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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월간 '방송기자' 2022년 1-2월호에 기고한 글이다. 편집위원 맡고 있는 후배 덕에 (혹은 탓에?) 쓰게 됐는데, '특별기고'라는 거창한 타이틀로 실려서 조금 당황했다. 특별한 글은 아니지만, 그래도 덕분에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서 좋았다.


옥스포드 영어 사전 


BTS가 빌보드 차트를 휩쓸고,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을 뒤흔들고, ‘D.P.’ ‘오징어게임’ ‘지옥’ 등 한국 드라마가 넷플릭스를 주름잡는다. 권위있는 옥스포드 영어사전은 올해 업데이트에서 ‘한류(Hallyu)’를 필두로 대박, 애교, 먹방, 한복, 만화 등등, 한국어 단어를 대거 추가했다. 한국을 나타내는 접두사 ‘K-’도 포함되었다. 옥스포드 사전이 이 소식을 전하며 올린 글 제목이 말 그대로 대박이다.

“Daebak! The OED gets a K-update(대박! 옥스포드 사전이 K-업데이트를 했어요)”

갑자기 한류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관련 기사가 쏟아진다. ‘높은 문화의 힘’을 원했던 백범 김구 선생의 소망이 이제 실현됐다고들 한다. 다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묻는다. 확실한 건 한류는 ‘벼락같이’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나에게도 오래 전부터 넘실대는 ‘한류’를 체감한 순간들이 꽤 있었다.

2008년, 영국
한국 영화를 보는 영국 학생들의 모임을 알게 되었다. 김지운, 류승완, 봉준호, 박찬욱 같은 한국 감독과 작품들을 줄줄 꿰고 있었다. 가수 ‘Rain(비)’의 열성 팬인 일본 유학생도 만났다.

2010년, 미국
국제 컨퍼런스에서 만난 남아공 출신 학자가 ‘My Sassy Girl’이라는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고 했다. ‘My Sassy Girl’이 뭐지? 알고 보니 한국영화 ‘엽기적인 그녀’였다.

2015년, 중국
한국 드라마를 나보다 더 많이 본 중국 학생들이 수두룩하다. ‘방탄소년단’이라는 한국 그룹이 있다는 걸 중국에 와 있는 태국 유학생한테 처음 들었다.

2020년 초, 한국
딸이 다니는 학교에 덴마크 출신 교환학생이 왔다. BTS 팬이고 한국 드라마를 많이 봐서 서울에 오고 싶었단다. 좋아하는 배우는? 박서준. 서울에서 제일 좋았던 곳은? 홍대 앞. 왜? 북적북적 하니까(Crowded)! 역시, 다이나믹 코리아!

2020년 여름, 한국
뮤지션 기자회견장에서 안내를 맡은 대학생 인턴.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온 프랑스인이다. 왜 왔냐고?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배우고 싶어서.

한류 연구자로 손꼽히는 홍석경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한류의 변천을 미디어 기준으로 3단계로 나눠 설명한다. 동아시아에서 드라마와 대중음악중심으로 일어난 초창기 한류는 방송사라는 중재자가 있었던 1단계에 해당한다. 2단계는 인터넷 망이 갖춰지고 국경 없이 콘텐츠가 전파될 수 있는 환경 속에 전세계에 자발적인 팬들이 생겨나는 단계다. 그리고 BTS와 글로벌 OTT라는 강력한 ‘모터’에 힘입어 한류가 글로벌 대중문화로 편입되는 3단계. 현재 한류는 2단계와 3단계가 함께 진행 중이다. 내가 겪은 장면들을 꿰어보니 얼추 맞아떨어진다. 이제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가 볼 만한 한국 드라마를 소개하고, ‘가디언The Guardian’이 한국에서 열린 BTS 비대면 공연을 리뷰한다. 넘실댔던 한류의 물결이 어느새 전세계에 몰아치는 파도가 되었다.

왜 한국산 콘텐츠가 해외에서 사랑받는가. 한류가 아시아 중심 현상이었을 때는 ‘문화적 동질성’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침이슬’로 유명한 김민기가 자신이 연출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2000년대 초반 중국에서 공연될 때 했던 인터뷰가 기억난다. 한국이 아시아 국가들이 공유하는 동질성도 갖고 있으면서, 서구 문화를 고유의 방식으로 소화하고 발전시킨 훌륭한 롤 모델이 되고 있다는 취지였다.

그렇다면 한류가 전세계적인 현상이 된 것은 어떻게 봐야 하나? 지금은 ‘세계화’의 시대다. 자본주의 모순, 계급 갈등, 빈부 격차, 세대 격차 등의 사회 문제는 많은 나라들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문제가 되었다. 한국의 이야기가 바깥에서도 통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홍석경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선진국이라는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이 ‘기생충’이나 ‘오징어게임’의 대담함, 보편성, 이런 것들 에 굉장히 놀랐죠. 이들은 ‘오징어게임’에서 처절하게 비판하고 있는 빈부 격차, 계급사회 문제를 우리보다 훨씬 먼저 겪었잖아요.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어느 정도 무뎌질 수밖에 없었고, 더 비판한다 해도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 문제를 안고 살고, 그러니까 이 시스템의 ‘바깥’을 상상할 수 없는 단계라고 할까요.

그런데 한국은 굉장히 빨리 발전해서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면서, 이런 문제들을 지금 막 피가 철철 나는 상처로 느끼고 있고, 이걸 표현할 수 있는 능력도 있는 거죠. 그만큼 우리 문화산업이 발전한 겁니다. 사실 ‘기생충’이나 ‘오징어게임’이 보여주는 한국의 현실은 아름답지 않죠. 하지만 스스로를 이렇게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역량이 진정한 문화적 역량이고, 이 때문에 이 작품들이 인정받는 겁니다.”

선진국이 아닌 경우에도 한국은 동일시할 수 있는 텍스트를 많이 갖고 있는 나라다. 한국은 많은 후진국들과 비슷하게 과거 식민 지배를 받기도 했고, 전쟁도, 극도의 빈곤도, 독재도 경험했다. 이런 경험이 일상에 녹아 들고 문화에도 반영된다. 그러니까 현재 한류의 성공은 한국이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다 통하는 보편적인 ‘스피커’가 될 수 있는 경험을 가졌고, 이를 표현해낼 실력도 갖췄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실력’은 어떻게 쌓은 것일까. 민주화와 함께 쟁취한 표현의 자유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검열 폐지와 표현의 자유 덕분에 그동안 억눌려왔 던 문화적 갈증이 1990년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교육 수준 높고 까다로운 한국 소비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시도와 치열한 경쟁이 펼쳐졌고, 문화 콘텐츠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졌다. IT발전에 힘입어 2000년대 이후 본격화된 디지털화, 세계화 흐름에도 성공적으로 올라탔다.


요즘 해외 언론들은 한국정부의 지원으로 한류가 성공했다는 분석 기사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수출주도형 경제로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이 문화도 수출하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하고 지원한 덕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문화산업 지원하는 나라가 어디 한국 뿐인가? 지원해서 되는 거라면 다른 나라는 왜 안되는가? 해외 유명 매체들까지 ‘오답’을 반복하고 있는 건 유감이다.


한류는 ‘수용 현상’이다. 전세계인들이 즐길 만한 이유가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럼 이런 성공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한류는 소수의 천재나 스타가 홀로 이뤄낸 게 아니라 수많은 문화산업 종사자들의 피 땀 눈물이 서린 성과이고, 문화를 즐기는 팬들과 함께 가꿔온 결실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한류의 성공에 가려졌지만, 정작 우리 문화산업은 코로나19로 그 어느 때보다 큰 타격을 받았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소수에게만 관심을 기울일 게 아니라, 문화계 전반의 인프라와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류의 성공이 지나친 ‘국뽕’으로 흐르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요즘 유튜브에는 한국과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과시하는 채널이 많은데, 타국과 타문화에 대한 멸시, 인종주의가 종종 어른거린다. 자신감은 좋지만 우월감은 곤란하다. 한류 경쟁력의 바탕이 된 ‘자신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이 지점에서도 견지해야 한다. 이게 진정 김구 선생이 소망했던 문화 강국,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를 만드는 길이다. ‘우리 자신 뿐 아니라 남들도 행복하게 하는’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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