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既来之则安之。
드라마 '보보경심'에서 4황자가 루오씨에게 해준 말. 21세기 아가씨가 웬일인지 청나라로 타임 슬립한다. 루오씨는 청나라에서 살기 어려우니 어떻게 해서든 현대로 돌아가려고 자꾸 남들 눈에는 '자살 기도'로 비치는 행동을 한다. 그 때마다 무슨 인연인지 4황자와 마주치고. 4황자는 '도대체 젊은 사람이 무엇 때문에 죽으려고 하느냐'고 추궁하는데, 루오씨는 '죽으려는 게 아니'라고 해명하며 이렇게 묻는다.
"꿈속에 있는데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4황자의 대답.
“'六个字. 既来之则安之!(한자 6글자-기왕 왔으니 적응해서 잘 지내라는 뜻)"
루오씨에게 해주는 4황자의 충고가 나한테 해주는 말처럼 들렸다. 중국에 온지 딱 1년이 됐을 때였다. 이왕 중국에 왔으니 적응해서 잘 지내라고. 알았지? 알고 보면 중국도 재미있는 거 많다고.
전에도 '보보경심'에 대한 글을 쓰면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바로 이 문장 덕분이었는지 '보보경심'은 나의 인생 드라마가 되었다. 내가 중국생활에 진정으로 적응하기 시작했다고 느낀 게 '보보경심'을 보면서부터였으니까. 내 중국 생활은 그러므로 '보보경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보보경심 이전에는 '중국에 살고는 있지만 좋아서 사는 건 아닌' 쪽이었다면, 보보경심을 만나면서부터 중국 생활도 나쁘지 않네, 더 나아가 재미있네, 하는 식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처음 중국에 왔을 때 중국학 공부를 하려 했던 건 내가 중국 역사나 문화에 기본적으로 관심이 있기 때문이었는데 강의 내용이 너무나 기대 이하라서 갖고 있던 관심마저 다 잃어버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보보경심' 드라마 한 편이 시들었던 관심을 다시 살려내줬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한시, 고사, 청나라 역사, 모두 흥미진진했다. 내친 김에 보보경심 소설책까지 사서, 몇 달에 걸친 대장정 끝에(사전 찾았던 단어 찾고 찾고 또 찾고.......) 완독했다.
'보보경심'을 보면서 이전에는 누가 누군지 분간도 잘 못했던 중국 배우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소녀시대 윤아와 함께 중국 드라마 '무신 조자룡'을 찍은 린겅신이 '보보경심'의 잘 생긴 14황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보경심'의 주제가를 흥얼흥얼 따라 부르다가, 이 주제가를 부른 '후거'라는 배우 또한 엄청나게 유명하고, 그의 대표작인 '랑야방' 역시 명작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하여 드라마 '랑야방'에 입문하게 되었다.
'랑야방' 역시 보보경심 때와 마찬가지로 원작 소설책을 사왔는데(이건 무려 세 권이다! 언제 읽을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앞부분을 읽다 보니 눈이 번쩍 뜨이는 대목이 있었다. '랑야방'의 주인공인 매장소가 드라마 '보보경심'의 4황자가 했던 말을 똑같이 하는 것이다.
'랑야방' 역시 보보경심 때와 마찬가지로 원작 소설책을 사왔는데(이건 무려 세 권이다! 언제 읽을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앞부분을 읽다 보니 눈이 번쩍 뜨이는 대목이 있었다. '랑야방'의 주인공인 매장소가 드라마 '보보경심'의 4황자가 했던 말을 똑같이 하는 것이다.
既来之则安之。
매장소가 양나라 수도 금릉에 온 것은 요양하기 위해서였는데, 여러 복잡한 일들이 일어나 제대로 요양이 되겠느냐고 근심하는 지인에게 하는 말이다. 그러니 이 말의 저작권은 '보보경심'의 4황자에게 속한 게 아니었다. '보보경심'에 이어 '랑야방'에도 푹 빠져있었는데, '보보경심'에서 내게 일종의 깨달음을 줬던 이 말을 '랑야방'에서 또다시 마주치게 된 것이다. 뭔가 운명적이지 않은가. 알고 보니 이 말의 원래 출처는 '논어'였다. 덕분에 논어의 한 부분을 읽어보게 되었다.
'랑야방'에서 이제는 '위장자'로 넘어왔다. 1930년대말 상하이와 홍콩 등지를 무대로 펼쳐지는 항일 첩보전을 소재로 한 '위장자'를 보면서 중국의 근현대사에 대해 공부하는 기분이다. '보보경심'을 만난 이후,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로운 발견, 새로운 재미가 이어진다. 중국 생활 초기에는 빨리 끝내고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이었지만, 지금은 가는 시간이 너무나 아쉽다. 한국에 돌아간 후라도, 어디에 있든 어떤 일을 하든 4황자와 매장소가 해준 이 말은 평생 잊지 않을 것 같다.
既来之则安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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