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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17일 SBS 8뉴스-'고음악 열풍/그 시대 그 소리'
지난 블로그 포스팅에서 쓴 대로, 2007년에 썼던 글을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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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2007년 6월 17일) 8시 뉴스에 나간 '고음악 열풍/그 시대 그 소리'는 오래 전부터 쓰고 싶었던 기사였다. 하지만 기사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내가 왜 이 기사를 쓴다고 했던고' 할 정도로, 많은 얘기들을 어떻게 1분 30초 짧은 방송 리포트로 정리할 것인지를 놓고 골머리를 앓았다.
아르농쿠르, 헤레베헤, 피노크, 조르디 사발 등 해외 고음악계 '거장'들이 속속 한국을 찾고 이런 공연들에 관객들이 몰리는 것을 보면서, 그동안 접하기 힘들었던 바로크 오페라 '디도와 에네아스' '리날도' 등이 성공적으로 국내 무대에 소개되는 것을 보면서,콜레기움 무지쿰 한양, 카메라타 안티콰 서울, 무지카 글로리피카 앙상블 등 국내에도 고음악 연주단체와 연주자들이 느는 것을 보면서,
서양 클래식음악 시장에서 '고음악'이 차지하는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그리고 이런 트렌드의 배경이나 이유 같은 것들을 뉴스에서 한 번쯤은 짚어보고 싶었었다. 내가 과문한지는 몰라도, 개별적인 고음악 공연에 대한 소개 기사는 많아도, 이렇게 전반적으로 고음악을 짚어보는 기사는 본 기억이 없다는 것도, 내가 이 기사를 쓰고 싶었던 큰 이유였다.
(아, 여기서 '클래식'음악이라 함은 광의의 클래식 음악을 말한다. 협의의 '클래식'은 고전주의, 낭만주의 할 때의 고전주의, 즉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 시대의 음악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딱 '고전주의 시대'에만 한정하지 않고 전 시대를 아울러 말하는 개념이다.)
일단 '고음악'의 정의부터. '고음악' 즉, '오래된 음악'이라고얘기는 하지만, 이렇게만 정의하고 나면 혼동스러운 경우가 많다. 사전을 찾아보면 '고음악'은 대개 바로크 시대와 그 이전의 음악을 말한다고 설명이 돼 있다.
그렇다면 '고음악계 거장'인 아르농쿠르가 지난해 한국에서 연주한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바로크 시대 이후의 음악이니, '고음악'이 아닌 셈인가. 비발디의 '사계'는 바로크 시대 음악이니 '고음악'인데, '사계'야 이른바 '고음악 열풍'이 일어나기 전에도 무진장 자주 연주되던 곡 아닌가. 그럼 '사계'는 '고음악'인가 아닌가.
통상 '고음악'에는 음악의 시대 개념도 들어가지만, 사실은 이 음악이 어떻게 연주되는가도 중요하다. 우리가 요즘 보는 서양 악기들은 모두 산업혁명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대규모 극장과 청중에 맞춰 크고 매끄러운 소리를 내도록 개량된 모습이다. 이렇게 바뀐 악기로는 작곡가가 그 곡을 작곡한 의도를 제대로 드러낼 수 없다는 문제가 제기된다. 작곡가가 살아 생전에 사용되던 악기들을 사용해 그 시대의 방식대로 연주하는 것.이것이 통상 '고음악'이라고불리는 음악에 담긴 뜻이다.
인터뷰를 위해서만난 한양대학교 음악연구소장 강해근 교수는 그래서 '고음악'이라는말보다도 '당대 연주'라는 말이 더 적합한 것 같다고 했다. 요즘 '당대 연주'에서주로 연주되는 곡들은 모차르트를 포함해 고전주의 초기까지의 작품들이 많지만, 최근에는 슈베르트, 멘델스존의 작품까지도 '당대 연주'의폭이 넓혀지고 있는 상황이니, 이런 '연주 양식'을 '고음악'이라는 말로 묶기에는 어폐가 있다는 것이다.
자주 사용되는 '고악기'라는 말도 약간 오해의 소지는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고악기'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옛날 악기'라는 뜻인데, 이는 '고악기'들이 반드시 몇백 년 묵은 '골동품'이라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올라 다 감바' 같은, 16, 17세기에 많이 쓰였던 저음 현악기는 한 때 자취를 감췄었지만, 현대에 와서 재조명 받고 활발히 연주되고 있다. 이 비올라 다 감바 연주자들이 요즘 사용하는 악기는 '옛날 방식으로, 현대에 만들어진 악기'인 셈이다(비올라 다 감바 연주자 강효정 씨는 '제 악기는 '카피'예요'라고 말했다). 강해근 교수가 '고악기'보다는 '시대악기'라는 말을 제안한 것도 이 때문이다.
원전 연주, 혹은 정격 연주라는 말이 많이 쓰였고, 지금도 쓰이고 있지만, '원전' 혹은 '정격'이라는 말에는, '이 방식이 아니면 틀리다'는 뜻이 은연중에 깃들여 있기 때문에 요즘 들어서는 잘 사용하지 않으려는 게 음악계의 추세라고 한다.
그럼 옛날 악기들과 현대 악기들은 뭐가 다른가. 강해근 교수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바로크 시대 음악 (바로크 음악은 우리가 통상 말하는 '고음악'의 중심을 이루는 시대다. 물론 그 이전의 음악들도 있지만)은 언어적인 음악이예요. 느끼는 음악이 아니고 이해되는 음악이죠. 그래서 그 시대 음악은 말하는 음악으로서 의사 전달에 유리한 악기들로 연주됐어요. 쳄발로라는 악기를 예를 들어보면, 기타처럼 뜯는 구조예요. 피아노에 비해 명확하게 '발음'하기 유리해요. 음하나하나를 또렷또렷하게 소리 낼 수 있죠. 여러 성부가 같이 가더라도 모든 성부들이 각기 다 자기 주장을 할 수 있는 악기예요. (강해근 교수는 아르농쿠르의 역저인 '바로크음악은 '말'한다'를 최근 번역했다.)
이에 비해 현대악기들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노래를 합니다. 이해되는 게 아니라 느껴지는 음악이죠. 현대악기는 음과 음 사이를 가능하면 끊어지지 않게, 매끄럽게 연결하는 게 최대 목표예요. '레가토'라고 하잖아요. 노래하듯이. 음과 음을 매끄럽게 연결하는 것이죠. 현대, 낭만주의 이후 음악에서는 레가토를 제일 중요한 표현 요소로 생각하니까요."
옛날 악기는 악기의 재료가 갖고 있는 성질이 여실히 드러나는 특징이 있다. 목관 악기는 그야말로 목관 악기이고, 금관 악기는 그야말로 금관 악기다. 플륫이 목관 악기라고 음악 시간에 배웠던 게 생각 나는가. 나는 어릴 때 플륫은 '목관악기'로 배웠는데, 왜 금속성 재료로 플륫을 만드는지 의아했었다. 크고 매끄러운 소리를 내기 위해 그렇게 '개조'된 것이다. 그러나 당대 연주에서는 진짜 '나무로 만들어진' 플륫을 볼 수 있다.
옛 악기의 현은 '거트 현'이다. 양의 창자가 재료다. 온도와 습도에 민감하고, 소리는 둔탁하게 느껴지지만 깊이가 있다. 현대 악기의 현은 금속성 현이다. 재료부터 다르니,소리도 다를 수밖에 없다.
원래는 현대 첼로를 전공했다가, 지금은 바로크 첼로, 비올라 다 감바를 연주하고 있는 강효정 씨는 '현대 악기와 비교하면 음량이 굉장히 작고 약점이 많아 보이지만, 굉장히 섬세하고, 자연에 가깝고, 사람의 목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내는 것이 옛날 악기들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강해근 교수는 '음악이 변해가는 과정과 악기가 변해가는 과정은 일치한다'며, 그래서 그 시대 음악은 그 시대 악기로 연주하는 게 옳다고 강조했다. 음악이 변하기 때문에 악기가 변하고, 악기가 변해서 음악이 변하는 법, 쇼팽의 피아노 곡들은 피아노라는 악기가 없었으면 안 나왔을 것이며, 리스트도 마찬가지다. 악기와 음악은 항상 같이 가기 때문에, 그 시대 악기는 그 시대 음악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도록 '세팅'된다는 것이다. 옛 음악은 옛 악기의 소리를 가장 잘 표현하고, 그 악기의 '약점'까지도 포용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시대 악기로 연주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강해근 교수와 이야기하면서, 국악에서 악기가 개량되는 과정도 똑같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오를 즈음, '이심전심'인지, 그가 '국악도 똑같다'는 얘기를 꺼냈다. 예를 들어 가야금 개량 과정을 보면, 예전엔 명주실을 사용하던 현을 금속성 재료로 만들거나, 현을 덧붙여서 더 폭넓은 음역과 음량을 소화하려 하는 것이, 서양 악기의 변천사와 비슷하지 않은가. 강 교수는 이렇게 '개량된' 가야금은 이름만 가야금이지 옛 가야금과는 이미 크게 다른 악기라고 했다.)
그럼 왜 당대연주 바람이 불고 있는가. 사람들이 굉장히 오랫동안 같은 양식의 연주만을 들어왔기 때문에 식상할 때가 됐고, 이런 시점에서 '오래된 음악'이 오히려 '새로운 음악'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내가 이 기사를 쓰겠다고 했을 때, 현대악기와 옛 악기가 그러면 어떻게 다른 건지 직접 비교해 보라는 주문이 보도국 편집회의에서 나왔다고 한다. 어떤 작품이 적합한가 고민 끝에, 그리고 여러 사람을 괴롭힌 끝에,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현대 악기와 시대 악기 버전 두 가지로 구했다. 현대 악기 연주는 리히터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대규모 오케스트라 버전, 시대악기 연주는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피아노 대신 쳄발로를 사용하는 소규모 앙상블버전.
당연히 다르다. 소리도 다르고, 편성도 다르다. 리포트에서는 시간 제약 때문에 잠깐씩밖에 못 틀었지만, 그래도 차이를 '눈으로' '귀로' 구별할 수 있다. 리포트에는 그저 '음악동호회원'으로 소개됐지만, 사실은 전문가 급의 고음악 '애호가'인 인터뷰이 전상헌 씨는 아주 쉽게, 일반 관객의 입장에서 당대 연주공연의 매력을 설명해 달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대부분 소규모 공연장이라서 연주자와 더욱 친밀한 느낌을 가질 수 있고요, 자연스럽고 악기 소리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느낌이라 좋습니다."
최근 트레버피노크 내한공연을 열었던 LG아트센터 공연 기획자는 이 공연장에서 열리는 클래식 음악 공연 중에 고음악공연의 흥행 성적이 아주 좋다고 귀띔했다. 고음악 공연이 이를테면 '효자상품'이 되고 있는 것이다. 고음악 공연에는 유난히 '충성도 높은 팬'들이 많단다. 또 예전부터 음반을 통해 해외 거장들의 고음악 연주를 들어온 오디오 애호가들이 (오디오 애호가들은 유난히 소리에 민감한 사람들 아닌가. 그러니 섬세한 옛 악기의 소리에 더욱 매력을 느낄 법하다.) 이런 고음악 공연에 몰리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도 했다.
'고음악 열풍'에는 그 밑바닥을 들여다 보면 자연으로의 회귀, 대규모 산업사회나 획일화에 대한 반발 같은 흐름도 깔려 있다. 그러나 우선은 '오래된 것이라서 더 새로운' 아이러니가 가장 큰 이유인 듯 하다. 내가 기사를 '고음악 열풍은 단순한 복고가 아니라 새로운 소리, 새로운 음악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욕구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마무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기사는 몇차례나 8시 리포트 큐시트를 올라갔다 내려왔다 한 끝에, 휴일 8시 뉴스에 방영됐다. '당대 연주'나 '시대 악기 연주'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고음악'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는 상황에서, 아직은 생소한 '당대 연주' '시대악기 연주'라는 말이 짧은 방송 리포트에 등장하면 시청자들이 혼란스러울 것이라는 데스크의 조언에 따라, 이런 용어는 최대한 줄이고 그저 '고음악' 또는 '옛 음악'이라는 말로만 표현했다. 또 트레버 피노크나 아르농쿠르나 조르디 사발 같은 외국 이름도 일부러 쓰지 않았다.
방송 리포트는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뻔히 다 아는 것만 기사로 쓸 수도 없다. 아주 대중적이지만은 않은 소재를 기사로 다룰 때,나는 항상 고민한다. 이번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결과물은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지만,오랫동안 쓰고 싶었던 기사를 드디어 썼다는 데 의미를 두려 한다. 이렇게 '장황한' 후기는 기사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라고 이해해 주시기를. <2007년 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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