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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조용필 평양 콘서트 취재기를 오랜만에 꺼내봤다. 남북관계에 다시 훈풍이 부는 요즘, 그 때 생각이 많이 난다. <관훈저널>에 실렸던 글이다. 


‘우리와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네

2005
8 18. 인천공항을 출발한 지 1시간도 안 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조용필 평양콘서트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푸른하늘 아래, 공항 청사에는‘평양’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김일성 주석의 커다란 초상화도 보였다. 북녘 땅은 생전 처음 밟는 것이었다. 흥분할 법도 하건만 나는 담담했다.

5
년 전, 나는 담담하지 못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이산가족이 상봉했고, 남북 문화교류의 봇물이 터졌다. 평양 학생 소년예술단과 평양 교예단이 처음으로 서울을 찾아왔다. 남측 KBS 교향악단과 북측 조선국립교향악단의 합동공연도 열렸다. 현장에서 취재하는것 자체가 감격이었다. 북한의 음악을‘새롭게 발견’했고, 북측 예술가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도 있었다. 이제부터는 뭔가 바뀔 것 같았다.

그후 뭐가 바뀌었던가. 감격은 급격히 식었다. 쭉 그래왔던 것처럼 남북관계는‘긴장’과 ‘대화’의 두 봉우리를 사이에 두고 오르락내리락 시소를 탔다. 여전히 남은 남이고, 북은 북이었다. 변한 건 없었다. 남북 문화교류가 계속되긴 했지만, 열기는 식었다. 나는 평양 땅을 밟으며, 이번에는 너무 기대하지 말자고, 너무 감격하지도 말자고 다짐했다.

공연은 23일이니, 며칠 빨리 도착한 셈이었다. 조용필콘서트의 준비상황 외에도 평양시민들의 생활을 취재할 계획이었다. 이밖에도 조선국립 교향악단과 윤이상연구소, 백두산 관광도로 건설현장, 용천 복구 모습 등을 취재하고 싶다고, 평양 도착 전부터 북측에 통보해 놓은 터였다. 평양출장 경험이 있는 동료들은 취재계획을 듣고 웃었다. 조용필 콘서트만 취재하는 것도 힘들걸. 그리고 공항에서 우리를 맞은 북측 안내원들도 똑같은 얘기를 했다. “이렇게 오셨는데, 푹 쉬고 공연이나 보고 가시디요.

이번 취재팀에는 나처럼 평양 초행인 사람이 많았다. 취재 의욕이 넘쳤다. 그리고 우리 팀을 맡은 북측 안내원 중에도 남측 언론을 처음 상대해 보는 사람이 많았다. 원칙 내세우며 고지식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날마다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뉴스 제작과 취재에 대한 개념이 우리와 달랐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북측이 정해놓은 일정 외에는 안 된다고 했다. 미리 통보했던 취재계획서를 내밀며 협조해 주기로 하지 않았냐고 따지자,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김일성 주석 생가인 만경대와 주체사상탑, 3대헌장 기념탑, 동명왕릉, 김정숙 탁아소 등등, 일단은 북측이 정한 일정대로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촬영은 가능했지만, ‘풍경 스케치’뿐이었다. 사람들을 찍거나 인터뷰를 시도하면 즉각 안내원이 나타났다. 날마다 싸웠다때로는 유화책도 시도했다. 마침 출장기간과 겹친 내 생일을‘핑계’로 함께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하지만 헛일이었다. 화가 나고 답답했다. 이렇게 며칠을 보내고, 우리 취재팀은 이런‘결론’에 도달했다. “황석영 선생이 북녘을 다녀와서‘사람이 살고 있었네’라고 했는데, 중요한 말을 빠뜨린 것 같아,‘ 우리와 다른’이라는 말을. 

지겨운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우리는 북측이 정한 참관일정을 모두 거부하고 강력히 항의했다. 북측 고위층에게 항의가 전달됐는지, 우리의 요구 일부가 받아들여졌다. 대동강 뱃놀이 등 평양시민들이 여가 보내는 모습을 취재하도록 협조해 주겠다고 했다. 길고 긴 투쟁과 토론 끝에 북측도 우리 취재 스타일을 조금은 이해하게 됐고, 우리도 그들의 ‘업무’를 어느 정도는 파악하게 됐다.

이번 취재에는 인원이 제한돼 있어 오디오와 조명 담당자가 동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무거운 카메라 삼각대와 조명장비들을 들고 다녀야 했다. 처음에는 두고만 보던 안내원들이 며칠이 지나자 자청해서 들어주기 시작했다.“ 우리도 SBS 보도일꾼이디” 하면서.

 

‘친구여’부터  ‘홀로아리랑’까지

조용필 씨를 비롯한 공연단 본진이 도착한 것은 공연 전날인 22일이었다. 우리 취재팀은 본진 도착을 취재하기 위해 평양 순안공항으로 나갔다. 본진보다 며칠 먼저 도착했을 뿐인데, 어느새 그 동안 ‘현지’에 적응한 나는 스스럼없이 북측 말투를 따라 하고 있었다. “열렬히 환영합네다!” 조용필 씨의 평양도착 일성은“참 가깝네요”였다. 그랬다. 평양의 물리적 거리는, 심리적 거리보다 훨씬 더 가까웠다


조용필 씨는 숙소인 고려호텔에는 짐만 풀어놓고 공연장인 평양 유경정주영체육관으로 직행했다. 먼저 도착한 무대기술팀들이 무대는 다 설치해 놓은 뒤였다. 조용필 씨는 일일이 무대를 점검하고 공연 리허설에 몰두했다. 이날부터 우리 취재팀도 뉴스 생방송을 시작했다. 평양에서 하는 생방송. 방송사상 처음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처음이었다. 뉴스가 끝난 뒤에도 리허설은 계속됐다. 노래도 노래거니와 무대가 굉장했다. 기술팀은 150톤에 이르는 무대장치를 옮겨 오느라 무척 애를 먹었단다. 조용필 콘서트는 평소에도 노래뿐 아니라 첨단 영상효과로 볼거리가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궁금했다. 평양시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23
. 공연 당일. 공연 시작은 저녁 6시였다. 오후 5시쯤부터 고운 한복과 정장을 차려 입은 평양시민들이 긴 줄을 이뤄 공연장에 입장하기 시작했다. 공연장 앞에는 이들이 타고 온 버스들이 늘어섰다. 이 자체가 장관이었다. 하지만 한가하게 구경할 시간이 없었다. 6시부터 8시까지 공연을 녹화해서 서울로 송출하고, 8시면 뉴스 시작이다. 시간이 촉박했다.

공연이 시작됐다. 객석이 꽉 찼다. 7000여 명의 평양시민들이 무대를 주시한다. 조용필 씨는 약간 긴장한 것 같았다. 객석도 마찬가지였다. 첫 곡인〈태양의 눈〉부터 시작해 세 번째 곡인〈못 찾겠다 꾀꼬리〉까지 빠르고 음량이 큰 곡들이 이어졌지만, 객석의 분위기는 엄숙하다 못해 경건했다. 남측 표현대로라면 ‘썰렁한 분위기’였다. 나는 객석 중간에 앉아 열심히 박수 치고, 목청껏 노래를 따라 부르며 분위기를 띄워보려 애썼다. 관객들이 나를 이상하다는 듯 흘깃흘깃 쳐다봤다.

조용필 씨의 열창도, 화려한 무대 연출도 감탄스러운 것이었지만, 관객들은 쉽사리 긴장을 풀려 하지 않았다. 살얼음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조용필 씨가〈친구여〉를 부르면서부터였다. 조용필 씨 자신도 공연이 끝난 뒤, 이즈음부터 관객들의 표정이 풀리기 시작했다고 돌이켰다. 관객들은 공연장 무대 오른편 스크린에 떠오르는 가사 자막을 보면서 노래를 음미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모자랐다. 이젠 뭔가 터져 나와야 했다.

조용필 씨가 북측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북측의 인기가수 전혜영이 부른〈자장가〉, 그리고 김광숙이 부른〈험난한 풍파 넘어 다시 만나네〉꼼짝 않고 고개만 무대에서 자막 스크린으로, 또 스크린에서 무대로 돌리던 관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뼉 치며 박자를 맞추고, 따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 이제 됐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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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대 이전 옛 노래인〈봉선화〉와〈황성옛터〉에 이르자 관객들의 표정은 점점 아련해졌다. 혼을 다하는 노래가 가슴 깊은 곳에 사무쳐 왔다. 우리 민족의 아픔과 한을 담은 이 노래들에 어디 남과 북이 따로 있으랴. 나는 이즈음부터는 무대가 아니라 관객석을 더 자주 바라봤다. 조용필씨의 노래에 눈시울을 붉히는 북녘 동포들의 표정을 자꾸자꾸 보고 싶었다.

마지막 노래인〈꿈의 아리랑〉. 커다란 한반도기가 무대에 내려졌다. 수만 개의 종이꽃잎이 흩뿌리는 가운데, 조용필 씨는 관객들과 함께‘아리랑’을 합창했다. 〈꿈의 아리랑〉의 가사대로, ‘아리랑’은 더 이상 눈물이 아니라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생애 가장 의미 깊은 공연을 하게 해주신 평양 시민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조용필 씨는 노래를 끝내고 감격에 찬 목소리로 천천히 인사했다. 평양시민들은 비록 서로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 역력하긴 했지만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주 이례적인 기립박수다. 재창, 앙코르를 요청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조용필 씨가 준비한 앙코르 곡은〈홀로 아리랑〉이었다. 공연 직전까지 열린 리허설에서, 조용필 씨는 이 곡을 집중적으로 연습했었다. 미리 준비했던 곡이 아니라, 북측이 공연 당일 특별히 요청한 노래였기 때문이다. 조용필 씨는 이 노래를 처음 불러보는 데다, 북측이 급하게 구해온 악보가 남측 악보와 표기가 달라 무척 애를 먹었다고 했다그렇지만〈홀로 아리랑〉은 이날의 하이라이트였다. 북측에서도〈독도아리랑〉으로 잘 알려져 있다는 노래다.

관객들은 손뼉을 치며〈홀로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무대 중앙 스크린에는 중계카메라가 잡은 관객들의 생생한 표정이 비쳤다. 객석과 무대는 하나였다. 나도 목청껏〈홀로아리랑〉을 따라 부르면서 가슴이 울컥 해왔다. 담담하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노래는 잘하지만 좋은 음악은 아니디요”

공연이 끝나자마자 평양시민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공연이 끝나면 로비에 삼삼오오 모여서 그날 공연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우는 남측 공연장의 풍경에 익숙했던 나에게는 무척 섭섭한 일이었다. 누구든 붙들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안내원의‘취재 협조’를 받아 시도했던 인터뷰에서는 “통일의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 정도의 지극히 의례적인 내용밖에 듣지 못했다.

공연 다음날, 나는 북측의 안내로 묘향산을 둘러봤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묘향산 자락의 ‘국제친선전람관’을 참관했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이 해외에서 받은 선물들을 전시해 놨다는 곳. 그들은 이 시설에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했다. 계속해서 단체관람객들이 입장하고 있었다.  모든 전시품에는 예외 없이 ‘어느 나라 누구누구가 김정일 장군님께 올린 선물’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안내원의 자랑스러운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 다만 전망대 앞에 펼쳐지는 묘향산의 수려한 절경, 그리고 잠시 들렀던 유서 깊은 사찰 보현사의 고즈넉함에 마음을 뒀다.

이날 취재팀은 평양에서의 마지막 8시뉴스를 끝냈다. 이제 중계차도, 방송장비도 모두 철수다. 우리는‘여기는 평양’이라고 쓰인 뉴스 세트를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했다. 누군가 서울로 가져가 봤자 쓸 수도 없으니 버리고 가자고 했다. 그런데 중계감독이 세트를 맡기고 가자고 한다. 언제 여기 다시 와서 방송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누가 맡아줄까요?”했더니“그 동안 여기 사람들하고 친해졌거든”한다. 중계감독과 함께 체육관 방송실 한구석에 세트를 세워놓고 나왔다. 체육관 직원들에게“우리 꼭 다시 올 거니까 잘 맡아주세요”하면서. 순하게 생긴 직원은 씩 웃으며 그러겠다고 했다.

평양에서의 마지막 밤. 취재팀은 북측 안내원들과 함께 뒤풀이를 했다. 술이 몇 잔 돌자 어느새 우리는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숙해졌다. 남측에 내려오면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여럿이 어깨동무를 하고〈다시 만납시다〉를 불렀다. 나는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했다는 안내원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음악 전공까지 하셨다니 진지하게 물어보는 건데, 조용필 씨 공연 어땠어요?

그의 대답은 ‘장군님께서 내리신 좋은 음악의 정의에 맞지 않기 때문에’조용필 씨가 노래를 잘하긴 하지만, 그의 음악은 좋은 음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좋은 음악’이란 인민들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고 함께 즐기는 음악이라는 것이다. 조용필 씨의 노래에 짙게 드러나는 록음악의 특징도, 사랑과 이별, 고독, 삶의 무상함 같은 이야기를 담은 가사도, 그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을까. 조용필 씨의 평양공연이 몇 차례 난항을 겪으면서도 성사된 것은, 김정일 위원장이 개인적인 관심을 표명한 뒤였다는 사실을. 〈그 겨울의 찻집〉이나〈모나리자〉〈허공〉〈돌아와요 부산항에〉같은 노래들은 북측의 ‘특별한’ 요청으로 프로그램에 포함됐다는 사실을.
 

그 날이 오면 다시 평양출장 자원을…

25
, 평양출장을 끝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인천공항에 도착해 조용필 씨 팬클럽 회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조용필 씨를‘오빠’라고 부르던 30, 40대 주부 회원들은 취재팀에게도‘수고하셨다’며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북측에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남측의‘오빠 부대’, 그 열광과 환호를 보면서 나는 서울에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다시 시작된 서울에서의 일상. 우리 취재팀은 안내원과 싸워가며 찍어온 화면들로, 출장이 끝나서도 며칠 북한관련 리포트를 했다. 북측 사정에 밝은 한 소식통을 통해, 조용필 평양콘서트를 앞두고 평양시민들 사이에 암표까지 돌았다는 후일담이 전해졌다. 이번 콘서트가 평양시민들에게는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다는 얘기도 들렸다.

조용필 씨는 평양에 이어 서울공연도 성공적으로 열었다. 제주에서 평양까지, 그의 한반도 투어를 완성한 것이다. 금강산에서는 그 동안 두 차례나 이산가족들이 눈물 어린 상봉을 했다. 가장 최근의 상봉에서는 기사 때문에 마찰이 빚어지기도 했다. 납북어부출신 이산가족을 취재한 SBS 기사에서 ‘납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북측은 위성송출과 취재활동을 막았다. 통일부 기자단이 북측에 책임자 문책을 요구하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나는 이 소식을 전하는 뉴스를 보며‘이럴 줄 알았어’했다.

남과 북은 너무 다르다. 여전히 변한 건 없다. 6자회담이 진전을 이뤄내도, 남북이산가족이 이렇게 만나도, 조용필 평양콘서트가 아무리 성공적으로 이뤄져도 남북관계에 당장 변화가 오진 않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용필 씨의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던 평양시민들의 표정을,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에 눈물짓던 그들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쉽지는 않았지만, 평양 관객들은 결국 조용필 씨의 노래에 마음을 연 것이다. 나는 짧은 순간이나마 남과 북이 하나 된 순간을 목격한 것이다.

내가 본 그들은 우리와 달랐지만, 또 같았다. 조용필 씨는 “음악은 정서요, 마음으로 통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낯섦과 생경함, 답답함으로 점철됐던 나의 첫 평양출장은 ‘마음이 통하는’ 짧은 순간들로 보상 받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순간들은 아마 모르는 사이 차곡차곡 조용히 쌓이며 훗날을 예비하고 있으리라.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더라도.

문득 평양의 체육관 방송실에 세워놓고 온 뉴스 세트가 떠오른다. 그 세트가 먼지 쌓인 채 버려져서는 안 될 것 같다. SBS 취재팀이 평양에 가서 그 세트를 다시 사용하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또 와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때 나는 또다시 평양출장을 자원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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