 딸의 말이 맞긴 맞았다).”

이후에도 트위터에서 말러 음악 자체가 노다메에 많이 안 나왔다는 내용의 멘션들이 이어지자, 딸은 이렇게 논란을 정리했다.

내가 말러인 걸 안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게 그렇게 중요해? 어쨌든, 치아키 센빠이는 멋있어.그게 결론이야.”

그래 맞다. 치아키 센빠이는 멋있다. 지난 몇 년 동안 가요만 끼고 살면서 클래식음악이라면 코웃음을 치던 아이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나는 딸의 입에서 말러라는 작곡가 이름이 나온 것 자체로도 놀라웠다. 딸은 요즘 바흐의 하프시코드 협주곡도,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도 알아듣는다. ‘노다메에 나왔던 곡이라며. 클래식음악을 소재로 한 드라마 하나가 얼마나 큰 위력을 가질 수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됐다.

얼마 전 국립 오페라단의오페라 사랑의 묘약을 딸과 함께 보러 갔다. 평소에는 공연 한 번 같이 보러 가려면, 공연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줄거리 설명에다, 같이 보러 가면 맛있는 걸 사주겠다든지 하는 당근을 제시하며 긴 설득의 과정을 거쳐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딸은 웬일로 흔쾌히 같이 오페라를 보러 가겠다고 했다.

전석매진을 기록하며 인기를 끈 이 오페라는 과연 재미있었다. '사랑의 묘약' 자체가 워낙 유쾌하면서도 서정성 넘치는 작품인 데다, 단순한 번역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요즘 유행어까지 사용한 한국어 자막은 큰 웃음을 자아냈다. 박미자, 나승서, 김주택 등 출연진도 좋았는데, 특히 약장수 둘카마라 역 사무엘 윤의 희극 연기는 압권이었다. 딸도 중간중간 키득키득 웃어가면서, 긴시간 별로 지루해 하지 않고 오페라를 재미있게 봤다.

나는 이 공연을 보면서 새삼 '오페라스타'라는, 지금은 끝난 TV 프로그램의 위력을 깨달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 첫 번째는, 우연히 내 옆자리에 앉은 음악평론가 장일범 씨를 보고 딸이 마치 연예인을 만난 양 상기된 표정을 지었을 때였다. 처음엔 딸이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몰랐는데, 장일범 씨가 '오페라스타'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것을 기억해내고는 아하, 했다. “오페라스타가 세긴 세네요. 우리 딸도 척 보고 알아보는데요?” 했더니 장일범 씨가 쿡쿡 웃었다.

두 번째는 테너 나승서 씨가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부르고 났을 때였다. 서정적인 가창에 박수가 쏟아지는데, 딸이 '엄마, ***보다 훨씬 잘해!' 하고 속삭였다. 그 때는 박수 소리가 커서 누구보다 잘한다고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런데 공연 끝나고 나오면서 아까 누구보다 잘한다고 한 거야? 할아버지보다?” 하고 물었더니 (‘남몰래 흐르는 눈물는 아버지의 애창곡이다. 술 기운이 살짝 올라 기분 좋을 때 완전 뽕짝 스타일로 자주 부르신다), 딸이 킥킥 웃으면서 하는 말

"에이, 할아버지가 아니고 김창렬보다 잘한다고!"

김창렬이 누구지? 성악가 이름인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불현듯 '오페라스타'에서 DJ DOC 김창렬씨가 이 노래를 부른 적이 있다는 걸 기억해 냈다.

", 그걸 말이라고 하냐김창렬이 아무리 잘 불렀어도 성악가가 더 잘하는 게 당연하지!"

"히히. 알았어. 알았다고. 그런데 엄마는 왜 이렇게 소리를 질러?"

그러고 보니 딸이 이 오페라에 관심을 가졌던 건 다름아닌 오페라스타덕분이었던 것이다. ‘남몰래 흐르는 눈물은 김창렬이 불러서 확실히 알게 된 것이고.  

가수들에게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게 한 오페라스타'는 일반인들에게 오페라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한 프로그램이다. 오페라가 어렵기만 한 게 아니라 즐길 만하다는 걸 알려준 프로그램이다. 우리 집에서도 한동안 이 프로그램을 열심히 봤다. 딸은 오페라스타에 나왔던 오페라 아리아들을 찾아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가수들이 부른 음원을 들었지만, 점차 집에 있는 다른 오페라음반들을 찾아보는 눈치였다.

나는 클래식 음악과 공연을 취재해 보도하는 일을 오랫동안 업으로 삼아왔다. 음악회는, 오페라는, '소수만 즐기는 어려운 취미'가 아니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라는 얘기를 기회 있을 때마다 해 왔다. 하지만 부족하고 아쉽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종종 있다. 게다가 요즘은 대중문화, 연예 뉴스 수요가 워낙 폭발적으로 늘어서 내가 담당해온 분야가 점점 설 자리를 잃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딸에게도 어릴 때부터 클래식 음악과 친숙하게 해 주려고 노력했지만, 지난 몇 달 사이 노다메 칸타빌레오페라스타가 딸에게 행사한 영향력에 비하면, 내가 한 일은 별 게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피아니스트 랑랑이 지난해 한국에 왔을 때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싶어했다고 하더니,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구나 싶다.

대중문화의 중심컨텐츠인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에서 클래식 음악이라는 소재를 이렇게 요리하니, 다른 프로그램과 차별되는 특색도, 대중의 인기도 얻는다. 딸에게 클래식 음악 세계에 눈뜨게 해 준 이 두 프로그램에 감사한다. 나는 드라마나 예능 PD가 아니라 기자지만, 방송 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앞으로 어떻게 예술 분야를 취재하고 기사를 써야 할지, 어떤 방식으로 보도해야 할지, 더 고민을 해야 할 것 같다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