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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종 학생과 인터뷰하고 있는 벨기에 다큐 제작팀. 조명반사판 든 사람이 티에리 로로 감독.


최근 한국 음악가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건 유럽인들에게는 정말 '신기한' 일인가 보다. 벨기에 최대 공영방송 RTBF에서 한국 음악가들이 왜 이렇게 잘 나가는지를 알아보는 다큐멘터리까지 찍고 있으니. 한국에 온 벨기에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 제작팀을 만났다. 

이 다큐멘터리의 감독은 티에리 로로. 오보에를 전공한 음악가 출신의 프로듀서로 20여 년 동안 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실황 중계와 관련 음악 프로그램 제작을 맡아왔고, 음악 영화도 여러 편 제작한 베테랑이다. 그는 세계 3대 콩쿠르로 꼽히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를 매년 지켜보면서 한국인 음악가들이 최근 몇 년 사이 마치 '산사태'처럼 몰려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올해 성악 부문 우승은 동양인 최초로 홍혜란 씨가 차지했고, 지난해에는 결선 진출자 12명 가운데 절반 가까운 다섯명이 한국인이었다. 

단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로로 감독이 세계 유명 콩쿠르 55개의 수상자 국적을 조사해 봤더니, 한국인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1995년 이전엔 극소수였던 한국인 음악가들의 활약이 엄청나게 늘어 다른 나라를 압도하고 있었다. 1998년부터 16년 동안 한국인 378명이 콩쿠르 결선에 진출했고 60명이 1등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나라들을 월등히 앞서는 결과였다. 로로 감독은 이를 '한국 미스터리'라고 불렀다. 

"벨기에에서는 이를 '한국 미스터리'라고 부릅니다. 이 미스터리를 풀고 싶습니다. 한국인 음악가들이 갑자기 이렇게 산사태가 난 것처럼 많아진 이유를 알고 싶어요." 

로로 감독이 이끄는 다큐 제작팀은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서울대의 음악 교육 현장을 취재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했고, 한국 음악가들의 공연도 취재했다. 음악 영재의 가정을 방문해 부모를 만나기도 했다. 이들의 취재 일정 중에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육시스템이었다. 

"한국인들이 콩쿠르에서 부쩍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 한국예술종합학교 설립 이후더군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한국인 결선 진출자 대다수가 한예종 출신이예요. 이 학교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건 확실해 보입니다." 

나는 다큐 제작팀이 취재하는 일정을 일부 따라다니며 취재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한 홍혜란 씨의 스승 최상호 교수의 성악 레슨, 한예종의 음악영재로 이뤄진 오케스트라 리허설 현장을 참관했다. 나는 또 다큐 제작팀이 최상호 교수의 제자인 바리톤 남학생을 인터뷰하는 것을 지켜봤다. 

이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기본적인 것이었다. 음악을 왜 공부하게 되었는가? 한국 전통 음악도 있는데 왜 서양음악을 택했는가? 어머니가 어떤 역할을 해주셨는가? 한예종의 교육 과정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다른 음대와 어떻게 다른가? 음악 하는 것이 일처럼 느껴지는가? 음악 할 때 즐거운가? 한예종을 졸업하면 외국에 더 공부하러 갈 것인가? 콩쿠르에 나갈 것인가? 앞으로 꿈은 무엇인가?

최상호 교수는 해외에서는 한국 음악가들의 부상을 굉장히 신기해 하지만, 자신은 이를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한국인 음악가들은 굉장히 성실하고 끈기있고 재능도 많은 사람들이고, 이전에는 국제 콩쿠르 같은 통로를 통해 이를 제대로 발현할 기회가 적었지만, 요즘은 기회가 많아지면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 음악가들의 진가가 이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로로 감독 역시 한국인들이 근면하고 성실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한국 미스터리'가 설명되지 않는다고 했다. 

" 한국인들은 근면하고 경쟁을 좋아하지요. 1등을 하고 싶어해요. 하지만 그건 새로운 사실은 아닙니다. 한국인들은 항상 그래왔어요.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요. 뭔가 더 있을 겁니다. 그래서 한국에 왔습니다. " 

로로 감독은 1주일간 한국 촬영을 마치고 유럽에 가면 한국 유학생이 많은 독일 뮌헨에서 유학생들을 취재하고, 소프라노 임선혜 씨를 비롯해 유럽에서 성공한 한국인 음악가들도 다큐에 담을 예정이라고 했다. 콩쿠르 수상에 그치지 않고 정말 본고장 무대에서 성공한 한국인 음악가들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다큐는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과 그 가정에서부터 한국에서 마치게 되는 대학 교육 과정, 그 다음에 이어지는 해외 유학과 이후의 커리어까지, 한국 음악가의 성장 단계별로 쭉 따라가게 되는 셈이다.  

사실 나도 로로 감독에게 궁금한 게 있었다. 한국인 음악가들이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낼 때마다, 이는 탄탄한 교수진과 실기 위주 교육, 영재 발굴로 예술교육의 명문이 된 한예종 덕분이라는 분석이 자주 나온다. 나도 이런 기사를 많이 썼었다. 그런데,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던 게 사실이다. 한예종 같은 음악학교가 한국에만 있는 건 아닐 텐데? 로로 감독에게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나왔다. 

 "물론 벨기에에도 이런 스타일의 음악 학교가 있지요. 하지만 벨기에 음악가들 중에 잘 나가는 사람 별로 없어요.(웃음). 유럽 사람들은 더 삶을 즐기자는 주의죠. 한국 사람들은 더 열심히 일해요. 유럽 학생들은 뭐랄까, 굉장히 여유롭고 자유롭게 지내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충분히 열심히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이는 교육의 문제이겠지요."

이제 다큐 제작 초기 단계라서 아직 로로 감독은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 음악계에 대한 배경 지식이 있었다. 그리고 학생의 가정을 방문해 취재하는 것으로 미뤄보건대, 한국 음악가의 성장에 어머니를 포함한 가정환경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가정'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로로 감독이 나에게 개인적인 견해를 물었다면 역시 '한국 엄마들의 뜨거운 교육열이 큰 역할을 한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음악은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를 때까지 기능적인 숙련도가 굉장히 중요하다. 일단은 손이 돌아가고 어려운 기교를 소화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린 시절부터 많이 연습할수록 높은 수준에 올라갈 확률이 커진다. 

어린이들은 인내심이나 자제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소질이 있다 해도 어른이 옆에서 계속 관리를 해줘야 지속적으로 장시간의 연습을 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피아노나 바이올린 같은, 전공자에게 어린 시절부터 일정 수준 이상의 숙련도를 요구하는 악기의 경우 엄마의 뜨거운 '교육열'과 '관리'가 굉장히 중요한 변수가 된다. 거기에 한국 학생들이 대체적으로 성실하고 부모나 선생님의 말씀을 잘 따르는 기질을 지녔다는 것도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다.  

로로 감독을 인터뷰하면서 나는 그가 한국에 대해 굉장히 호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하모니카 연주자 투츠 틸레망을 다룬 그의 다큐 영화가 제천 국제 음악영화제에 초청된 것이다. 그는 이 영화제에서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한국인 친구들과 한국어로 얘기하고 싶어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그는 올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홍혜란 씨가 우승한 직후, 우승 소감을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가서 먼저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고 한다. 뭐라고 얘기했는지, 다시 말해달라 했더니 "안녕하세요. 저는 벨기에 방송국의 티에리 로로라고 합니다. 우승을 축하합니다. 당신을 인터뷰하고 싶습니다."  정도의 말이었다며 쑥스러워 했다.

http://www.rtbf.be/video/v_portrait-1er-prix-haeran-hong?id=1061833&category=divertissement (티에리 로로 감독이 제작한 홍혜란 씨 인터뷰와 콩쿠르 영상 보기 링크)

콩쿠르 기간 한 달 이상 한국어 한 마디 들어보지 못했던 홍혜란 씨는, 낯선 이방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국어 인사에 너무나 놀라고 감격했다고 한다. 로로 감독은 홍혜란 씨를 인터뷰하면서 좋은 친구가 되었다며 웃었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한국인 음악가로 임선혜 씨와 함께 홍혜란 씨를 꼽았다. 

로로 감독은 그가 한국에 도착하기 직전에 임선혜 씨가 르네 야콥스와 함께 바흐 B단조 미사를 서울에서 공연했다는 얘기를 듣고 이 공연을 놓친 걸 아쉬워했다. 르네 야콥스와도 친분이 있는 그는 자신의 다큐에 르네 야콥스의 한국인 음악가에 대한 평가도 포함시킬 예정이라고 했다. 

로로 감독이 다큐 제작에 나선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말한 대로 '한국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서였겠지만, 그가 평소 한국과 한국인들에 대해 갖고 있었던 호감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거라는 짐작을 하게 되었다. 

로로 감독의 다큐멘터리는 내년 5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기간 동안 벨기에에서 방영될 예정이다. 이후 유럽의 다른 지역 방송도 타진하고 있는 중이다. 로로 감독은 자신의 다큐가 내년에 제천에서 열리는 국제 음악영화제에 초청되는 게 희망사항이라며, 그러면 한국 관객들도 이 다큐를 볼 기회가 생기지 않겠느냐고 했다. 유럽인의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풀어낼 '한국 미스터리', 나도 보고 싶다. 궁금하다. 

다큐 제작팀의 인터뷰를 지켜보다가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앞의 감나무와 파란 하늘이 참 예뻐서 찍었다^^


*이 글은 SBS 뉴스 웹사이트 취재파일로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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