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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공연 포스터(이번달 '객석' 중에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 첫날(11/15). 말러 교향곡 9번을 음반이 아닌 실연으로는 처음 들었다. 빠르고 화려한 소리로 듣는 사람들을 격동시키는 것은 비교적 쉽지만, 느리고 고요한 소리로 마음을 움직이는 게 더욱 어렵고 소중하다는 걸 다시한번 깨달은 날. 마지막 음이 사그러든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지속됐던 '침묵'이 어제 공연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던 것 같다. 한자리에 모인 그 많은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몰입'했던 순간. 지휘자 사이먼 래틀이 기자회견에서 언급했던 '침묵의 깊이(Depth of Silence)'를 온 몸으로 느꼈던 순간. 영적인 충만감이 차올랐던 공연이었다. 

그러나 음악 외적으로는 약간의 씁쓸함도 느꼈던 날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이전 두 차례 공연은 SBS-동아일보-금호문화재단 3자가 공동 주최했었다. 하지만 클래식 공연 입장권 최고가를 경신하며 입방아에 올랐으면서도, 워낙 돈이 많이 드는 공연이라 적자를 감당하기 쉽지 않았고, 급기야 이번에는 주최측이 삼성전자로 바뀌었다. 

이 공연의 공식 명칭은 '삼성전자와 함께 하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이다. 요즘은 스폰서 기업 이름이 단순히 공연 '협찬사'로 표기되는 게 아니라, 공연명칭 자체에 포함되는 경우가 부쩍 늘어나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번달 월간 '객석'에서 처음 봤고, 어제 공연장과 기자회견장에도 붙어있었던 이 공연 포스터를 보며 약간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삼성전자와 함께 하는'이란 말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이라는 글자와 똑같은 크기로 인쇄돼 있었던 것이다. 이전엔 공연명칭에 스폰서 기업 이름이 들어가더라도 공연단체 이름보다는 상대적으로 작은 글씨로 인쇄되는 게 보통이었는데 말이다.  

어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을 앞둔 간담회에서는 사이먼 래틀이 직접 언급한 건 아니었지만, 베를린 필하모닉 관계자가 삼성전자의 후원과 협력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번 한국 공연의 주최측도 삼성전자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야심차게 내놓은, 온라인 공연실황 중계 시스템인 '디지털 콘서트홀' 유료 서비스 역시 삼성과 제휴해 모바일 TV와 앱을 통해 이용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어제 공연장에는 삼성과 제휴해 제공되는 디지털 콘서트홀 영상이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나는 삼성전자의 돈이 없었다면, 높은 제작비 때문에 대형 클래식 공연을 유치하기 힘든 국내 음악시장에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성사시키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기업 입장에선 돈을 들인 만큼 효과를 거두고 싶어하는 게 당연하다. 그렇지만 예전에는 공연 '후원사'로 만족했던 대기업들이 이제는 전면에 주최자로 나서는 게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지고, 그만큼 공연계 역시 대기업의 돈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 됐다는 현실이 썩 반갑지는 않다.   

오늘 아침에 출근해서 열어본 메일 한 통도 이런 생각을 계속 이어가게 했다. 현대카드 홍보팀에서 보낸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15-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 정명훈'이란 제목의 보도자료였다.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와 정명훈의 만남이라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공연에 '현대카드 슈퍼콘서트'라는 브랜드가 붙었다. 

현대카드 슈퍼콘서트는 많은 기업들이 부러워하는 '문화마케팅 성공 사례'다. 초창기엔 '현대카드 슈퍼콘서트'라 해도 공연단체나 뮤지션 이름만 언급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15회까지 이어지면서 '현대카드 슈퍼콘서트'라는 이름 자체가 더 앞세워지는 공연 브랜드가 돼버렸다. 초창기엔 공연 기획사가 주가 되고 기업은 '후원'하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기업이 공연 기획과 홍보까지 직접 컨트롤하려는 추세다. 공연기획사는 사실상 대기업의 '하청'업체가 돼버린 느낌이다. 

공연의 스폰서 기업들은 공연들에 기업의 VIP 고객들과 유력인사를 초청해 홍보효과를 극대화하려 한다. 백화점이나 금융기관의 VIP 고객들은 웬만한 공연들은 다 초대받아 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런 상황에선 당연히 유명세 있는 대형 공연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공연 기획사들은 대기업들이 관심 있어할 만한 대형공연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한다. 그리고 기획사의 자립 기반은 점점 위태로워진다.

실력 있는 신진 음악가들의 공연은 점점 열기도 힘들고, 연다 해도 대형 공연들에 밀려 수지 맞추기도 힘들다. 작지만 내실있는 공연들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진다. 좀 심하게 말하자면 대기업의 '문화마케팅'에 매달려 유지되는 것 같아 보이는 공연시장이 앞으론 어떻게 될 것인가. 어제 공연계 지인과 '지금 유명한 몇몇 스타 음악가들이 세월이 흘러 은퇴하거나 죽고 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놓고 걱정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한 한국인 음악가가 자신의 공연명에 'OOO와 함께 하는' 식으로 후원기업 이름이 들어가는 걸 정색하고 반대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공연 기획사 대표는 그 때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안 하면 공연이 안 되는데 현실을 잘 모른다'고 한탄했다. 그리고 나는 이 '현실'이 걱정스럽다. 

외형상 화려해진 공연계 이면에는 음악가보다 돈을 내는 기업 이름이 앞서는 현실, 정부나 지자체 예산으로 운영되는 공공 문화기관들까지도 대기업 후원에 매달리는 현실이 있다. 내가 지나치게 순진한 것인가. 지나친 결벽증인가. 과연 우리 공연계는 지금 건강한 것인가. 이게 내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에 벅찬 감동을 받았으면서도 한편으론 씁쓸했던 이유다.    

* SBS 뉴스 웹사이트에 취재파일로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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