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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보구 십년불만(君子报仇十年不晚). 군자가 원수를 갚는 데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 중국 드라마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다. 복수는 중국 드라마의 주된 테마다. 물론 한국 드라마 중에서도 복수가 주된 테마로 등장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중국같지는 않다. 중국 무협 드라마에는 직접적으로 나에게 해를 입힌 사람이 아니더라도 내 스승이나 벗의 원수라면 나의 원수나 같다면서, 목숨까지 걸고 복수에 가담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지독하게 복수에 집착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성어가 바로 ‘와신상담(卧薪尝胆)’이다. 춘추 전국시대 오나라와 월나라가 대립할 때, 오왕 합려가 월왕 구천에게 패해 죽은 것을 합려의 아들 부차가 원통해 했다. 그는 날마다 가시 많은 장작 위에 누워 잠을 청하며(卧薪), 복수를 다짐했다. 부차는 결국 월나라를 침공해 구천을 굴복시키고 복수에 성공했다. 이번에는 구천이 오나라에서 당한 치욕을 잊지 않겠다며 날마다 쓴 쓸개를 핥으며(尝胆),복수를 맹세했다. 결국 구천은 다시 오나라를 침공해 멸망시키고 부차는 자결했다.
북수가 주 테마인 드라마를 보면, ‘멸문지화’를 겪은 가문에서 누군가가 살아남아 ‘와신상담’ 끝에 복수를 하고 한을 푼다. 중국 드라마의 대명사처럼 되어버린 ‘랑야방’이 대표적인 복수극이라 할 것이다. 보통 멸문지화를 당한 귀족이나 왕족 가문의 자손이 복수에 나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집안의 대가 끊기는 것을 막기 위해, 하인이나 아랫사람의 아이를 대신 희생시키고, 원래 죽을 운명이었던 아이를 살리는 경우도 많다. ‘조씨고아’나 ‘천성장가’의 주인공들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진짜 신분을 알고, 멸망한 집안이나 나라의 한을 풀기 위해 복수에 나서야 하는 운명을 맞닥뜨리게 된다.
한국에서도 인기를 끈 드라마 ‘장야’ 역시 복수가 주된 테마다. 시즌 1에서는 특히 주인공 녕결의 복수가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며 진행된다. (‘장야’ 시즌 1 내용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스포일러 싫으신 분들은 넘어가시기를.) 녕결은 어릴 때 이유도 모르고 가족과 친구들이 잔혹한 학살을 당하는 걸 목격했다. 임씨 장군부와 그 마을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음을 당한 날, 학살극 속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 녕결은 복수를 위해 살아왔다. 그가 남들과는 다른 능력을 가진 ‘수행자’가 되려 한 것도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학살에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 하나하나 처단하고, 권력과 무력을 함께 지닌 학살의 주범을 향해 한발한발 다가간다.
장야 59화에서는, 임 장군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당왕이 과거의 판결을 뒤집는 장면이 등장한다. 당왕과 신하들은 모두 녕결이 죽은 임장군의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녕결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임장군의 아들이 아니면 도대체 누구냐고 묻는 이들에게 녕결은 대답한다. (영문 번역된 대사를 다시 한국어로 번역함)
“저도 임장군의 아들이면 좋겠어요. 하지만 아닙니다. 제 아버지는 장군의 부관도 아니고, 문관도 아니고, 사무원도 아니었어요. 그저 문지기였고, 이름은 닝셴이었습니다. 제 어머니는 리산냥, 출신이 미천한 시녀였어요. 허베이성에서 임장군부로 팔려왔죠. 제 어머니는 사실 이름이 없었어요. 집에서 세번째였기 때문에 그냥 리산냥(李三娘)이라고 불렸죠.
저도 알아요.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죠. 왕좌를 빼앗긴 왕자가 타국으로 떠났다가 복수하러 돌아와 왕좌를 다시 차지합니다. 집안의 화를 피해 도망갔던 귀족의 자제는 온갖 고난 끝에 원한을 풀게 되죠. 하지만 왜 복수극의 주인공은 늘 왕자여야 하죠? 문지기와 하녀의 자식은 복수할 자격조차 없다는 겁니까?”
나 역시 ‘장야’를 보면서 녕결의 진짜 신분이 궁금했는데, 문지기의 아들일 줄은 예상 못했다. ‘문지기와 하녀의 자식은 복수할 자격조차 없다는 겁니까?’라는 일갈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개인적으로는 ‘장야’ 시즌 1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녕결은 수많은 복수극에서 지워졌던 ‘이름 없는 민초’의 존재를 환기하며, 단번에 고정관념을 깨버렸다.
녕결의 대답을 들은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한다.
“장군의 아들은 살아남고, 문지기의 아들은 죽어야 한다? 그거야말로 세상에 가장 쓰레기 같은 생각이구나.”
시즌 1을 마친 ‘장야’는 중국에서는 시즌 2까지 방영을 끝냈다. 현재 한국에서도 시즌 2를 방영 중인데, 시즌 2는 녕결의 복수극에 집중했던 시즌 1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 전개되고, 녕결 역을 비롯해 많은 배우들이 바뀌어 낯선 느낌으로 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시즌 2를 보다가, ‘당국의 주인은 왕족인 이씨가 아니라, 당국에 사는 모든 백성’이라는 녕결의 대사를 듣고, ‘민초가 주인공인 복수극’을 선보였던 ‘시즌 1’과 분명한 연결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야 시즌 1을 본 지 꽤 시일이 지났는데, 다시 꺼내보고 싶어졌다.
*2020년 3월 네이버 중국판 차이나랩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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