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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폐쇄된 옛 블로그 글 복원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5년, 국립오페라단의 리허설 공개 때 '단체 관람'을 왔는지, '단체 소동'을 벌이러 왔는지 구별이 안 되는 학생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고, 그 때 썼던 글입니다. 졸저 '나도 가끔은 커튼콜을 꿈꾼다'에도 실었습니다.
학창 시절 단체 관람의 추억은 많은 분들이 갖고 계실 겁니다. 저도 중학교 때 단체관람으로 여러 편의 영화를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단체 관람은 대개 시험을 끝내고 가는 경우가 많아서, 즐겁고 신나는 이벤트였습니다. 그렇게 단체관람으로 봤던 영화가 ‘사관과 신사’ ‘테스’ ‘아마데우스’ 였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영화들이지요.
그래서 국립 오페라단 홍보 담당자로부터 오페라 ‘마탄의 사수’ 최종 리허설을 단체 관람 학생들을 위한 시연회로 개방한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영화는 개인적으로도 볼 기회가 많아졌으니 요즘은 공연을 단체로 보게 됐구나, 하고 시대의 변화를 ‘실감’했습니다. 단체관람으로 오페라까지 보다니, ‘문화적 혜택’을 보고 있는 요즘 학생들은 좋겠다고, 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부러워하기까지 했었습니다.
'마탄의 사수’ 시연회가 열린 지난달 21일, 공연 취재를 위해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을 들어서자, 로비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가득한 게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8개 중학교 학생 2천명이 왔다고 합니다. 떠들썩한 정도가 조금 지나친 것 같기도 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단체관람 나온 학생들이 들뜨는 것은 마찬가지다 싶어 잠시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추억에 젖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 낭만적이고 순진했습니다. 이후 저의 공연 관람은 전혀 순조롭지 않았으니까요.
공연 시작을 알리는 예비 종이 울렸습니다. 공연을 최종 점검하기 위한 스태프들과 취재를 하러 온 기자들이 좌석 몇 줄을 차지하고, 나머지 좌석은 몽땅 학생들로 가득 찼습니다. 학생들은 여기저기서 괴성을 지르고, 뛰어다니며 소란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심상치 않았습니다. 조명이 어두워졌습니다. 공연 예정 시각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장내는 여전히 소란했습니다. 휴대전화를 켜고 문자를 보내는가 하면, 부스럭거리며 과자를 먹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2층에서 아래층으로 침을 뱉으며 장난 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한 학교 선생님이 앞에 나가 마이크를 잡고 조용히 해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선생님의 당부에 한쪽에서는 ‘우~~’하는 야유가 터져 나왔습니다. 저는 기분이 점점 언짢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안내방송 후에도 장내는 여전히 난장판이었습니다. 급기야 무대 감독이 두 차례나 앞으로 나와 ‘시끄러워서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며 ‘조용히 해 달라’고, 학생들에게 ‘거의 사정하다시피’ 했습니다.
예정 시각을 30분이나 넘겨서야 겨우 오케스트라가 서곡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소란은 전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거리낌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다녔고, 여기저기서 휴대전화 불빛이 번쩍였습니다. 통로로 기어 다니며 장난 치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도무지 음악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계속 웅성거리는 소리 때문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습니다. 제 자리 근처에는 독일인 연출가 볼프람 메링이 앉아있었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이없어 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제 얼굴이 다 화끈거렸습니다.
휴식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한꺼번에 바깥으로 몰려나갔습니다. 그야말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공연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시설물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로비에 놓여있던 의자는 마구 밟고 뛰어다니는 바람에 여기저기 흠집이 났습니다. 구내 매점은 물건이 없어지고 상품 진열대가 파손되는 손해까지 입었습니다. 학생들이 질서 없이 몰려드는 바람에 유리 벽이 무너질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고 합니다. 공연장을 관리하는 하우스 매니저는 공연장 3, 4층 발코니에서 천방지축 노는 아이들이 추락할까 십 년 감수했다며 땀을 닦았습니다.
휴식시간이 끝나고 다시 공연이 시작됐지만, 사정은 변한 게 없었습니다. 여전히 장내는 아수라장이었고, 학생들은 ‘통제 불능’이었습니다. 당황한 오페라단 직원과 하우스 매니저, 그리고 선생님들은 장내 정리에 안간힘을 썼지만 아이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참다 못한 오페라단 직원들이 몇몇 아이들을 퇴장시켰습니다. 공연 도중에도 부스럭거리며 과자를 꺼내먹고 떠들던 아이들이었습니다.
“뒤에서 조금 얘기만 했을 뿐인데 나가라고 했어요.”
쫓겨나간 아이들은 늠름했습니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겨우겨우 공연이 끝난 뒤, 무대에 선 성악가들은 ‘정말 하기 싫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개막 전에 반드시 최종 리허설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공연을 끌어가긴 했지만, 너무 시끄러워서 오케스트라 반주가 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출연자는 반주가 잘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지휘자의 손짓을 곁눈질로 보고 박자를 짐작하며 겨우 따라갔다고 했습니다. 공연을 계속하는 데 ‘초인적인 인내심’이 필요했다는 것이지요. 그 소란 속에서 공연을 보는 데에도 ‘초인적인 인내심’이 필요했으니, 공연을 직접 하는 사람들이야 오죽했을까요.
저는 당초 공연 프리뷰 기사를 쓸 목적으로 현장에 갔지만, 기사 방향을 완전히 틀었습니다. 아무리 공부에 찌든 학생들이 일시적으로 해방감에 젖었다고 해도, 아직 어린 학생들이 한꺼번에 모이다 보니 군중심리가 발동했다고 해도, 이건 웃고 넘어갈 만한 정도를 한참 지나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기사는 ‘청소년 관람 질서 엉망’이라는 제목으로 전파를 탔고, 반향도 적지 않았습니다.
예술의 전당은 이를 계기로 단체관람 지침을 만들어 관련 단체에 통보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자체 기획 공연이든 대관 공연이든, 학생들의 단체 관람은 일정 인원 이상의 인솔자를 동행할 것, 안전 문제를 고려해 전체 인원도 제한할 것, 오페라 극장의 3, 4층은 학생 단체관람객에게 개방하지 않을 것, 그리고 학생들로만 구성된 단체 관람 신청은 허가하지 않을 것 등이 그 내용입니다.
오페라단 관계자들은, 이전에도 여러 번 단체관람 학생들을 경험해봤지만, 그렇게 심한 적은 없었다며 의아해 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빨리 장내 정리에 나섰다면 상황이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저는 단체관람을 그저 수업 쉬고 노는 것쯤으로 생각할 게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교육’의 장으로 끌어들여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은 단체 관람 전에 공연에 대한 정보나 관람 예절에 대한 주의사항을 학교에서 들었다고는 했지만, 대부분 형식적인 절차에 그친 것 같았습니다.
단체관람 행사를 주관한 청소년 문화운동 단체는 ‘이럴수록 아이들에게 문화체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먼저 준비를 갖춰야 합니다. ‘문화체험’을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 말입니다. 이건 학교가 아니라 가정에서부터 시작돼야 할 일입니다. 공연에 대해 관심을 갖고, 관람 예절을 지키고, 공공 장소에서 남을 배려할 줄 아는 태도를 갖도록 가르치는 일 말이지요.
저는 사실 그 날 화가 나는 것을 넘어 심한 절망감까지 느꼈습니다. '교육의 위기'를 실감했습니다.그 날 가장 소란을 피운 학생들은 이른바 서울에서 손꼽히는 ‘부촌’이라는 곳에서 온 아이들이었습니다. 귀하게 자랐지만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아이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선생님의 말에 눈 한 번 깜짝 않는 아이들.
그 날 이후 저는 제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과연 제 아이들은 제대로 자라고 있는 것인지, 저는 제 딸을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아이로 키우고 있는 것인지. 각박한 세상, 남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핑계를 대며 살다 보니, 모르는 사이 아이들에게도 ‘나만 편하면 된다’는 일그러진 이기심을 물려주고 있는 건 아닌지.
이상이 저의 ‘마탄의 사수 시연회 관람기’, 아니, ‘단체관람 관람기’입니다. 철없는 아이들이 많이 모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걸 갖고 교육의 위기니 뭐니 하면서 비약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 굳이 할 말은 없습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결국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 문제라고 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합니다. 이런 ‘관람기’는 또 다시 쓰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2005년 4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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