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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글 보관하는 곳으로도 사용해왔는데, 몇 달 동안 방치해왔다. 큰 프로젝트가 끝나서 한숨 돌린 김에 오래 먼지 쌓인 방을 청소하는 기분으로 포스팅해본다.
7월 9일 SBS 뉴스 홈페이지에 올렸던 취재파일. 국내 언론에선 처음으로 이 사건을 다뤘던 글인데, 며칠 후 SBS 뉴욕 특파원 김종원 기자가 목격자 인터뷰와 이후 음악계 분위기까지 꼼꼼하게 취재해 보도하면서 한동안 큰 이슈가 되었다. 내가 쓴 글은 '한국인이 무시 당했다'고 분노하는 것을 넘어, 우리 안에 있는 편견도 되돌아보자는 얘기도 담으려 했는데, 얼마나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지난달 25일 뉴욕의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는 바이올린의 거장 핀커스 주커만이 지도하는 온라인 마스터클래스가 열렸습니다. 핀커스 주커만은 이스라엘 출신의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이죠. 한국의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에게는 1967년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정경화와 공동 우승했던 연주자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마스터클래스는 줄리아드가 주최한 '버추얼 바이올린 심포지엄'의 주요 행사였는데,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핀커스 주커만이 한 말이 이 자리에 참석한 100여 명의 학생들을 화나게 한 겁니다. 그 말은 바로 '한국인과 일본인 연주자들은 노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참석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핀커스 주커만은 이 날 듀엣으로 연주한 아시안 학생 두 명에게 '좀 더 시적으로 연주하라'고 하면서 '한국인들은 노래하지 않는다'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학생 중 한 명이 '우리는 한국인이 아닌데요' 하자, 주커만은 '그럼 어디서 왔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이 학생이 '절반은 일본계'라고 하자, 주커만은 이번엔 '일본 사람들도 노래하지 않는다'고 응수했습니다. (악기 연주에서 '노래한다'는 것은 음표 하나하나를 정확히 소리 내는 데 그치지 않고, 곡 속의 선율을 유려하게, 음악적으로 잘 표현해 낸다는 뜻일 겁니다.) 핀커스 주커만은 이후에도 '한국인은 노래하지 않는다. DNA에 그게 없다'는 얘기를 했다고 하죠.
핀커스 주커만이 학생들의 연주에서 부족한 점이 있다면 이를 지적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대뜸 '한국인과 일본인은 노래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건 전혀 다른 얘깁니다. 이는 특정 인종에 대한 고정관념이며 선입견입니다. 이런 고정관념이 자리 잡으면 아시안은 연주 자체로 평가받기 어렵게 됩니다.
핀커스 주커만의 인종주의적 발언이 참석자들의 증언으로 알려지면서 몇몇 음악 전문매체들이 기사를 썼습니다. 줄리아드는 27일 마스터클래스 영상을 처음 계획과는 달리 공개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또 '핀커스 주커만은 (줄리아드 소속이 아니라) 초청 강사였고, 그의 둔감하고 모욕적인 문화적 고정관념(insensitive and offensive cultural stereotypes)은 학교가 추구하는 가치와 관련이 없다'며, 참석자들에게 사과한다고 밝혔습니다.
핀커스 주커만 본인도 지난달 28일 사과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마스터클래스에서 '놀라운 재능이 있는 젊은 음악가 두 명'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문화적으로 둔감한(culturally insensitive)' 단어를 사용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연주했던 학생들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해 사과하겠다며, 자신의 말 때문에 불편했을 사람들에게도 사과한다고 밝혔습니다. 또 이번 일로 중요한 교훈을 얻었고, 앞으로는 더 잘하겠다고도 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이 사건을 보도한 기사에서 많은 아시안 연주자들과 아시아계 미국인 연주자들은 '노래하지 않는다(do not sing)', '지나치게 기교적이고 감정이 없다(too technical and unemotional)'는 고정관념으로 고통받아왔다고 썼습니다. 즉 기계처럼 정확하게 연주하지만 예술성은 없다는 편견이죠. 이 신문은 또 최근 미국 사회에서 '아시안 혐오'가 커지면서 아시안 음악가들의 우려도 더욱 커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핀커스 주커만이 한국에 왔을 때 나왔던 기사들을 찾아봤습니다. 2016년 내한 때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하고 '한국 학생들, 주머니에 넣어가고 싶다'며 극찬했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또 한국인 영재 바이올리니스트 고소현 양을 지극히 아끼는 스승이기도 합니다. 한국인 음악가들의 실력을 아낌없이 칭찬하던 그가, 대뜸 '한국인은 노래하지 않는다'고 폄하했다니 어이가 없습니다. 음악 매체의 기사에 달린 수많은 댓글들을 보니, 이전에도 그는 문제가 될 만한 발언을 많이 한 것 같더라고요. 그가 정말 이번 일로 교훈을 얻었기를 바랍니다.
이 사건은 음악계 내부의 일이라 그런지 국내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조금 시일이 지났지만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핀커스 주커만이 망언을 했네, 하고 분개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 보고 싶어서입니다.
예를 들어 주커만이 한국인 얘기는 안 하고 '일본인은 노래하지 않는다'고만 했다면, 비록 한국인을 폄하한 건 아니지만 역시 인종에 대한 고정관념이 작용한 발언이니 문제가 있다고 느꼈을까요? 만약 한국에서 K팝 마스터클래스가 열렸는데, 한국인 유명 가수가 일본 학생을 지도하다가 '일본인은 노래를 못 한다'고 말했다면? 우리 한국인들은 특정 인종이나 지역, 출신에 결부된 고정관념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요? 혹시나 우리도 '문화적으로 둔감한' 언어를 모르는 사이에 쓰고 있지는 않을까요? 저부터 곰곰이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2021.7.9.SBS뉴스 취재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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