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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이 직업이니만큼 공연이나 영화에서 기자가 등장하면 유심히 보게 된다. 최근 뮤지컬 '잭 더 리퍼'를 보고 '먼로 기자'에 대한 글을 쓴 김에, 예전에 뮤지컬 '시카고'를 보고 '매리 선샤인 기자'에 대해 썼던 글도 옛 블로그에서 옮겨왔다. 이 글은 졸저 '나도 가끔은 커튼콜을 꿈꾼다(2010)'에도 실었다. 

뮤지컬 '시카고'-제공 신시뮤지컬컴퍼니


‘'시카고는 국내에서 꾸준히 무대에 올려지는 뮤지컬이다. 해외 공연 팀이 온 적도 있고, 한국 배우들이 출연한 시카'시고도 여러 차례 공연됐다. '시카고'는 브로드웨이의 전설적인 안무가 겸 겸 연출가 '밥 파시(Bob Fosse)'의 스타일이 그대로 살아있는 뮤지컬이다. 기자이며 희곡작가였던 모린 달라스 왓킨스가 1926년에 쓴 희곡 'A Brave Little Woman'이 원작이다.
 
 
밥 파시는 1975년 이 작품을 재즈의 농염한 선율과 특유의 관능미가 묻어나는 춤, 그리고 통렬한 사회풍자를 담은 뮤지컬로 처음 선보였다. 그리고 1996년 연출가 월터 바비는 70년대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대표작으로 자리잡은 '시카고'를 새롭게 무대에 올려, 토니상을 휩쓸며 다시 돌풍을 일으켰다. 리처드 기어와 르네 젤위거, 캐서린 제타 존스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아카데미상 작품상을 비롯한 6개 부문을 휩쓸기도 했다.

'시
카고' 1920년대 시카고를 배경으로 한 두 여배우의 이야기다. '벨마' '록시'라는 이 두 주인공은 모두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수감된 처지다. 벨마가 먼저 들어왔으니 '감방 선배'인 셈.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감옥 안에서 '스타'가 된다. 살인에 얽힌 갖가지 소문을 윤색해서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기자들 덕분(?)이다. 배후에는 '언론조작'을 중요한 변론의 수단으로 삼는 교활한 변호사가 있었다.

저 스타가 된 벨마는 감옥에서 나가기만 하면 배우로 활동하며 떼돈을 벌 것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나중에 들어온 록시는 한 술 더 뜬다. '임신한 여죄수'로 가련하게 행세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스타가 되는 것이다. 벨마를 비추던 스포트라이트는 곧 록시에게 옮겨간다. 록시도 풀려나기만 하면 자신의 이름을 팔아 부자가 될 것이라고 황홀해 한다. 그런데, 항상 그렇듯이, 세간의 관심은 금방 달아올랐다가는 또 너무나 쉽게 식어버리는 것 아닌가. 또 다른 스타가 나타나고, 두 사람 다 잊혀진 존재가 된다.  

이 
뮤지컬에서는 재판에 이기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교활한 변호사 빌리와, 빌리의 계산에 속아넘어가는, 또는 알면서도 기삿거리를 만들기 위해 속아주는 기자들의 모습이 풍자적으로 그려지고, 큰 재미를 준다. 변호사 빌리는 언론의 생리를 잘 안다면서 자신에게 돈만 주면 재판에서 무죄를 받게 해 주겠다고 장담한다. 이른바 '1전짜리 신문(Penny Paper)'의 황색 저널리즘을 이용해 여론을 조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빌리의 농간에 놀아나는 기자들 중에서는 '매리 선샤인'이라는 인물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매리
 선샤인. '선샤인(Sunshine) '햇빛'이니 성부터 밝고 환하다. '매리는 즐겁고 행복하다는 뜻의 '메리(Merry)'를 연상시킨다. 아주 '명랑한' 이름이다. 매리 선샤인은 죄수들의 조작된 거짓 고백을 들으며, '이해할 만해!' '그럴 법해!'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이들의 얘기에서 '감동적인 휴먼 스토리'를 만들어낸다. 매리 선샤인이 얌전하게 두 손을 마주잡고 부르는 노래 'A Little Bit of Good'은 코믹한 분위기로 관객들을 웃기는데,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 엄마가 말씀하신 게 기억나요.

'장밋빛 안경을 써보렴.
그러면 시꺼먼 까마귀 대신에
예쁜 새 로빈을 보게 될 거야.'

팍팍하게 얽힌 삶이지만,
당신이 이걸 믿는다면 훨씬 살기 좋아질 거예요.
누구에게나 조금은 좋은 점이 있다고.

맞아요, 누구에게나 조금은 좋은 점이 있어요.
비록 나타나지 않을 때도 많지만.
아무리 비열한 겉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뒤에는 따뜻하고 다정한 면모가 있다는 걸,
시간만 갖고 보면 알 수 있어요.
계속 지켜보세요.

누구에게나 조금은 좋은 점이 있으니까,
우리가 나쁘다고 하는 사람들도
완전히 나쁘기만 한 건 아니죠.
그러니까 좋은 점을 찾으려고 노력해 봐요......"

뮤지컬 '시카고' 한국 공연의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이 노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
약삭빠른 변호사들과 타협해 거짓기사를 발표하지만, 꿈을 위한 잠시 동안의 방편일 뿐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합리화와 위로의 노래. 능수능란한 변호사들에게 끊임없이 이용당하며 진실된 보도를 등한시하고 있는 부패한 언론에 대한 경고장."

 
그렇다. '매리 선샤인'은 이 작품 속에서 '문제 있는 기자들'의 대표 주자다. 바보스럽게 착해서인지, 아니면 다 알면서도 그러는 건지, 어느 쪽이든 매리 선샤인은 결과적으로 변호사 빌리의 의도대로, 진실과 동떨어진 기사를 쓰게 된다. '착한 여기자' 매리 선샤인은 뮤지컬 후반부에서 가발을 벗고 사실은 남자였음을 드러내는데, 경악과 함께 폭소가 터져나오는 장면이다. '보이는 것이 다 진실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런데 기자인 나는 '매리 선샤인' 기자의 존재를 또 다른 방향으로도 받아들였다. 매리 선샤인 같은 시각으로 기사를 써도 되는 상황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매리 선샤인이 자신의 노래에서 피력한 '신념'은 그 자체로는 틀리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좋은 점이 조금은 있다'는 것, 사실이다. 하지만 '기자로서' 이렇게만 믿고 살아가기에는, 세상이 너무 어수선하다. 어지럽다.

'시
카고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정치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대형 '게이트', 정치권에 떠도는 온갖 추문과 설을 취재해야 하는 현장에서, 나는 자주 지겨움을 느꼈다. 불법자금을 받은 정치인들의 이름이 적혀있다는 'OOO 리스트', 온갖 음모론을, 권력다툼을 쫓아다니면서, 나는 자주 허탈해졌다. 당시 내가 뉴스에서 리포트 했던 기사들에는 이런 단어들이 자주 등장했다. '난항' '무산' '우려' '곤혹' '부인' '반발' '공격' '대립' '의혹'...... 

진실에 눈을 감고 억지 감동 스토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기자는 '어디에서나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시각을 가져야 하고, 사회의 부정부패를 감시 고발하는 의무를 다해야 한다. 하지만 눈을 부릅뜨고 어디가 잘못됐나 찾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라면 더 좋겠다. '장밋빛 안경'을 써도 진실에서 멀어지지 않는 세상이라면 좋겠다. 매리 선샤인처럼 기자 일을 해도 별 문제 없는 세상이라면 좋겠다. , 그런데, 그런 세상이라면 기자들 할 일이 없어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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