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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역 대합실에서 작가 네 명이 흩어져 자리를 잡고, 오가는 사람들에 대한 허구적 이야기를 즉석에서 써서 네 개의 스크린에 띄운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되기도 하고, 이야기를 읽는 독자 혹은 관객이 될 수도 있다. 아르헨티나 연출가 마리아노 펜소티의 가끔은 널 볼 수 있는 것 같아라는 작품이다. 다원예술축제 페스티벌 봄2012년도 참가작이었다.

현실이 이야기가 되고 역 공간이 무대가 된다는 발상이 재미있었고, 일상에서 예술을 만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취재했다. 취재 과정에서 나와 카메라 기자도 이야기 속 등장인물이 되었다.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그런데 막상 기사를 쓰려 하니 난감했다. 주말 공연 소개 코너에 넣을 기사였는데 나에게 할당된 시간은 단 25초였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쓴 기사는 이랬다.

용산역 구내, 평범한 시민들이 작가가 쓰는 글의 주인공이 됩니다. 소설가 김연수 씨를 비롯해 작가 4명이 역 구내 풍경과 사람들을 소재로 즉석에서 글을 써 내려가고, 이 글은 바로 스크린에 나타납니다. 작가가 관찰한 걸 바로 글로 풀어내고, 주인공이 된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반응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를 지켜보는 과정 자체가 독특한 퍼포먼스를 완성합니다.”

기사가 나가는 걸 본 사람들 몇몇이 질문을 해왔다. ‘저것도 공연이야? 무슨 공연이라고 해?’ 눈치 챘을지 모르지만, 나는 작품’ ‘참가작’ ‘퍼포먼스라고만 했지, 명확하게 공연이라고 지칭하지는 않았다. 이 작품을 공연이라 할 수는 있겠지만, 연극이니 뮤지컬이니 하는 통상적인 공연 장르로 정의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실 퍼포먼스는 미술계에서 많이 쓰는 용어이기도 하다.

얼마 전 개막한 미술계 최대 규모의 국제 행사인 베니스 비엔날레에 다녀왔다. 나는 베니스 비엔날레가 처음이었고 미술 쪽은 취재 경험도 별로 없었지만, 낯설지 않았다.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의 상징적 장면으로 국내외 언론들이 여러 차례 보도한 자본론퍼포먼스만 봐도 그렇다. 국가관들이 설치된 자르디니 공원 이탈리아관에서 하루에 네 번, 두 명의 연극 배우가 무대에 나와 처음부터 끝까지 칼 마르크스의 역작 자본론을 낭독한다. 공연이라 해도 무방할 듯했다.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이숙경은 현대미술에서 퍼포먼스가 다시 주목 받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한국 작가들의 비엔날레 참가작들도 마찬가지다. 김아영은 중동에 근로자로 파견됐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석유와 이를 둘러싼 국제외교를 다룬 작품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 기름을 드립니다, 3’라는 작품을 내놨다. 컴퓨터 알고리즘을 이용한 음악과 텍스트로 구성한 설치 작품이다. 지휘자와 합창단이 참여한 퍼포먼스도 진행됐는데, 작가가 직접 쓴 대본에 따른 것이어서 줄거리 있는 음악극처럼 느껴진다. (위 사진)    

남화연은 17세기 네덜란드 황금 시대의 튤립 투기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욕망의 식물학이라는 영상 작품을 출품했다. 튤립이 만발한 꽃밭에 경매 시장의 시끌시끌한 소음이 배경으로 깔리고, 무용수들이 꽃 사이를 분주히 날아다니는 벌의 움직임을 따라 춤을 추기도 한다. 퍼포먼스를 화면에 담은 것이다. 임흥순은 봉제공장에서 일했던 어머니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시아 여성 노동자 현실을 그려낸 95분짜리 다큐멘터리 위로공단으로 한국 작가 역대 최고상인 은사자상을 수상했다. 그는 사건 진행과 직접 관련 없는 퍼포먼스와 상징적인 장면을 삽입해 인물의 내면을 표현한다.

(그러고 보면 베니스 비엔날레는 공연뿐 아니라 영화까지도 현대미술로 껴안았다.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출품되었던 위로 공단이 상을 받으면서 베니스 영화제와 베니스 비엔날레를 합쳐야 하는 것 아니냐는 농담도 나왔다.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출품작인 전준호 문경원의 축지법과 비행술에서도 영화적인 특성을 느낄 수 있다. 배우 임수정이 가상의 미래에 살아남은 생존자를 연기한다-위 사진이 한국관 전경이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현대미술에는 경계가 없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었다. 나는 비엔날레 곳곳에서 공연의 냄새를 맡았다. 설치미술 작품을 보면서 종종 공연의 무대세트 같다고 느꼈고, 다양한 퍼포먼스에서 공연 연출을 연상했다. 공식 행사장뿐 아니라 베니스 곳곳에서 펼쳐지는 퍼포먼스는 참 가지가지였다. 거대한 누에고치 모양의 구조물을 매달고 그 안에 들어앉아 있기, 길바닥에 누워 괴로운 표정으로 이마에 돌을 쌓다가 무너지면 다시 쌓기, 담뱃불로 티셔츠 소매를 지져서 여러 개의 구멍 내기, 줄에 널어놓은 빨래가 펄럭이는 골목길에서 양동이 여러 개 갖다 놓고 빨래하는 시늉하기….


내가 공연 취재할 때 느꼈던, 여러 장르를 넘나들거나 명확한 장르 정의가 어려운 작품이 많아진다는 흐름은 미술계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베니스에서 여러 장르를 오가는 현대미술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문득 내가 지금 거대한 오페라를 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페라야말로 여러 장르의 예술이 만나는 종합 예술아닌가.

내가 취재했던 마리아노 펜소티의 작품은 비엔날레에서라면 현대미술로 분류될 수도 있겠다. 김아영의 작품은 대학로 소극장에서 공연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임흥순의 작품이 영화관에서 상영되면 영화고, 비엔날레에서 전시되면 미술 작품이 되는 것처럼. 뭐 그런 게 다 있냐고? 마르셀 뒤샹이 거의 100년 전에 내놓은, 현대미술의 출발점으로 불리는 이라는 작품(위 사진)은 화장실에 있었으면 그냥 소변기였을 터인데 뭘 이 정도로.  
      

그런데 글을 쓰고 보니, 내가 공연 취재를 너무 오래 했나 싶기는 하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미술계 최대 행사라는 베니스 비엔날레까지 가서도 공연 냄새를 맡고, 공연 비슷한 것들만 잔뜩 보고 온 것 같으니 말이다

*이 글을 조금 줄인 버전이 클럽 발코니 매거진 이번 호에 실렸습니다. 아래 사진은 비엔날레 전시관 근방 골목. 날마다 바뀌어 걸려 하늘 높이 휘날리는 이 빨래들이 진짜 미술 작품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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