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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애호가가 아닌 한, 일반인들의 오페라에 대한 인식은 대개 비슷할 것이다. 호화로운 공연장, 잘 차려 입은 관객들,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 노래, 입이 떡 벌어지는 고가의 티켓, 이런 단어들이 아마 오페라와 관련해
떠오르는 이미지일 것이다. 그러니 오페라가 ‘그들만의 장르’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오페라는 사실 굉장히 비경제적인 장르다. 오페라는 ‘종합 예술’이라는
말은, 그만큼 이것저것 신경 쓸 일도, 돈 들어갈 일도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 만큼 티켓도 비싸진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오페라를 볼 엄두를 못 내게 된다. 그렇다면 티켓 값만 문제인가. 대개 국공립 오페라단의 공연은 정부 예산으로 지원받는 만큼, 티켓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해진다. 하지만 오페라를 ‘그들만의
장르’로 느끼는 사람들의 ‘심리적 장벽’은 여전히 존재한다.
연출가 그레이엄 빅
버밍엄 오페라 컴퍼니는 일반적인 오페라와는
다른 오페라를 지향한다. ‘Birmingham opera company is not what you expect
from opera!’라는 모토가 보여주듯이. 그레이엄 빅은 오페라가 ‘사회 전체를 끌어안고, 사회가 변화하는 만큼 빨리 변화할 준비가 돼
있어야’ 진정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
현대의 오페라 하우스가 너무 크고, 관객과 무대의 상호 작용이 결여돼 있다고 지적한다.
“바그너 이전까지, 오페라는 항상 조명이 켜진 채로 공연돼 왔다. 즉 공연자는 관객과 같은 공간과 조명을 사용했다는 뜻이다. 예술의
역사는 생동하는 관객 참여의 역사였다. 관객이 어둠 속으로 물러나고,
오케스트라가 무대와 관객을 이어주는 역할에서 벗어나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바이로이트에서 시작됐다. 바그너는 자신의 ‘성스러운 축제’를
설계하면서, 유감스럽게도 관객을 함께 즐기는 사람들에서 단순한 관찰자로 격하시켜버렸다. 지금은 표준이 돼 버린 바그너의 공연 방식에는 관객과 무대 간에 생동하는 상호작용이 결여돼 있다.”(Guardian 2003년 10월 20일)
버밍엄 오페라 컴퍼니의 초기 작업은 일반적인 오페라 극장을 벗어나, 관객들과 상호 소통하는 공연을 만드는 데 집중됐다. 레저센터나 옛
무도회장 같은 장소에서 열린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관객들도 꾸준히 늘어났다. 그러나 어느 날 그레이엄 빅은 공연이 열린 레저 센터 주차장에 비싼 독일산 자동차가 즐비하게 주차돼 있는 걸
발견하고 실망한다. 아무리 오페라 하우스가 아닌 곳에서 공연을 열더라도 관객은 여전히 공연이 열린 그
지역 대다수의 생활인들과는 별 관계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레이엄 빅은 그래서 새로운 실험을 시작한다. 서로 다른 연령과 직업, 인종적 배경을 가진, 버밍엄에 뿌리내리고 살고 있는 지역민들을 공연에 참여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첫 실험이었던 알반 베르크의 ‘보체크’는 ‘관객과 출연진이 한 데 섞여 누가 보체크 세계에 속해 있고, 누가
속해 있지 않은지 구별할 수 없는’ 공연으로 창조됐다.
나는
2008년 여름, 모차르트의 ‘이도메네오’를 통해 버밍엄 오페라 컴퍼니의 공연을 처음 만났다. 오페라
제목인 ‘이도메네오’는 그리스 크레타 섬의 이도메네오 왕을
가리킨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뒤 전쟁 포로들을 싣고 귀환하던 이도메네오 왕은 도중에 풍랑을 만나, 바다의 신 넵튠에게 ‘뭍에 도착해 처음 만나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다’는 맹세를 하고서야 목숨을 건진다. 전쟁포로인 트로이의 일리아 공주는
이도메네오 왕의 아들인 이다만테에 의해 구조되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는데, 이다만테를 사모해온 아가멤논의 딸 엘렉트라 공주는 강한 증오와 질투를 느낀다.
천신만고 끝에 뭍에 오른 이도메네오 왕은 한 젊은이를 만나는데, 그는 공교롭게도 이다만테
왕자였다. 오페라 ‘이도메네오’는 자신이 한 맹세 때문에 아들을 죽여야 하는 비극의 주인공인 아버지를 중심으로, 사랑과 질투, 운명의 힘을 이야기한다.
‘이도메네오’는 버밍엄 시내 외곽 공장지대, 버려진
옛 고무공장 건물에서 상연됐다. 건물 뒤쪽으로는 화물 열차가 지나는 선로가 보이고, 한눈에도 오랫동안 방치됐다는 느낌이 물씬한 붉은 벽돌 건물. 오페라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동네였다. 관객들은 대부분 수수하고 간편한 옷차림이었다. 공연 안내문에 ‘이동하기에 편한 캐주얼 복장과 신발’을 권한다고 쓰여 있었던 것이다.
공장 건물 내부의 휑하니 빈 공간에 모래흙을
쌓고 조형물을 세워 무대를 만들었다. 오케스트라 피트도 따로 없고, 관객석도
없었다. 그냥 한쪽에 오케스트라가 자리잡고 있었고, 오페라의
장면 장면은 이 공간 곳곳에 배치된 세트들을 옮겨 다니며 진행됐다. 관객들은 이 공간을 옮겨 다니며
연기하는 성악가들을 따라, 역시 이동하면서 구경하면 되는 것이었다.
관객들이 가끔 동선을 혼란스러워할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는 코러스들이 안내해 줬다. 때로는 연출가인
그레이엄 빅 자신이 앞장서서 관객을 가수들 바로 옆으로 데려다 주기도 했다. (나는 공연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나를 안내해 줬던 마음 좋게 생긴 아저씨가 연출가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코러스 170명은 버밍엄 지역사회 구성원으로 이뤄졌다. 다양한 세대와 인종, 직업을 아우르는 집단이었다. 아마추어 코러스는 노래하고, 춤추고, 연기하고, 때로는 대사까지 하면서, 극의 진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때로는 트로이의 전쟁 포로였고, 때로는 크레타 섬의 시민이었고, 때로는 환희에 들뜬 대중이었고, 때로는 바다괴물에 습격 당한 희생자들이었다.
관객석과 무대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오페라는 끊임없이 관객을 극 속으로 끌어들였다. 오페라 초반, 전쟁 포로로 잡혀온 트로이의 일리아 공주에게 이다만테 왕자가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위 영상). 일리아 공주는 가슴에 포로의 표지를 달고 있다. 이다만테 왕자는 일리아 공주에게 ‘당신은 이제 자유의 몸’이라며 이 표지를 떼어 자신의 가슴에 달고는 ‘이제 내가 사랑의 포로’라고 노래한다. 하지만 적국의 왕자와 사랑에 빠지는 게 죄스러운 일리아 공주는 이를 거부하며 표지를 되돌려 받는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 포로의
‘표지’를 달고 있었다. 컴퍼니 직원이 건물
입구에서 티켓을 내고 입장하는 관객들의 상의에 노란색 접착식 메모지를 하나씩 붙여줬던 것이다. 티켓을
냈다는 표시인 줄로만 생각했는데, 이 메모지가 관객까지 극중 인물로 만들어주는 소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조금 뒤 이어진 트로이 포로의 석방 장면에서 코러스들은 관객들 사이를 이리저리
누비면서 옷에 달린 노란색 메모지를 하나하나 떼어줬다. 이들은 활짝 웃으며 ‘당신은 이제 자유예요!’라고 속삭이고, 화합의 악수를 청했다. 나 또한 크레타 섬으로 잡혀온 트로이의 전쟁
포로였던 것이다!
버밍엄 오페라 컴퍼니의 모든 오페라는 영어로
공연된다. 자막 스크린을 설치하기 곤란한 무대이고, 영국인들에게는
낯선 외국어보다 모국어인 영어로 부르는 게 더 관객들과 소통하기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파격적이고 현대적으로
연출되는 버밍엄 오페라 컴퍼니의 오페라는 마치 뮤지컬 같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오페라의
감흥은 그 어느 뮤지컬보다 더 컸다. 손 내밀면 잡힐 듯한 가까운 거리에서 생생한 연기와 노래를 감상하는
느낌은 정말 강력한 것이었다.
이다만테 왕자가 일리아 공주와 맺어지는
걸 보고 미쳐버린 엘렉트라 공주가 부르는 광란의 아리아. 엘렉트라 공주가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차가운
흙 위에 몸을 누이고, 그 몸 위로 흙이 뿌려지는 광경에 소름이 돋았다. 바로 코앞에서 지켜본 일리아 공주의 우아한 음성과 비련에 가득 찬 자태에 반했고, 마치 도살장 장면처럼 연출된 피날레에선 이도메네오 왕의 슬픔을 함께 느꼈다.
아무리 좋은 오페라 극장의 좋은 좌석에 앉는다 해도 이렇게 가까이서, 실감나게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볼 수 있을까.
공연이 끝난 뒤, 모든
출연자들에게 아낌없는 박수가 쏟아졌지만, 특히 아마추어로 참여해 땀 흘린 코러스들에게 쏟아진 박수는
더욱 의미 있는 것이었다. 당시 이 공연을 다룬 현지 언론들의 기사는,
아마추어 코러스의 상당수가 이전에 오페라를 접한 경험이 한번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전하고 있었다. 장벽은
깨졌다. 이들에게 이제 오페라는 ‘나와 상관없는 그들만의
장르’가 아니게 된 것이다.
버밍엄 오페라 컴퍼니는 2009년에는 베르디의 ‘오텔로’를, 2010년에는 스트라빈스키의 ‘결혼’을 공연했다. 모두 버밍엄 지역민들을 출연시킨 오페라였다. (아래 영상은 차례로 오텔로 배우 워밍업과 코러스 연습 장면) 공연들은 대부분 TV를 통해 녹화 방송됐고, 버밍엄 중심가의 대형 스크린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이 밖에도 무료 거리 공연이나 무료 성악 마스터클래스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지역민들에게 다가갔다.
버밍엄 오페라 컴퍼니는 현재 내년 3월 21일 개막되는 신작 ‘Life
is a Dream’을 준비하고 있다. 유명 작곡가 조너선 도브에게 위촉한 작품이다. 조너선 도브는 나흘간 공연되는 바그너의 ‘링 사이클(니벨룽의 반지)’를 이틀간으로 압축하고 18인조 오케스트라 연주로 다시 만든 ‘링 사가’를 1990년 그레이엄 빅과 함께 발표했던 작곡가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공연되는 ‘링 사가’ 역시 ‘장벽’을 깨려는
시도였을 터이다.
버밍엄 오페라 컴퍼니 웹사이트(www.birminghamopera.org.uk)에는
지금 ‘Life is a Dream’의 배우와 코러스를 구한다는 공고가 떠 있다. ‘Life is a Dream’에 출연하려면? 오디션 필요 없다. 경험 없는 사람도 환영이다. 필요한 모든 연습 과정을 무료로 제공한다. 연습만 충실하게 따라가면 된다. ‘Life is a Dream’ 아마추어
출연자들은 2월초부터 매주 주중 1회 세 시간, 주말 1회 네 시간씩 연습하고 공연 개막 직전에 따로 몇 차례 리허설을
한다. 그리고 3월 21일부터 30일까지, 7차례의 공연에 출연하게 된다.
나는 수많은 오페라를 봤지만, 단 한 차례 본 버밍엄 오페라 컴퍼니의 공연을 내 생애 최고의 오페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내가 계속 영국에 살았다면 아마 버밍엄 오페라 컴퍼니의 공연에 ‘관객’으로서뿐만 아니라, ‘출연자’로서도 참여했을지 모른다. 버밍엄 오페라 컴퍼니의 ‘풀뿌리 오페라’ 실험은, 비록 먼 나라 영국의 일이긴 하지만, 오페라가 반드시 ‘그들만의 장르’는 아니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고양문화재단(http://www.artgy.or.kr) 웹진 칼럼으로 기고한 글입니다. 졸저 '나도 가끔은 커튼콜을 꿈꾼다'에 실렸던 버밍엄 오페라 컴퍼니 이야기를 새롭게 고쳐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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