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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드라마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종종 한국 드라마의 몇 배에 달하는 회수에 놀란다. 50회, 60회가 넘어가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삼생삼세십리도화(三生三世十里桃花) 58회, 견환전(甄嬛传) 76회, 랑야방(琅琊榜) 54회, 고방부자상(孤芳不自赏) 62회 등 한국에도 수입돼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몇 편만 봐도 알 수 있다.

중국 드라마가 처음부터 이렇게 길었던 것은 아니다. 1986년 드라마인 ‘서유기(西游记)’’는 25회로 끝났고, 속편은 16회였다. 1987년 ‘홍루몽(红楼梦)은 36회로 끝났다. 중국 국가광전총국 통계를 보면 2010년부터 2014년까지 4년간 발행허가를 받은 드라마의 평균 회차는 38회를 넘지 않았다. 그런데 2015년 이후 40회를 넘어섰고, 2018년에는 42회가 되었다. 2011년도 통계와 비교하면 10회나 늘어난 수치다.

드라마 회차가 이렇게 많아지면서 ‘주수극(注水剧)’이라는 말이 등장한 지도 꽤 되었다. 주수극은 중량을 늘리기 위해 물 먹인 고기를 뜻하는 단어 ‘주수육(注水肉)’에서 나온 말이다. 억지로 길게 늘여 만든 드라마를 뜻한다. ‘드라마에 물을 주입해 늘리는’ 주수 방식은 다양하다.

먼저 과거 회상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예전에 나왔던 장면을 과거 회상으로 다시 삽입하는 것이다. 잡지‘중국신문주간’은 인기 드라마 ‘하이생소묵’을 주수의 새로운 방식을 개척한 드라마로 꼽았다. 36회로 끝나니 그리 긴 드라마는 아니지만 주수 현상은 명확하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만약 정말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이라는 여주인공의 대사 이후, 이전 회차에서 이미 봤던 내용을 재생한다. 아역 배우가 연기했던 이전 회차 장면을 잠깐 삽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학 시절을 남녀 주연배우인 종한량과 탕옌이 다시 찍어 몇 회분을 늘렸다.

슬로우 모션을 활용해 시간을 늘리기도 한다. 2019년판 ‘의천도룡기(倚天屠龙记)’는 슬로우 모션을 남발해 김용 무협극 절세고수의 무공을 하늘하늘 흐느적거리는 동작으로 표현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조역의 출연 분량을 늘리는 방식도 있는데, 이 때문에 도대체 주인공이 누구인지 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총 50회로 방영된 ‘니화아적경성시광(你和我的倾城时光)’은 후반 들어 조역인 Grace의 분량이 늘어나서 43회에는 주연인 자오리잉(赵丽颖)의 분량이 2분에 불과했다. 중국 시청자들은 드라마 제목을 ‘Grace적가희시광(Grace的加戏时光)’, 즉 ‘그레이스의 분량이 늘어난 시간’으로 바꿔야 한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향밀침침신여상(香蜜沉沉烬如霜)’은 원래 47회 분량을 63회로 늘렸다. 이 드라마는 중반부터 남자 조역 윤옥의 분량이 늘어나기 시작해, ‘윤옥전(润玉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가장 논란이 된 29회에서는 남녀 주연배우들의 출연 시간을 다 합쳐도 2분에 불과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편집으로 늘리는 것이다. 후난위성이 자주 사용하는 방식이라 한다. 방영 때마다 맨 앞에 이전 회차 결말 부분을 다시 틀어주고, 끝날 때에는 다음 회차 예고편을 보여준다. 잠깐 보여주는 정도면 무방하지만, 전편 다시보기와 다음편 예고로만 15분 이상을 소비하기도 한다. ‘지부지부응시녹비홍수(知否知否应是绿肥红瘦)’는 원래 73회였는데, 편집으로 5회 분량을 늘려 78회가 되었다. 일반적인 중국 드라마 1회분 길이는 45분 내외인데, 이 드라마의 77회는 35분이었고, 최종회인 78회는 20분에 불과했다.

드라마 길이를 늘리는 건 돈 때문이다. 원작 판권료가 높으니 30회면 끝날 내용도 40회 50회로 늘린다. 워낙 제작비가 많이 드니 회수를 늘려서 회당 제작비를 줄이는 게 이득이다. 회수가 늘어나면 광고 수입도 그만큼 늘어난다. 드라마가 재미있다고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는데 일찍 종영해 버리면 이윤 면에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 ‘물을 먹여서라도’ 드라마 회수를 자꾸 늘리는 이유다.

이런 가운데 이번달 초, 주수극이 도를 넘었다고 판단한 중국 광전총국이 규제에 나설 방침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드라마가 40회를 넘지 않도록 상한선을 두기로 하고, 업계의 의견을 청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한집령(限集令)’이다. (중국에서는 드라마 회차를 ‘집(集)’으로 표기한다.) 광전총국은 이미 지난 7월에도 주수극과 궁중암투극, 리메이크 드라마, 고액 출연료 등의 문제에 대해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다.

중국에서 드라마 회수 제한 얘기가 나온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0년 전인 2009년에도 CCTV(中国中央电视台)는 자체적으로 드라마 회수를 30회를 넘지 못하게 하는 방침을 세웠다. 하지만 이후 CCTV 드라마들은 성급 방송국들이 내놓는 드라마들과 경쟁에서 맥을 추리지 못했고, 이 방침은 없던 것이 되었다. 2013년에도 주수 현상이 심각해서 드라마 품질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며 광전총국이 드라마 회수를 30회 이내로 제한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온 적이 있다.

사실 드라마가 싫으면 안 보면 그만이지만, 재미있게 보던 드라마에 ‘물 먹인 구간’이 등장하면 1.5배속 2배속 보기, 혹은 건너뛰기로 인내하며 보는 시청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중국 인터넷여론을 보니 주수극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일률적으로 40회를 넘지 못하게 하는 한집령이 효과적인 방식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만만치 않다. 시즌제를 도입하거나 1부 2부로 나누는 등의 방책으로 한집령을 피해 갈 거라는 얘기도 벌써부터 나온다.

근본적인 문제는 주수극과 그렇지 않은 드라마를 어떻게 구분하느냐에 있다. 40회 넘어가면 주수극이고, 40회 이내에 끝나면 주수극이 아닌 것인가? 긴 드라마가 무조건 다 주수극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인기도 평가도 좋았던 드라마 ‘랑야방(琅琊榜)’이나 ‘인민적명의(人民的名义)’는 모두 50회가 넘는 긴 드라마였다.

드라마 회수를 제한하겠다는 중국 광전총국의 정책이 아직 확정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벌써부터 제작 예정 드라마들의 평균 회차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갈수록 길어지기만 하던 중국 드라마 제작 관행에 변화가 예상된다.

*네이버 중국판 차이나랩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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