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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문화계에서는 화이트리스트가 문제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문화기관장, 예술단체장 인사를 보면 정말 한숨이 나온다. SBS 취재파일로 썼던 글이다.  

LG아트센터(마곡) 


강남에서 마곡으로 이전을 앞두고 있는 LG아트센터는 공연 애호가들이 사랑하는 공연장입니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초연 공연장으로 한국 뮤지컬 산업화에 기여했고, 공연 시장을 선도하는 해외 화제작들을 한국에 소개했고, 이자람의 억척가, 연극 코러스 오이디푸스 등 자체 제작 공연들은 해외에서도 호평 받았습니다. 

마곡 이전으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 LG아트센터의 새 대표로 LG아트센터 평사원으로 입사해 지금까지 일해온 이현정 씨가 발탁됐습니다. 이현정 씨는 1996년 평사원으로 입사해 LG아트센터 개관을 준비했고, 개관 이후 공연기획팀장, 공연사업국장을 거치며 '믿고 보는 공연장' LG아트센터의 역사를 만들어왔습니다.

지난해 11월 이현정 씨의 LG아트센터 대표 승진 인사가 포함된 LG그룹 임원 인사가 발표됐을 때 공연계에서는 모두 '정말 잘 된 인사'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얘기 끝엔 '역시 민간 기업이라 이런 인사가 가능하구나'라는 말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공공 문화기관에서 선거 캠프 출신, 유력 인사 측근, 전직 관료 등등 '낙하산 인사'를 너무 많이 봐왔으니까요.

문화체육관광부가 최근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신임 대표로 오케스트라 업무와는 상관없는 성악가 최정숙 씨를 임명했습니다. 문체부가 밝힌 최 대표의 경력은 숙명여대 성악과, 이탈리아 파르마 국립음악원, 프랑스 에콜 노르말 음악원을 거친 메조 소프라노로 국내외 무대에서 공연했고, 2010년에서 2012년까지 숙명여대 성악과 겸임교수를 지냈고, 현재 지역문화진흥원 이사로 재직 중이라는 것입니다. (최 대표가 역시 문체부 산하기관인 지역문화진흥원 이사로 선임된 건 불과 두 달 전입니다.)

최 대표는 음악가이긴 하지만 오케스트라 관련 업무, 예술 행정 경험은 없습니다. 이전 대표들과는 결이 완전히 다릅니다. 공연계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인사라는 반응입니다. 직전 박선희 대표는 금호문화재단에서 공연 기획과 영재 발굴 지원, 해외 오케스트라 초청 공연을 진행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코리안 심포니에서 첫 국제 지휘자 콩쿠르를 개최하고 다양한 사업을 펼쳐 호평 받았습니다. 그 이전 이원철 대표는 코리안 심포니 본부장 출신이며 서울시향, 성남문화재단 등에서도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신임 대표가 황희 문체부 장관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임기 말 장관의 챙겨주기 인사라는 비판이 나옵니다. 황희 장관의 블로그에는 자신의 국회의원 지역구인 서울 양천구에서 열었던 '2018년 더불어민주당 양천갑 당원과 함께 하는 송년 평화콘서트' 소식이 올라와 있는데요, 황 장관이 사회를 맡아 노래도 부른 이 공연의 마지막 순서로 최 대표가 노래했습니다.

하지만 문체부는 '다양한 경험과 전문성을 고려한 인사'라고 밝혔습니다. 보도자료에 '첫 외국인 예술감독과의 적극적 소통으로 국제적 위상 높일 것으로 기대'한다는 문장이 있었는데요, 뉴시스 보도에 따르면 '최 대표가 첫 외국인 예술감독 다비트 라일란트와 같은 학교를 나오기도 한 만큼 적극적인 소통으로 오케스트라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문체부 관계자가 밝혔다고 합니다.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황희 문체부 장관부터 임명 당시 문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정치인 장관으로 인사 논란을 빚었던 기억이 납니다. 인사청문회에서 각종 의혹이 불거지며 이 정권 들어 야당 동의 없이 임명을 강행한 29번째 장관급 인사이기도 했고요.

문체부 산하기관장으로 지난해부터 줄줄이 전직 관료가 임명되고 있는 것도 논란입니다. 국민체육진흥공단,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콘텐츠진흥원, 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저작권위원회,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수장이 모두 문체부 고위 관료 출신입니다. 관료 출신은 안된다는 법은 없지만, 이전 인사들은 대개 민간 전문가 출신이었습니다. 자기 식구 챙겨주기라는 비판이 나오는 게 당연합니다. 경제 부처에서도 퇴직 관료의 산하기관장 낙하산 인사가 종종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까.

인사 논란은 문체부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지방자치단체 산하 문화기관들은 정치 바람에 이리저리 휘둘립니다. 최근 경기아트센터 사장이었던 이우종 씨가 사장 임기를 9개월 남겨두고 사표를 냈습니다. 자신을 경기아트센터 사장으로 임명했던 이재명 대선 후보의 선거운동을 돕겠다고 했습니다. 이우종 전 사장은 2018년 지방선거 당시 이재명 경기도지사 후보 캠프의 종합 상황실장이었습니다. 문화계와는 아무런 관련 없이 선거 캠프 출신으로 경기아트센터 사장에 임명됐다가, 대선을 앞두고 본격적으로 선거운동을 돕겠다며 정치판으로 돌아간 겁니다. 안 그래도 경기도 공무원과 산하단체장이 줄줄이 그만두는 상황에서 아트센터는 별로 눈에도 띄지 않겠지만요.

다른 지방자치단체장들도 산하 문화기관들을 홍보 수단 정도로 여기는 것 같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전문성과 상관없는 낙하산 인사는 물론이고, 단체장 지역구 행사 동원, 친분 있는 문화계 인사 민원 처리에 시달리면서, 많은 직원들은 문화예술계에서 일한다는 자부심보다 자괴감을 느낀다고 토로합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누가 지방자치단체장이 되든, 공공 문화기관장 인사는 별로 바뀌지 않는다며 비관합니다.

이번 정부든 지난 정부든 문화기관장 인사는 장, 차관이나 대형 공기업 인사처럼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걸맞지 않은 인사가 이어져도, 무슨 큰 비리 문제가 아니라면 문화계 내에서만 잠깐 시끄러웠다가 곧 잠잠해집니다. 전문성과 업무 능력보다 정권과 유력 인사 친소 관계로 이뤄지는 인사가 많으니, 자리 얻기를 바라면서 선거 캠프에 참여하고 유력 인사에 줄을 대려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집니다. 점점 문화가 정치에 종속됩니다. '인사가 만사'라는데, 공공 문화 영역에서는 '정말 잘 된 인사'를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든 걸까요. 새삼 LG아트센터의 대표 승진 인사가 대단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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