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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동방예술센터(东方艺术中心)는 상하이 푸동 신구에 위치한 대형 복합문화공간이다. 이 예술센터의 공식 위챗 계정에 ‘빛이 나는 미모!’라는 제목에 류이페이의 사진을 썸네일로 한 글이 올라왔다. 뭔가 해서 클릭해 보니 ‘선녀 경고-미녀 사진 대방출’이라는 문장 밑으로 영화 ‘뮬란’의 예고편과 포스터, 뮬란 주역을 맡은 배우 류이페이(刘亦菲)의 ‘움짤’이 이어졌다.
다음에는 류이페이가 무용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여러 장 나온다. 류이페이는 단아한 자태로 중국에서 ‘신선 언니(神仙姐姐)’ 라고 불린다고 하는데, 어린 시절부터 발레를 배운 덕분이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수년간의 발레 강습으로 거동 하나하나가 우아한 기품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류이페이는 발레의 기초가 있었기 때문에 ‘뮬란’에 나오는 무술 동작도 어려움 없이 우아하게 해냈다고 한다.
이렇게 류이페이를 예찬하더니, 이번엔 연예인 중에 발레를 배운 또다른 여배우가 있다며, 류스스(刘诗诗) 얘기로 넘어간다. 류스스는 ‘보보경심’ ‘여의명비전’ 등에 출연했고, 고전적인 미모로 사랑받는 유명 배우다. 류스스는 6살 때부터 발레를 배웠고, 명문 베이징 무도학원 출신이다. 그가 무용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도 여러 장 실렸다. 류이페이와 류스스, 두 ‘여신’은 모두 어린 시절부터 발레를 배운 덕분에 우아한 기품을 지닐 수 있었고, 결국 두 사람의 성공에는 발레 학습의 공이 적지 않다고 강조한다.
그러고 보니 발레를 한 다른 중국 여배우들도 떠올랐다. 영화 ‘와호장룡’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 배우 장쯔이(章子怡), 그리고 ‘랑야방 2’에 나왔던 장후이원(张慧雯) 역시 발레를 전공했다. 그런데, 동방예술센터는 왜 이 글을 올린 것일까. 맨 처음에는 이 아트센터에 ‘뮬란’과 관련된 문화행사가 있나 했는데, 읽어가다 보니 여배우와 발레 얘기였다. 연예 블로거들이 쓴 것 같은 이 글이 도대체 왜 공연장 계정에 올라왔을까. 한참을 읽은 뒤에야 이 글의 진짜 ‘본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모든 여자어린이가 발레 꿈을 꿉니다. 누가 작은 선녀가 되고 싶지 않겠어요?”
“만약 당신의 자녀가 일정 정도의 발레 기초가 있고, 발레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동방예술어린이발레단(东艺小儿芭蕾舞团)에 참가하세요~ 당신의 자녀도 다음 세대의 ‘신선 언니’가 될지 모릅니다!”
이 글은 바로 지난해 창단한 동방예술어린이발레단이 정식으로 단원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다시 보니 제목에 ‘招募(‘모집’이라는 뜻)’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기는 한데, ‘어린이’ 발레단원 모집 공고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 어린이 발레단 신입단원 시험에 응시하기 위한 자격은 7-15세, 무용 기초가 있고 발레를 사랑하는 어린이로, 이전에 다른 무용단에서 활동했거나 시급 이상 무용대회에서 수상 경력이 있으면 우선 고려한다고 되어있다. 단원으로 뽑히면 매주 일요일 오후에 동방예술센터에서 발레 수업을 받는다고 한다. 어린이를 위한 ‘발레 아카데미’인데, 동방예술센터의 예술교육 프로그램 중 하나다.
동방예술센터는 어린이발레단의 신입 단원 모집 공고에 먼저 발레를 배운 미모의 여배우들을 내세웠다. 발레를 배우면 이들처럼 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독자들이 대개 성인임을 감안하면, 이 글은 자녀 교육에 열성적인 중국 부모들을 겨냥한 ‘광고’였던 셈이다. 물론 교수진이 훌륭하다는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동방예술센터 어린이발레단의 예술고문은 중국 무용계의 거장 스종친(石钟琴)이다. 스종친은 중국의 혁명 발레극이자 영화로 유명한 ‘백모녀(白毛女)’에서 제 1대 백모녀를 춤췄던 원로다. 스종친은 1972년 중국과 일본의 수교 당시 도쿄에서 공연된 ‘백모녀’에도 출연해 대성공을 거두면서 이른바 ‘발레 외교’의 주역이자 증인이 되었다. “두 나라 사이에 남아있었던 얼음이 스종친의 날렵한 발 끝에서 녹아 내렸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 ‘모집 공고’를 보다가 의문이 생겼다. 이 글은 발레를 했다는 여배우들의 미모를 오글거릴 정도로 칭찬하며 ‘발레를 배우면 예뻐져요’를 줄곧 강조한다. 그러니 ‘류이페이, 류스스처럼 되려면 발레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딸을 스타로 만들고 싶으면 발레를 시키세요’라고 부모들에게 권유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신선 언니가 되고 싶은’ 여자 어린이만 이 발레단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일까.
발레는 여성만 하는 예술이 아니다. 발레를 공연하려면 여자 무용수와 남자 무용수가 다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발레, 하면 여성 무용수만 떠올린다. 한국의 1세대 발레리노(남성 발레 무용수)인 김용걸 씨는 중학생 때 처음 발레를 배웠는데, ‘발레는 여자만 한다’는 편견 때문에 아이들, 심지어 선생님한테까지 놀림을 받고, 그만둘 것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한다.
물론 그동안 한국에서 발레 저변이 확대되면서 남성 발레의 매력이 부각되고, 이제 ‘발레하는 남자’에 대한 편견은 많이 없어진 상태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아직 발레는 예쁜 여자들이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굳건한 모양이다. 이 모집 공고에 특별히 성별 애기는 없고, ‘여자는 무엇무엇을 준비하라’는 내용이 있는 걸 보니 남자도 지원을 할 수는 있나 보다. 하지만 여배우와 발레리나 사진으로 가득한 이 공고를 보고 ‘우리 아들도 발레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이 글에 달린 댓글들을 보니 ‘빨리 성인반도 만들어 달라’는 내용이 있다. ‘우리 딸은 아직 네 살밖에 안돼서 못 시키니 아쉽다’는 내용도 있다. 류이페이와 류스스를 내세운 모집 공고가 효과가 있기는 있었나 보다.
*2020년 1월 네이버 중국판 차이나랩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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