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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자로서나, 딸 키우는 엄마로서나, 어린이 공연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어린이 공연을 보러 다니다 보니, 미취학 어린이들을 위한 공연들은 넘쳐나는데,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볼 만한 공연이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어린이 공연들은 대부분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유치원생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진다.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을 위한 공연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장 큰 원인은 초등학교 때부터 많은 어린이들이 이미 예비 입시경쟁의 대열에 서게 되는 우리나라의 교육 환경에 있을 것이다. 학교 수업이 끝나도 이 과목 저 과목 학원 다니느라 공연 볼 시간이 없는 것이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보러 오는 아이들이 없다 보니 그 연령대 아이들을 위한 공연이 잘 만들어지지 않고, 공연이 없다 보니 관객층도 형성되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나 할까.

나는 초등학교 6학년 큰 딸은 대개 어린이 공연에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 다섯 살 터울의 둘째 딸이 있어서 어쩌다 함께 어린이 공연을 보러 가게 되면, 큰 딸은 유치하다며 질색을 한다. 내 딸도 학원을 다니지만 다른 아이들보다는 여유가 있는 편이어서 문화 생활을 할 시간이 없진 않다. 하지만 내가 데려가는 공연 외에, 딸이 자발적으로 즐기는 문화 생활은 주로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이다. 그 연령대 아이들이 찾아볼 만한 공연이 있으면 좋겠다 싶다.

그런데 최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10대를 위한 연극이 막을 올렸다. 10대 중에서도 중학생들을 주 관객층으로 잡았다. 제목은 쉬반의 신발’. 어린이 연극 우당탕탕 할머니의 방등을 제작했던 어린이문화예술학교가 제작했다. 요즘 잘 나가는 영국 작가 팀 크라우치가 쓴 작품을 독일 아동청소년 연극 전문가 브리기트 데티에가 연출했다.

원제는 ‘Shopping for shoes’.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여자아이 쉬반과 비싼 브랜드 운동화 수집이 취미인 남자아이 숀이 등장한다. 숀은 이른바 브랜드의 노예가 된 아이이고, 쉬반은 그런 흐름에 저항하는 의식 있는 아이다. 두 사람은 숀의 운동화가 더럽혀진 사건을 계기로 티격태격하다가 가까워진다.

신발을 매개로 10대의 생각과 고민, 그리고 우정을 이야기하는데, 그 방식이 재미있다. 배우는 단 한 명, 전현아 씨가 등장한다. 일종의 모노 드라마인데, 라이브 연주를 하는 연주자와 호흡을 맞춰 생동감을 더한다. 전현아 씨는 무대에 쌓인 상자 속에서 신발을 한 켤레 한 켤레 꺼내가면서 각 등장인물의 캐릭터를 표현해 낸다. 26켤레의 신발이 곧 등장인물이 되는 셈이다. 명품 운동화를 좋아하는 숀은 나이키 에어조단 마크원’, ‘나이키 샥스 아이디로 표현된다. 쉬반의 캐릭터는 가죽을 사용하지 않는 운동화’, ‘젤리쥬스등으로 형상화하며, ‘구찌 로퍼’, ‘끔찍한 볼링슈즈’, ‘오래된 싸이클화등 다양한 신발, 즉 인물들이 등장한다.

청소년 연극이라면 흔히 떠올리게 되는 소재가 있다. 학교, 입시경쟁, 10대의 반항과 사춘기, 뭐 이런 거다. 물론 청소년 연극에서 주요 소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들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사용되던 것이라 신선함이 떨어진다는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런데 쉬반의 신발은 이런 소재에서 벗어나 있다.

배경과 등장인물이 영국이라 영국의 정치 상황을 반영하는 이야기들이 꽤 나온다. 숀의 가정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영국 노동자 계층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고, 쉬반의 대사 중에는 제 3세계의 어린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글로벌 기업의 상혼이나 물신주의를 비판하는 내용도 들어있다. 부시나 블레어 등 서구의 정치인들 얘기도 나오는데, 이런 내용들이 한국의 10대 관객들에게는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고, 메시지 전달에 치중한다는 느낌이 다소 드는 순간도 있다.

그렇지만 이 연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회적 메시지 전달에만 중점을 두지는 않는다. 대화 속에 10대의 관심과 고민, 그리고 이성간의 우정, 사랑이 자연스럽게 묻어난다. 연극적인 재미도 있다. 우리 10대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했는데, 중간중간 깔깔깔 웃어가면서 잘 따라가는 것 같았다.  

이 연극을 내년에 중학생이 되는 내 딸에게 보여주고 싶다. 운동화와 샌들이 이미 여러 켤레 있는데도, 며칠째 운동화 사고 싶어를 되뇌는 딸에게 운동화보다 더 중요한 게 많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이 연극을 제작한 어린이문화예술학교 김숙희 대표의 말에 따르면, 엄마에게 이 연극을 봐 주는조건으로 새 운동화 사 줄 것을 내걸었던 한 아이가, 연극을 보고 나서는 운동화를 사지 않겠다고 했다 한다.

운동화 값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요즘 딸의 관심사 중에는 운동화뿐 아니라 10대를 위한 화장품도 있다. 친구들도 다 그렇단다. 10대들이 명품 운동화를 욕망하고, 벌써부터 피부 걱정을 하면서 BB크림을, 에센스를 바른다. 없었던 수요도 새롭게 창출해 내는 이 시스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너무 휘둘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연극을 딸에게 보여주고 싶은 건데, 공연 기간이 10일까지이니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항상 이렇다. 어린이 청소년 연극을 취재 때문에 나만 보고 정작 내 아이들에게는 못 보여준다. 

*SBS 뉴스 인터넷 취재파일로도 송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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