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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초등학교 1학년인 딸이 학교 숙제를 해야 한다며 화가 사진을 찾아달라 했다. 갑자기 화가 사진은 무엇에 쓰려고? 알고 보니 딸의 숙제는 자신의 장래 희망을 쓰고, 이 장래희망과 관련해 닮고 싶은 사람, 그러니까 ‘역할 모델’의 사진을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딸의 장래 희망은 화가다. ‘화가 누구?’ 했더니 딸은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며 엄마가 가르쳐 달라고 했다.
“글쎄, 누가 좋을까? 김홍도?”
“김홍도가
누구야?”
“으응. 굉장히 유명한 우리 나라 화간데…….”
딸의 얘기를 듣자마자 내 입에서 제일 먼저 튀어나온 이름이 단원 김홍도(1745~1806년경)였다. 그런데
문제는 조선시대 화가인 김홍도의 사진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래도 외국인보다는 한국인이
좋겠다 싶어 대신 백남준의 사진을 인터넷에서 찾아 딸의 손에 들려 보냈다. 딸이 언젠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백남준의 작품 ‘다다익선’을 보고 ‘텔레비전 탑’이라며 좋아했던 기억이 나서였다.
그런데 동서고금에 화가는 많고 많건만 나는 왜 딸의 말에 김홍도를 제일 먼저 떠올렸을까. 어릴 때 우리 집에 액자로 걸려 있었던 김홍도의 ‘씨름도’ 때문이었을까(바로 위 그림. 당연히 사본이었지만).
김홍도가 조선시대 화가 중 가장 친숙한 이름이라서였을까. 생각해 보니 국립극장에서 봤던
공연 ‘화선 김홍도’ 때문인 것도 같다.
‘화선 김홍도’는 지난 7월 초연 때부터 작가 배삼식, 연출 손진책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기대를 모았던 국립극장의 국가 브랜드 공연이다.
김홍도의 그림을 소재로 삼았다. 굳이 ‘국가
브랜드 공연’이라는 타이틀을 붙이지 않더라도 국립극장이 제작하는 공연이라면 우리의 정신이 무엇이고 우리다운
형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어야 할 터이다. 노래와 춤, 음악과
연극이 한데 어우러진 가무악극 ‘화선 김홍도’는 그런 고민의
결과물이다.
단원 김홍도는 중국의 경치와 화법에 매몰됐던 당시 화풍에서 벗어나 조선의 풍경과 서민의 일상을 독특한
필치로 그려낸 화가다. 연출가 손진책은 김홍도를 통해 우리 화폭에 조선의 본령이 자리잡게 되었다며,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그림, 한국의 정신이라는 걸 절감했다고 했다. 김홍도를 공연의 테마로 택한 이유다. 그러면서도 이 공연은 ‘김홍도라는 한 사람의 전기적 일생을 넘어, 덧없는 삶과 이를 화폭에
담고자 했던 한 예술가의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보다 보편적인 울림을 갖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국립극장 소속단체인 국립무용단과 국립창극단,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오랜만에 함께 작업했다. 함께 출연한 뮤지컬 배우들은 우리 식의 창법을 살려서 노래했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 악기만 고집하진 않았다. 작곡가 김대성은 다양한
악기를 사용하고 서구적 양식도 적절히 가미해 우리 정서를 표현해 냈다. 손진책은 전통 양식을 그대로
사용하기보다는 본질적인 리듬과 호흡을 우리 것으로 가져가는 데 중점을 뒀다고 했다.
‘화선 김홍도’는 역사적 인물을 다루고 있지만, 일반적인 사극처럼 진행되지 않는다. 김홍도 그림을 좋아하는 두 사람, 김동지와 손수재가 그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면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뼈대가 된다.
적막함과 애수가 느껴지는 김홍도의 말년 작품 ‘추성부도’가
현실과 그림세계 사이의 관문이 된다. 초연에서 손수재 역을 맡았던 뮤지컬 배우 성기윤은 이를 ‘판타지 로드 휴먼 드라마’라고 표현했다.
김동지는 손수재에게 빌려준 ‘추성부도’를 돌려받으러 손수재의 집을 찾아가지만, 손수재는 없고 ‘추성부도’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김동지는
그림 속에서 들려오는 손수재의 목소리를 듣고 놀라고, 손수재를 그림 속에서 꺼내려 손을 뻗는 순간 역시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김동지는 현실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손수재는 다른 목적을 품고 김홍도를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김동지와 손수재가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관객이 무대를 통해 김홍도의 예술 세계를 엿보는 것과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특히 그림 속에서 두 사람이 김홍도를 찾아 장터, 나루터, 씨름터 등을 다니는 장면은 김홍도의 풍속화첩을 넘기듯 한
폭 한 폭 그림 같은 정경으로 표현된다. 영상을 활용한 무대는 큰 시각적 쾌감을 준다.
그림은 단순한 배경에 그치지 않는다. 제작진은 그림을 무대
위에 생생하게 살려내 김홍도의 그림이 삶과 밀착되어 있다는 걸 보여주려 했다. 그림 속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 으랏차차 씨름판이, 쇠 달구는 대장간 풍경이, 무동의 바라춤과 칼춤이, 눈 앞에서 펼쳐진다. 이 그림을 통해 관객들은 조선 서민들의 삶과 마주하게 된다. 그림이
곧 삶이요, 삶이 곧 그림이 된다.
‘화선 김홍도’는 기승전결로 엮여 갈등이 중심이 되는 서구의 드라마와는 달리, 큰
갈등 구조 없이 흘러간다. 잔잔하되 밋밋하지 않다. 손진책은
작가 배삼식을 가리켜 ‘소년과 노인네가 같이 들어앉아 있다’고
했다. 배삼식의 대사는 쉬운 듯 어렵고, 어려운 듯 쉽다. ‘화선 김홍도’에서도 천진한 어린아이의 목소리와 세속을 초탈한 신선의
목소리가 함께 들려온다. ‘그림 같은 삶’, ‘삶 같은 그림’을 이야기하는 노래에서, 관객은 결국 삶과 그림이 하나라는 것, 안과 밖이 하나인데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그림 같구나 한 세상도 그림 같구나......
누구의 붓끝에서 피어난 세상이냐
어느 마음이 그리워 이 그림을 그렸느냐
어느
바람을 타고 어느 붓끝에 피어
우리는
또 이 그림 속을 헤매어 가느냐
이 그림
다하면 또 어느 붓끝이 있어
우릴
낚아올릴까 우리는 또 피어날까
붓끝에
낚아올린 한 세상 바람이여
바람은
지나가도 너는 거기 있으니
바람
같은 붓이 바람을 붙잡누나…..
‘화선 김홍도’가 초연 이후 석 달여 만에 세계 국립극장 페스티벌 참가작으로 다시 무대에 오른다. 해외 국립극장들의 유명 공연이 즐비한 이번 페스티벌의 폐막작이다. 초연
때 주역이었던 박철호, 왕기석은 그대로 출연하고 손수재 역에 성기윤 대신 최민철이 캐스팅됐다. 제작진은 영상과 무대 활용을 보완해 공연의 완성도를 좀 더 높이려 애썼다.
비록 사진은 없지만, 김홍도에 대해서는 ‘그 생김생김이 빼어나게 맑으며 훤칠하니 키가 커서 속세 사람이 아니다’라는
기록도, ‘아름다운 풍채에 도량이 넓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아 사람들이 그를 신선과 같다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음악과 문학적 소양도 뛰어났다 한다. 과연 그림 그리는 신선, ‘화선’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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