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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출신의 사업가이자 저널리스트이자, 무엇보다 (아마추어) 지휘자였던 길버트 카플란이 지난 1월 1일 타계했다. 향년 74세. 나는 그가 2005년 성남아트센터 개관공연을 위해 한국에 왔을 때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에 관해 '이런 아마추어'라는 제목으로 썼던 글을 다시 올려본다. 말러 교향곡 2번에 푹 빠져 지휘를 배우고, 오직 이 곡만 지휘했던 괴짜! 내가 좋아하는 언론계 선배가 그를 '롤 모델'이라고 했는데,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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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 교향곡 제2번만을 연주하는 지휘자 길버트 카플란. 그는 ‘아마추어’다. 다른 음악가들이 거치는 전문교육 과정을 마치지 않았다. 하지만 말러 교향곡 제2번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는 ‘이중생활자’다. 전 세계에서 14만 부 이상 팔리는 금융전문지 『인스티튜셔널 인베스터(Institutional Investor)』의 발행인이자, 경제 칼럼니스트이자, 월스트리트에서 성공한 사업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억만장자’로 부른다.

한국 관객은 지난 2005년 성남아트센터 개관기념 공연에서 길버트 카플란의 말러 교향곡 제2번을 만날 수 있었다. 공연도 공연이었지만, 나에게는 길버트 카플란의 생각을 직접 들을 수 있었던 기자회견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전문 음악교육을 받지 않은 그가 어떻게 해서 말러 교향곡 제2번에 있어서만큼은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는 지휘자가 됐을까? 그는 말러의 음악과 처음 ‘사랑에 빠지게 된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어린 시절 3년 동안 피아노를 배웠죠. 하지만 연습을 게을리 해서 어머니가 레슨을 중단시켰어요. 그래도 음악은 꾸준히 들었어요. 스무 살쯤엔 웬만한 클래식 레퍼토리는 섭렵했죠. 하지만 그때까지 말러의 음악은 듣지 못했어요.

말러 음악을 처음 들은 것은 1965년 뉴욕 카네기홀에서였어요. 스토코프스키의 지휘로 말러 교향곡 제2번을 들었죠. 그 느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항상 음악을 들을 때마다 어떤 ‘감성’을 느끼긴 했지만, 그런 격정이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것을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말러 사랑에 빠졌다’는 카플란. 그는 ‘이 사랑은 드물게 아주 오래 가는 사랑이며, 아내까지도 허락한 사랑’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어떤 음악과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지휘자로 나서지는 않는다. 그도 처음부터 지휘할 생각을 한 건 아니다. 말러와 사랑에 빠진 뒤에도 15~16년간은 그냥 듣는 데에 만족했다. 그러다 나이 마흔 살에 지휘 공부를 시작한다.

“내가 지휘를 할 수 있게 되면 이 음악을 왜 이렇게 사랑하게 됐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직접 지휘를 하면 제가 겪은 그대로의 감흥으로 음악을 재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죠.”

지휘 공부를 시작하면서 그는 ‘감당해야 할 위험’에 대해 깊이 생각해봤다고 한다. 그가 꼽은 위험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지휘를 해서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는 것. 두 번째, 지휘를 하지 않고 평생 ‘내가 왜 그때 시도해보지 않았나‘ 후회하는 것. 그는 첫 번째 위험을 선택했다.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참을 수 있어도, 평생 후회하면서 사는 것은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81년, 그는 줄리아드 음대 졸업생에게서 지휘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5시간씩 말러 교향곡 제2번을 지휘하기 위해 공부를 했다. 음악 애호가로서 음악 지식이 있었지만, 다시 악보와 음악을 ‘읽는’ 방법을 배웠고, 지휘 테크닉을 공부했다. 이렇게 7개월을 보냈다. 그리고 그해 전 세계에서 열리는 말러 교향곡 제2번 공연을 모두 쫓아다녔다. 리허설을 빠짐없이 보고 지휘자를 만나서 얘기를 나눴다. 물론 그러면서도 회사는 계속 경영했다. 그는 이때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도 멋진 한해였다고 회상했다.

다음해인 1982년, 그는 자비를 들여 링컨센터에서 아메리칸 심포니와 말러 교향곡 제2번을 연주했다. 그야말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연 공연이었다. 

“저는 ‘아마추어’였기 때문에 오케스트라는 비평가들이 절대 공연 평을 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연주에 응했습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난 뒤 두 명의 평론가가 약속을 깨고, 공연 평을 썼습니다. ‘아주 훌륭한 연주’였다는 호평이었지요.”

그는 ‘두 평론가 덕분에 제가 오늘날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오직 말러 교향곡 제2번만으로 빈 필, 런던 심포니, 프라하 심포니, 러시아 국립 오케스트라 같은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공연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1984년에는 카플란 재단을 설립하고 말러의 음악을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말러 교향곡 제2번의 원본 악보를 구입하고, 말러의 사진과 저서, 레코딩 같은 관련 자료들을 방대하게 수집했다. 

그는 성남아트센터에서 말러 교향곡 제2번의 ‘새 판본’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말러는 교향곡 제2번의 초고를 쓰고 난 뒤에 10번 이상 직접 지휘를 하며 그때마다 곡을 조금씩 수정했는데, 마지막 수정이 출판본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번에 자신이 지휘할 판본은 기존의 판본과 비교해 500곳 이상의 변화가 있었다면서, 구체적인 예까지 들어 설명했다.

길버트 카플란은 사업가로서의 인생과 음악가로서의 인생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는 질문에는 지휘자 게오르그 솔티와 나눴던 대화를 소개하며 기자들을 웃겼다.

“게오르그 솔티를 만났을 때 저는 너무 많은 음악적 질문으로 그의 시간을 빼앗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랬더니 그의 대답은 이랬어요. ‘이렇게 월스트리트에서 온 사업가와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기쁩니다. 왜냐하면 내 음악가 동료들과 얘기할 때는 항상 돈 얘기만 하기 때문이지요.’

‘이중생활’은 매력적입니다. 제가 한번은 러시아에 가서 아침에는 고르바초프와 인터뷰를 하고, 오후에는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한 적이 있어요. 고르바초프는 제가 지휘자인 줄 몰랐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제가 고르바초프를 만나는 사업가라는 사실을 몰랐죠. 이렇게 ‘이중생활’을 즐길 수 있는 제가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말러 교향곡 제2번 외에 다른 곡을 지휘할 계획은 없는지를 물었지만, 그는 자신은 ‘아마추어’라면서, 아직은 그런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현재 제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100퍼센트 제 자신이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아마추어가 프로의 세계에서 너무 많이 활동하는 것은 안 좋다고 생각해요. 지휘자가 어느 곡을 훌륭하게 연주하면 다음에는 다른 곡을 연주해달라는 요청도 받게 마련이니까, 미래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습니다. 언젠가는 다른 곡도 지휘해 봐야지 하는 날도 올지 모르지요. 하지만 저는 ‘유혹’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그는 웃으면서, ‘딱 한 번의 예외가 있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과 할리우드볼에서 연주할 때였죠. 그 공연장에서는 항상 미국 국가를 연주하는 게 관례라고 하더군요. 저는 이전에 한 번도 국가를 연주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상당히 겁에 질렸어요. 하지만 그리 어려운 곡은 아니었어요. 나중에 어느 비평가가 신문에 그날 연주에 대한 평을 실었는데, 말러 교향곡 제2번의 2악장 템포는 낯설었다고 하면서도 국가 연주는 최고였다고 하더군요.“

그는 ‘부활’로 불리는 말러의 교향곡 제2번이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말러의 곡을 연주할 때 많은 사람들이 ‘순수한 기쁨’을 느끼게 된다면서, 이 곡이 ‘천국으로의 초대‘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명확한 한국어 발음으로 “성남아트센터 개관 콘서트에서 지휘하게 돼 영광입니다.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가 담긴 말러의 음악은 개관 축하 공연에 가장 적합한 곡입니다”라고 말해 박수를 받기도 했다. 

그의 음악 활동에 대해 ‘돈 많은 사람의 호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경제력이 없었다면 과연 그가 지휘자로 데뷔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래도 그는 대단하다. 젊은 시절 벼락처럼 찾아온 말러의 음악과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을 위해 마흔 살에 지휘 공부를 시작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돈이 많다고 해서 모두가 이런 ‘결단’을 내리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뜨거운 ‘열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부러웠다. 

그는 자신을 ‘아마추어’라고 말한다. 내한 공연에서도 그는 개런티를 받지 않고 항공료와 체재비만을 주최 측으로부터 제공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아마추어’의 첫 내한 공연은 한국의 음악 팬들 사이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멋진 아마추어’는 웬만한 프로를 능가한다. <'나도 가끔은 커튼콜을 꿈꾼다'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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