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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바이스(齐白石)는 1,500억원이라는 중국미술 사상 최고의 경매가를 굳이 내세우지 않더라도, 20세기 중국 미술 최고의 거장으로 꼽힌다. 치바이스 (1864~1957)의 그림을 보러 예술의전당에 다녀왔다. 한국의 국보에 해당하는 중국의 국가 1급문물이 13점이나 왔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전시다. 중국국가미술관이 소장한 치바이스 작품 중 80여 점을 엄선했고, 치바이스가 영향을 받은 선배 화가들과, 치바이스에게 영감을 받은 후배 중국 예술가들의 작품을 함께 전시한다.
그런데 이번 전시회는 나에게 치바이스를 보러 갔다가 팔대산인을
알고 돌아온 전시로 기억될 것 같다. 전시회 보기 전에는 ‘팔대산인’이 그 시대 활동한 8명의 대가들을 통틀어 부르는 명칭이라고 막연히
추측했을 정도로 문외한이었다. 중국 인터넷에도 ‘팔대산인은
몇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이 많은 걸로 봐서는 이런 오해를 한 사람이 나뿐만은 아닌 것 같으니 다행이라
해야 할지.
‘팔대산인’은 장시성
난창 출신의 화가 주탑(朱耷)(1626~1705)의 호다. 그는 명
태조 주원장의 아들 중 한 명인 주권의 9세손이니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면서 나라도 집안도 망하는 아픔을 진하게 느꼈다. 23세 때 출가해 중이 되었다가, 30여
년 후 환속해 가정을 이루고 난창 남쪽에 수도원을 짓고 주지를 맡았다. 59세에 ‘팔대산인’ 별호를 쓰기 시작한 그는 독특하고 기이한 화풍을 확립해
중국 문인화를 혁신했다.
팔대산인은 ‘미치광이
화승’으로 불렸다. 팔대산인 관련 자료를 찾다가 뜻밖에도
워싱턴 포스트에서 1678년 그의 지인이 남긴 기록을 인용해 팔대산인의 미치광이 행적을 자세히 소개한
기사를 발견했다. 팔대산인은 유럽과 미국의 주요 미술관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듯하다.
“그는 크게 웃다가, 하루
종일 울기도 했다. 어느 날 저녁에는 그가 승려복을 찢고 불태웠다. 그는 울거나
웃지 않을 때는 난창 읍내로 가서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안 하고 이 가게에서 저 가게로 돌아다니기만 했다. 그는
아마도 미친 척했을 것이다.”
팔대산인은 미친 척하면서 자신을 숨기고, 세상을 비웃었다. 그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보다는 전설이 많다. 그는 술을 좋아했고, 술에 취하면 신세 한탄하며 울기를 자주 했고, 취중에 그림을 그려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주사’가 있었다 한다. 조선시대 화가 오원 장승업을 연상하게 한다.
그는 자신의 호 ‘팔대산인’을 쓸 때, ‘팔대(八大)’와 ‘산인(山人)’ 이렇게
두 자씩 붙여 세로로 흘려 썼다. 많은 중국인들이 그가 세로로 쓴 ‘八大’는 운다는 뜻의 哭, 혹은 웃는다는 뜻의 笑와 닮았고, ‘山人’은 之’자와 닮았다며, 이는 哭之笑之, ‘울다가 웃다가’, 나아가
哭笑不得,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화가 자신의 상황을 빗대어 나타낸 것으로 해석한다.
<팔대산인 4폭병 중 '기러기'>
망국의 한을 안고 살았지만 팔대산인의 그림은 한에 잠겨 있지
않다. 오히려 자유분방하고 맑고 단순하며 탈속한 기개가 느껴진다. 이번
전시회에는 중국 국가미술관이 소장한 팔대산인의 대표작 4건 7점(한 건은 4폭병이라 작품 4점으로 이뤄졌다)이
왔다. 중국 내에서도 자주 전시하지 않아 쉽게 볼 수 없는 걸작들이다.
팔대산인은 사물의 형태를 화폭에 옮기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감정과 의지를 담아냈다. 구도와 화법이 혁신적이고, 고독하지만
자유로운 그의 영혼이 느껴진다. 팔대산인의 그림 속 물고기와 오리, 새, 학은 흥미롭게도 모두 눈을 위로 치켜 뜨거나, 그림 밖 사람들을
흘겨보는 모습이다. 만주족의 한족에 대한 멸시를 이런 식으로 돌려주는 것일까. 세상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화가의 의지가 전해지는 것만 같다.
“서위(徐渭), 주탑은 범인과 거리가 멀고, 오창석(吳昌碩)은 노년에 새로운 재능을 펼쳤다. 나는 구천에서 그들의 개가 되어 세 분 문하에서 수레바퀴를 돌리련다”(치바이스)
서위, 주탑, 오창석은 모두 치바이스의 작품에 영향을 준 화가들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팔대산인 주탑 뿐 아니라, 치바이스와 동시대 활동했던 오창석의 작품도 볼 수 있다. 치바이스는 특히 팔대산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1901년 친구
집에서 처음 팔대산인의 작품을 보고 감명받아 곧바로 따라 그린 이래로 20년 동안 팔대산인을 본받아
공부했다. 치바이스는 팔대산인의 화풍에 자신의 개성을 더해 독특한 작품 세계를 완성했다.
“그림을 그리는데 형(형태)와 신(정신)을 겸비해야 한다. 너무 닮게 그려서도 안 되니, 너무 닮으면 독창성을 잃는다. 또 너무 닮지 않게 그려서도 안 되니, 닮지 않으면 터무니없게 된다”(치바이스)
치바이스는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이 닮음과 닮지 않음(似与不似) 사이에 있다고 했다. 이
전시회 제목은 ‘같고도 다른(似与不似): 치바이스와 대화’다. ‘닮음과 닮지 않음’, 혹은 ‘같고도
다른’은 치바이스의 작품 세계를 요약하는 말이거니와, 치바이스가
팔대산인을 배웠으면서도 독창성을 더해 ‘같고도 다른’ 화풍을
구축했다는 뜻으로 읽히기도 한다.
치바이스가 팔대산인을 참고하거나 따라 그렸다고 밝힌 작품과 팔대산인의
작품이 나란히 전시된다. 이렇게 두 거장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비교 감상할 수 있는 전시는 중국에서도
전례가 없었다 한다. 수백 년을 뛰어넘어 이뤄지는 거장들의 예술적 대화를 볼 수 있는 기회다. 이 전시를 예술의전당과 공동주최한 중국국가미술관은 전시를 직접 구성했을 뿐 아니라 개막 축하연주를 위해 중국에서
공연단까지 데려왔다. 중국측이 이 전시회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이 치바이스를 중심에 두고 선, 후대 중국미술을 살펴보는 전시를 기획한 이유는 뭘까. 서구로부터의
충격으로 중국의 근대 미술이 시작되었다는 일반적인 관념과는 달리, 치바이스가 대표하는 중국 근현대 미술이
그보다 200여 년 앞선 팔대산인의 작품세계로부터 비롯되었고, 이
전통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아닐까.
이 전시가 끝나면 교환 전시로 조선시대 명필이며 문인화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를 중심에 둔 전시가 중국에서 열린다.
베이징에 있는 중국 국가미술관에서 열릴 ‘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 전이다. 어떤 전시가 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네이버 중국 판을 운영하는 차이나 랩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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