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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에 나온 중국 드라마 중 최고의 화제작이었다는 연희공략을 뒤늦게 보고 있는 중이다. 황제 1인과 그의 수많은 여인들이 등장하는 궁중 암투는 사극 드라마의 주된 소재이다. 서로 물고 물리는 음모와 질투, 간계가 등장하는데, ‘연희공략역시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주인공 위영락이 전형적인 궁중 여인상이 아니라 현대적인 센 언니캐릭터라서 색다른 재미가 있다.

드라마 '연희공략'에 등장한 서양 악단 

 

악기를 반대로 쥐고 연주하는 플루트 주자 모습 


 
연희공략은 청나라 건륭제(1711~1799)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청나라 강희제부터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지는 시대는 중국의 국력이 최고조에 이르렀고 문화가 융성했으며 국제적 교류도 활발했다. 그래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는 이를 짐작하게 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연희공략’ 20화에서도 이런 장면을 보게 되었다.  

 
20
화에는 황제 건륭제의 생일 잔치 이야기가 나온다. 황제의 총애를 얻기 위해 황후와 비빈들이 저마다 공들여 준비한 생일 선물을 바친다. ‘연희공략의 악역인 고귀비가 선물을 바칠 차례인데 무슨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는지 장막을 쳐놓고 한껏 의기양양하다. 곧이어 어디선가 서양 클래식 음악이 울려퍼진다. 파헬벨의 캐논이다.

 
나는 처음에 이 음악이 TV에서 나오는 게 아닌 줄 알았다. 청나라 배경 사극에 파헬벨의 캐논이라니. 그런데 TV에서 나오는 음악이 맞았다. 선물을 가리고 있던 장막이 걷히자 서양 악기를 연주하는 악단의 모습이 나타난다. 바로크 음악가 파헬벨은 캐논1680년 즈음에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3대의 바이올린과 통주저음 악기를 위한 곡으로 작곡되었고, 이후 관현악이나 현악 합주곡 등 다양한 형태의 편곡으로 연주되어 왔다.

 
그런데 화면에는 기타 아코디언 색소폰 같은, 들리는 음악과 상관없는 악기들이 막 나온다. 게다가 화면에 등장한 6현 기타와 색소폰, 아코디온은 건륭제 생일 잔치 당시 존재하지도 않았던 악기다. 플루트 주자는 플루트를 거꾸로 들고 연주하고 있고, 바이올린에는 19세기 들어 등장한 어깨받침까지 달려 있다. 아무리 드라마에 잠깐 나오는 장면이라 해도 너무 허술하게 촬영한 장면에 웃음이 나왔다.

 
어쨌거나 드라마 속 건륭제는 할아버지 강희제가 좋아하던 서양 악기를 다시 보게 되었다며 크게 기뻐한다. 플루트는 프랑스 선교사가 할아버지에게 선물한 악기이고, 바이올린은 할아버지에게 서양 음악을 가르쳐 준 토마스의 지도를 받아 청나라 장인들이 만든 악기라고 한다. 또 바이올린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할아버지가 바이올린을 좋아해서 토마스에게 2년간 배웠다고 회상한다. 고귀비는 오랫동안 연주되지 않던 서양 악기를 수리하고, 서양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사람들을 모아서 악단을 만드는 게 힘들었다며 생색을 낸다.

 
토마스? 강희제의 음악 선생님? 파헬벨의 캐논연주 장면은 엉성하게 촬영했지만, 건륭제의 대사를 들어보니 뭔가 근거가 있는 것 같았다. 호기심이 생겨 자료를 뒤져보니 실제로 토마스라는 사람이 존재했다. 강희제가 서양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것도, 건륭제 역시 서양 음악 애호가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하 서술 내용은 카톨릭타임즈 2021호 기사 명말청초 중국에서의 서양선교사 활동’, 그리고 Sheila MelvinJindong Cai가 쓴 책 <Rhapsody in Red: How Western Classcial Music Became Chinese>를 참조했다)

토마스 페레이라 신부 흉상 

서양 음악과 서양 악기가 중국에 들어온 것은 명나라 말기다. 예수교 소속 마테오 리치(1552~1610) 신부가 피아노의 전신인 클라비코드를 명나라 만력제에게 선물했다. 리치 신부와 함께 온 판토자 신부는 궁중 환관들에게 서양 악보를 읽고 서양 악기를 연주하는 법을 가르쳤다. 예수교 신부들은 중국에 올 때 악기를 휴대하고 왔으며, 이들이 중국에 지은 성당과 궁중에서 서양 음악이 연주되었다.

 
마테오 리치가 초석을 닦은 이후, 청나라에서도 많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활동했다. 이들은 역법을 편찬하는 청나라 천문기관인 흠천감을 거점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했다. 청나라 강희제(1654~1722)서양 학문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서양 음악을 좋아해서 서양 악기를 수집하고, 서양 음악 이론을 연구한 끝에 직접 작곡까지 했다 한다.
 
벨기에 출신의 베르디난트 페르비스트(1623~1688) 신부는 흠천감에서 일하며 강희제에게 신임을 얻었다. 그는 강희제에게 음악을 가르치면서, 포르투갈 출신으로 인도에서 선교하고 있는 토마스 페레이라 신부가 음악의 천재라고 추천했다. 강희제는 즉시 페레이라 신부를 중국에 초청했다. 토마스 페레이라 신부의 중국명은
徐日昇. 드라마 연희공략에서 언급한 토마스는 아마도 이 인물인 듯하다.  

 
페레이라 신부는 1673년 베이징에 도착했다. 강희제는 친히 나와서 그를 영접했다 한다. 페레이라 신부는 하프시코드와 작은 오르간을 강희제에게 선물했다. 1679년 페레이라 신부는 강희제 앞에서 서양 악기를 연주하기 위해 궁중에 들어가는데, 페레이라 신부는 이 때 중국 악단이 연주하는 멜로디를 악보에 받아 적었다가 끝나자마자 똑같이 재현해 강희제를 깜짝 놀라게 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통일된 악보 표기법 없이 여러 방법을 사용했는데, 리듬과 음정을 제대로 표기하지 못했다.   

 
강희제는 서양 음악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직접 음악 이론과 하프시코드 연주법을 배우기 시작해, 중국 도교의 의식에서 부르는 기도송을 하프시코드로 연주했다고 한다. 페레이라 신부가 서양음악 이론을 강의할 때 강희제는 56명의 자식들을 모두 함께 듣게 했다. 3황자 윤지가 가장 뛰어난 학생이었고, 후일 페레이라 신부와 함께 서양 음악 기보법과 이론에 관한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페레이라 신부가 1708년에 세상을 떠난 후, 황실에는 3년간 음악교사가 없었다. 로마 교황이 새 음악교사로 파견한 테오도리코 페드리니 신부는 폭풍우를 만나 남미까지 갔다가 마닐라를 거쳐 마카오로 오는 험난한 여행 끝에 1711년 중국에 도착했다. 강희제는 페드리니 신부를 궁중 음악교사로 일하게 하고, 매년 여름 열하에 있는 피서산장에 갈 때 페드리니 신부도 데리고 갔다. 페드리니 신부는 그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 걸 시기한 자들의 모략으로 투옥됐는데, 강희제가 죽고 옹정제가 즉위하면서 석방되었다. 옹정제는 선교사를 싫어했지만 자신에게 음악을 가르친 페드리니 신부는 궁중에 출입할 수 있게 했다.

 
옹정제를 이어 즉위한 건륭제는 아버지보다 서양음악에 관심이 많았고, 천주교는 싫어했지만 선교사 개개인의 전문성은 높이 평가해 중용했다. 그는 황실에 선교사 출신의 음악교사들을 두고, 18명의 환관으로 코러스와 서양음악 앙상블을 조직하게 했다. 이 앙상블은 선교사나 외교관들이 중국 황실에 선물한 서양 악기를 연주했다. 건륭제 재임 시대에만 10대의 바이올린, 2대의 첼로, 1대의 베이스, 8대의 목관악기, 만돌린, 기타, 실로폰과 하프시코드가 황실에 들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음악사학자들은 건륭제 시대 청나라 황실에는 서양 악기 솔리스트와 앙상블, 코러스까지 갖추고,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클래식 음악의 메인스트림을 즐겼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학계에서 정설은 아니지만, 심지어 황실에서 오페라까지 공연되었다는 설도 계속 제기되고 있을 정도다. 황실 밖에서도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중국의 성당에서 미사곡 같은 종교음악이 연주되었고, 중국 신자들이 합창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니 고귀비가 서양 악단을 새로 조직해 황실에서 오랫동안 연주되지 않던 서양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는 것은 허구이지만, 청나라 궁중에 서양 악단이 있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파헬벨의 캐논을 연주했다는 설정도 가능성 있는 얘기다.
촬영된 장면은 너무 허술하지만, 어쨌든 연희공략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드라마는 그 드라마가 만들어진 사회와 역사, 문화를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중드 뭐하러 보냐는 주변 사람들에게 중드 보는 것도 공부라고 반박해온 내 주장도 궤변만은 아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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