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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클럽 발코니 이번호에 기고한 해금 이야기다. 처음엔 원고만 써서 보냈다가, 해금 연주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에, 한밤중에 딸한테 부탁해 사진을 찍었다. 둘째가 보더니 '엄마 초보 티 팍팍 난다'며 웃어댔다.
해금을 배우기
시작한지 반 년이 되어간다. 지난해 가을, 피아노 연습을
싫어하는 딸에게 ‘피아노 말고 다른 악기 한 번 해볼래?’ 하고
제안했던 게 발단이었다. 딸에게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왜 하필 해금 얘기를 꺼내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딸이 ‘해금 소리가 좋다’고 했던 게 기억났고, 나 역시 강은일, 꽃별 등을 취재하면서 한번쯤 해금을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긴 하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다소 충동적으로
덧붙였다. “혼자 하기 싫으면 엄마도 같이 할까?”
동네 국악학원에 문의해 선생님을 소개 받았다. 집에서 배울 수 있다 하니 남편이 ‘나도 배워볼까’ 하고 끼어들었다. 가족 셋의 해금 레슨이 시작되었다. 셋이 함께 배우니 은근한 경쟁심리도 발동했다. 나는 피아노를 쳐왔고
음감이 있는 편이라 자신감이 있었다. 피아노처럼 음정이 정해져 있는 건반을 누르면 되는 게 아니라, 현을 짚는 손의 위치와 세기를 바꿔가며 맞는 소리를 찾아 만들어나가야 했다.
간단한 두 줄짜리 악기에서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게 재미있었다. 손가락에 굳은 살이
내려앉았고, 진도가 쑥쑥 나갔다.
해금 기초 교본에는 전통 정간보뿐 아니라 서양의 오선 악보도
함께 표시돼 있었다. 黃 太 仲 林 南(황 태 중 임 남) 국악음계를 배웠지만, 나는 서양음계에 익숙했고 오선 악보가 편했다. 이미 알고 있는 동요나 민요는 악보를 보지 않아도 음감에 의존해 수월하게 연주했다. 나는 해금을 연주하면서도 무의식 중에 ‘황 태 중 임 남’이 아니라 ‘도 레 미 파 솔’로
소리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곧 문제가 생겼다. 교본
뒷부분에는 오선 악보가 없었다. 그 동안 오선 악보에 의존하는 게 습관이 되어 ‘황 태 중 임 남’ 율명이 한자로 표기된 정간보는 읽기 힘들었다. 아는 곡을 할 때는 좀 나았지만, 모르는 곡이 많아 낭패였다. 서양음계에 맞춰진 음감으로는 통하지 않았다. 음을 들으면 서양 음계의
계명을 떠올리는 게 습관이 돼버려 머릿속에서 ‘도 레 미 파 솔’과
‘황 태 중 임 남’이 뒤엉켰다.
반면 딸과 남편은 별 어려움 없이 국악 음계를 그대로 흡수했다. 오선 악보는 잘 읽지 못하니 처음부터 아예 보지 않았다. 초반엔
맞는 음정을 찾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음정도 정확해지고 정간보도 잘 읽어냈다. 남편은 내가 처음엔 잘 나가다가 어려움을 겪는 게 ‘서양음악에 너무
찌들어서’ 그런 거라고 놀렸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의식적으로 해금 연습할 때 ‘황 태 중 임 남’ 율명을 소리 내어 읽으며 익숙해지려고 노력했다.
얼마 전 선생님이 ‘본격적으로
해보자’며 정악 악보를 가져왔다. 정간보에 무척 다양한 악상
기호가 있다는 걸 알았다. 남편은 ‘수연장지곡(밑도드리)’을, 나는 ‘송구여지곡(웃도드리)’을
배우기 시작했다. 곡을 배우다 보니 어떤 곡인지 찾아보게 되고, 구석에
처박혀 있던 정악 음반도 꺼내 듣는다. 이젠 ‘낯선 곡’이 아니라 ‘아는 곡’이니까.
그러고 보니 나는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우면서 서양 클래식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됐던 것처럼, 요즘 해금을 배우면서 국악을 새롭게 만나고 있는 셈이다. 합주곡에서는 해금이 어떤 파트를 연주하나 주의를 기울이고, 해금
독주가 들려오면 귀가 쫑긋해진다. 서양 클래식 음악을 주로 듣고 어쩌다가 한번씩 국악을 들으면서 막연히
“국악’도’ 좋다”고 얘기하던 예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딸 때문에 시작했지만, 요즘은
나와 남편이 더 열심이다. 아직은 깽깽거리는 소리지만,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 돌이켜보니 처음엔 충동적으로 저질렀을지 몰라도, 해금을
배우는 이유는 많다.
“피아노와는 달리 해금은 갖고 다닐 수 있는 악기라 좋아요. 서양 악기는 배워봤으니까 이왕이면
우리 전통악기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해금 소리 참 매력적이잖아요. 배워보니
해금은 조바꿈이 자유롭고 다른 악기와도 쉽게 어울려요. 또 가족이 함께 배우니 금상첨화죠”
성묘 갔다가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손을 다쳐, 당분간 왼손을 쓰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생각이 ‘해금
연습 못해서 어쩌지’였다. 실용적인 목적이 있는 일이 아닌데
이렇게 하고 싶다는 느낌을 가져본 게 또 언제였나 싶다. 해금을 배우는 이유는, 길게 설명했지만 사실은 간단한 거였다. 내 손으로 해금 연주하는
게 좋으니까. 재미있으니까. <2014년 3월 클럽발코니 매거진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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