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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하반기 중국 드라마 중 최고 화제작이었다는 ‘경여년(庆余年)’을 뒤늦게 보고 있는 중이다. 사극인 줄 알고 보기 시작했는데, 드라마 1회 시작은 그게 아니다.

한 대학생이 현대적 관념으로 고대문학사를 분석한 논문을 썼지만 교수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학생은 포기하지 않고 논문이 아니라 소설로 자신의 관점을 증명하겠다고 한다. SF 소설 공모에 응시하겠다는 그는 ‘새 삶이 주어진다면’을 주제로, 현대 사상과 고대 제도의 충돌을 다루는 소설을 쓴다. 그가 쓴 소설의 제목이 바로 ‘경여년’. 이 소설은 중증 근무력증을 앓고 있는 현대의 젊은이가 고대(가상의 왕조 시대)로 돌아가 갓난아기가 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경여년’은 현대의 기억을 갖고 있는 주인공 ‘범한’이 가상의 나라 경국에서 겪는 온갖 사건들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그런데 그냥 ‘경여년’ 이야기로 바로 들어가면 되지, 무엇 하러 프롤로그에서 이게 소설이라는 걸 밝히고 시작했을까. 천월극 (穿越剧), 즉 타임 슬립 드라마에 대한 중국 광전총국의 규제를 피하기 위해서다. ‘천월’은 ‘통과하다, 넘다, 지나가다’라는 뜻으로, ‘천월극’은 주인공이 자신이 본래 속한 시공간이 아닌 다른 세계로 넘어가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중국에서 타임슬립 드라마는 2000년대 초반 처음 선보여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2010년대 들어 전성기를 맞았다. 2010년 CCTV에서 방영해 그 해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 ‘신화(神话)’는 고대 유적지 발굴 현장에서 신비한 상자를 건드려 삼국 시기로 돌아간 주인공 이야기를 다뤘다. 2011년에는 현대의 여성이 우연한 사고로 청나라로 돌아가 강희제의 아들들과 사랑에 빠지는 스토리를 다룬 타임 슬립 드라마 두 편이 나란히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바로 ‘궁쇄심옥(宫锁心玉)’과 ‘보보경심(步步惊心)’이다.

그런데 광전총국은 2012년 1월 1일자로 타임슬립 드라마는 방송 황금시간대(저녁 7시부터 밤9시까지) 방영을 금지한다고 발표한다. 이유는 타임슬립 드라마가 실제 역사를 왜곡한다는 것이며, 또 하나의 이유는 우연한 사고로 타임 슬립한 드라마 주인공처럼, 자기도 타임 슬립하겠다며 차에 뛰어들거나 계단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이 실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황당한 일이지만, 많은 타임 슬립 드라마들의 설정--평범한 현대인이 과거로 돌아가면 현대에 습득한 지식 덕분에 특별한
능력을 인정받고, 황족과 사랑에 빠진다이 그만큼 매력적이었다는 얘기도 되겠다.

이렇게 타임 슬립 드라마 금지령이 내려졌지만, 실제로는 이후에도 수많은 타임 슬립 드라마가 나왔다. 웹 드라마는 방송 채널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보다 규제가 덜했기 때문에 타임 슬립 소재를 다룬 수많은 웹 드라마가 동영상 플랫폼을 통해 방영되었다. 실제 역사상 시기를 배경으로 할 경우 역사 왜곡이라는 비난을 받을 소지가 있어, 가상의 시대를 다루는 타임 슬립 드라마가 늘었다.

그런데 웹 드라마라도 동영상 플랫폼과 방송 채널에서 함께 방영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는 소설 속 이야기라고 못박고 시작한 경여년처럼, 규제를 피하기 위한 설정을 더한다. ‘시간도지도(时间都知道)에서는 꿈 속의 이야기로 설정했다. 또 타임 슬립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었지만 장야()초교전(乔传)처럼 드라마에서는 타임 슬립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경우도 많다.

초기에는 과거의 역사 속으로 이동하는 천월극이 많았지만, 게임이나 만화, 혹은 대본 속 세계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등 천월의 양태는 다양하다. 요즘은 현대를 배경으로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다룬 타임 슬립 드라마들이 많다. 주인공이 그리 멀지 않은 과거로 돌아가 사건을 해결한다든지, 자기 인생의 특정 시기로 돌아가 한을 푼다든지 하는 내용이다. 이런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종종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싶어 과거로 돌아갔다가, 결국 현재를 소중히 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최근
2년간 중국에서 만들어진 타임 슬립 드라마가 40편 가까이 된다고 한다. 왜 이렇게 타임 슬립 드라마가 인기를 얻고,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는 걸까. 타임 슬립은 판타지. 평범한 사람이 타임슬립 후에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고, 특별한 사람들과 사랑에 빠진다. 팍팍한 현실에서 탈피해 꿈을 꾸고 싶은 시청자의 욕망을 자극한다. 또 자신이 원래 속했던 시간대와 다른 곳에 살게 된 주인공의 삶을 통해, 세계관의 충돌이나 모순, 기발한 사건을 흥미롭게 그려내는 것도 타임 슬립 장르의 묘미다.

경여년에서도 그런 장면들이 종종 등장한다. 주인공 범한은 본래 중국 고전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은 현대인으로, 고전문학사의 대표작을 줄줄 외우는 수준이다. ‘경여년의 이런 설정 덕분에 드라마에는 재미있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범한이 동생에게 들려준 홍루몽이야기는 구전을 통해 장안의 화제가 되면서, 해적판 소설책이 나돌 정도가 된다. 범한은 또 두보의 명시 등고(登高)’를 마치 자신이 지은 것처럼 줄줄 써 내려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시는 천하의 명시인데, 범한의 붓글씨 실력은 형편 없어서, 마치 유치원생이 쓴 듯 삐뚤삐뚤한 악필이라는 게 또 웃음을 자아낸다.

나의 경여년시청은 어느덧 중반 회차에 접어들었다. 범한은 자신의 호위무사가 죽음을 당하자, 복수를 하겠다며 온갖 고초와 음모를 뚫고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죽은 사람이 중요한 인물도 아니고, ‘호위 무사일 뿐인데왜 그렇게 사서 고생하느냐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버럭 화를 내며, 인간의 존엄과 평등 사상을 설파하는 범한을 보니, 과연 타임 슬립한 현대인답다. 타임 슬립 아닌 척하는 타임 슬립 드라마 경여년이 과연 어떻게 전개될지, 빨리 끝까지 봐야겠다.

*네이버 중국판 차이나랩 엔터트렌드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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