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중국 드라마 중 시대극이 아닌 현대극으로는 학창시절을 그려내는 드라마들이 인기가 좋은 편이다. 특히 대학입시 준비에 여념이 없는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풋풋한 첫사랑과 우정을 그려내는 드라마들이 많다. ‘치아문단순적소미호(致我们单纯的小美好. 아름다웠던 우리에게), ‘최호적아문(最好的我们. 가장 좋았던 우리)’, ‘아지희환니(我只喜欢你. 너만 좋아해)’ 등은 한국에서도 방영돼 인기를 얻었다.

 

‘치아문단순적소미호’를 맨 처음 보면서 나는 자꾸 한국 드라마 ‘응답하라(중국명은 请回答) 시리즈를 떠올렸다. 공부 잘하고 무뚝뚝한 남학생 장천, 성적은 안 좋지만 구김살 없이 밝은 성격의 여학생 천샤오시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서브 남주)’가 등장해 삼각 관계를 형성한다. 세 사람 다 친한 사이다. ‘치아문’의 남주인공은 훗날 의사가 되고, 서브 남주는 유명한 운동선수다. ‘응답하라 1994’와 ‘응답하라 1988’의 설정을 섞어 놓은 것 같다.

 

남주인공은 무심하고 무뚝뚝해 보이지만 사실은 여주인공을 티 안내고 챙겨주는 ‘츤데레’다. 서브 남주는 반면 여주인공에 대한 호감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남녀 주인공의 사이가 소원해졌을 때 여주인공과 급격히 가까워진다. 남주인공과 서브 남주가 여주인공을 두고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는 장면도 나온다. 역시 ‘응답하라 1994’와 비슷하다.

 

‘최호적아문’에서도 남주인공 위화이는 우등생이고, 여주인공 겅겅은 성적이 좋지 않아 고민하는 평범한 학생이다. 서브 남주 류싱허는 부잣집 아들에 능력도 있는 예술가 지망생이다. 위화이는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정 형편으로 꿈을 포기하면서 겅겅과 한동안 연락이 두절되는데, 성공한 서브 남주는 겅겅 곁을 계속 지키며 청혼까지 한다.

‘최호적아문’은 남주인공의 좌절을 현실적으로 그려냈고, 성인이 된 남녀주인공의 달콤한 연애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치아문’과는 느낌이 다르다. 하지만 공부 잘하고 능력 있는 남자, 성적은 안 좋지만 성격 좋은 여자의 학창시절 에피소드가 주요한 내용이라는 점은 ‘치아문’과도, ‘응답하라 1994’와도 비슷하다. 원작소설에는 없었던 서브 남주를 추가해 삼각관계를 만든 것도 전형적인 플롯이다.

 

‘최호적아문’보다는 ‘치아문단순적소미호’가 ‘응답하라’ 시리즈와 더 닮았다. 다만 ‘최호적아문’은 ‘응답하라 1988’이 중국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얻은 지 얼마 안 돼 방영되었고, 학창시절 풋풋한 첫사랑을 그려낸 드라마라는 공통점이 있어 ‘응답하라’와 자주 함께 언급되었다. 다만 이 드라마들의 제작진이 ‘응답하라’의 영향을 받아 이렇게 만들었는지, 아니면 우연히 비슷해진 것인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가장 최근에 방영된 ‘아지희환니’는 ‘응답하라’ 시리즈의 영향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아지희환니’는 남녀 주인공이 결혼한 상태로 등장했다가 과거 학창시절로 돌아가 이야기를 풀어낸다. ‘응답하라 1994’를 연상시키는 서술 방식이다. ‘응답하라 1994’에서는 결혼 이후를 연기한 배우들과 학창 시절을 연기한 배우들이 달라서, 과연 여주인공의 남편이 누구일까 추측하는 게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지만, ‘아지희환니’는 학창시절과 결혼 이후를 같은 배우들이 연기한다.

‘아지희환니’의 남주인공 옌모는 우등생이지만 친구가 없고 외롭게 지낸다. 여주인공 차오이에게 무심하고 때로는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느새 호감을 갖게 된다. 옌모는 속정은 깊지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는 매우 서투르다. 여주인공 차오이는 성적이 좋지 않은 평범한 학생이지만 성격이 좋다. 가정형편이 그리 넉넉지 않지만 가족간에 정이 깊다. 차오이의 쌍둥이 오빠는 동생과는 달리 공부를 아주 잘한다. ‘응답하라 1988’의 정환과 덕선, 그리고 덕선이네 가족을 떠올리게 한다.

 

‘아지희환니’에는 삼각 관계를 형성하는 서브 남주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차오이의 쌍둥이 오빠 관차오와 차오이의 절친한 친구 우이가 커플이 된다. 마치 ‘응답하라 1988’에서 덕선의 언니가 동생 친구와 맺어지는 것처럼. ‘응답하라 1988’이 여주인공 덕선이와 정환, 택이네 가족의 이야기를 꼼꼼하게 그려냈듯 ‘아지희환니’도 주인공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로맨스와 소소한 사연까지 담으면서, 가족애를 비중 있게 다룬다.

 

‘아지희환니’ 11회에는 아예 ‘응답하라 1988’이 등장한다. 결혼한 상태인 남녀주인공이 TV 방영 중인 ‘응답하라 1988’를 보다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이들은 ‘덕선이를 잡지 못하는 정환이를 보며, 나 같으면 이렇게 했을 텐데, 하고 대화를 나눈다. 이 드라마가 ‘응답하라’를 오마주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중국 네티즌들도 ‘아지희환니’와 ‘응답하라’를 종종 비교한다. ‘응답하라’에서 양 울음 소리로 코믹한 상황을 더 강조했던 것처럼 ‘아지희환니’도 재미있는 음향 효과를 활용했고, 운동화 에피소드, 혼잡한 버스 안에서 여주인공을 보호하려는 남주인공의 모습 등이 ‘응답하라’와 비슷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고 보면 ‘아지희환니’는 중국판 ‘응답하라’다. 주인공들의 학창시절이 2006년이니, ‘응답하라 2006(请回答 2006)’가 되려나.

 

그나저나 남주인공은 우등생, 여주인공은 열등생이라는 중국 드라마의 설정이 이제 좀 지겹다. 앞서 언급한 드라마들 외에도 ‘악작극지문(恶作剧之吻. 장난스런 키스), ‘하이생소묵(何以笙箫默. 마이 선샤인)’ ‘홀이금하(忽而今夏. 그 해 여름)’이 다 그랬다. ‘응답하라 1997’이나 ‘응답하라 1988’도 이런 설정이지만, 중국은 유난히 이런 드라마가 많다는 느낌이다.

 

여주인공은 대개 공부는 못해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로, 빼어난 지력과 능력을 지닌 남주인공은 다른 사람에게는 냉정하지만 여주인공에게만큼은 다정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여주인공은 종종 똑똑한 남주인공에게 도움을 받거나 의지하고, 아담한 키의 여주인공이 키 큰 남주인공에게 폭 안기는 장면이 ‘심쿵’ 장면으로 연출된다. 이렇게 비슷한 공식이 많은 드라마에서 반복된다.

 

남주인공은 대개 학교 졸업 후에도 뛰어난 능력으로 승승장구하며, 심각한 열등생이었던 여주인공은 다른 방면으로 길을 찾아 성공한다. ‘치아문’의 천샤오시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만화가가 되고, ‘최호적아문’의 겅겅과 ‘하이생소묵’의 여주인공 모셩은 사진작가가 되었다. ‘아지희환니’의 차오이는 방송국에서 일하고, 차오이의 단짝인 서브 여주 우이는 소설가로 성공한다. 그러고 보니 여성 캐릭터들은 대개 문화예술 관련 분야에 종사하게 되는 셈이다.

 

중국에는 왜 이런 드라마가 많은 걸까. 로맨스 드라마의 주 시청자인 보통 여성들이 원하는, 나에게 부족한 점을 다 메워주고 의지할 수 있는 능력남이면서 오직 나만 좋아해주는 이상형을 이런 식으로 보여주는 걸까. 어쩌면 남성에게는 공부 잘하고 학벌 좋고 능력 좋은 게 중요하지만, 여성에게는 공부보다도 착하고 성격 좋은 게 중요하다는 인식이 반영된 게 아닐까.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도 장래 희망을 물으면 남자어린이는 대통령이나 과학자를, 여자어린이는 현모양처를 얘기했던 시절이 떠오른다. 공부를 잘했던 남주인공은 사업가나 엔지니어, 변호사, 의사로 성공하고, 공부를 못했던 여주인공이 문화예술 분야에서 일하게 된다는 설정도 성별 적성과 직업에 대한 전형적 관점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남주인공은 우등생, 여주인공은 열등생인 중국 드라마가 너무 많다고 느낀 사람은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이런 드라마들이 현실성이 없다며, 한 중국 네티즌이 ‘감독과 작가들이 여성에게 편견이 있는 게 아니냐’고 쓴 글을 발견했다. 또 다른 중국인은 요즘 대부분의 드라마가 남자 우등생(学霸. ‘霸’는 으뜸이라는 뜻)이 여자 열등생(学渣. ‘渣는 찌꺼기라는 뜻)를 좋아하는 내용이라며, 여주인공이 우등생으로 나오는 드라마가 있는지 물어보는 글을 올렸다.

 

많은 네티즌들이 이 글에 답을 달았다. ‘니호구시광(你好旧时光. 안녕 우리들의 시간)'과 암련귤생회남(暗恋橘生淮南. 너를 부르는 시간)이란다. ‘최호적아문’과 배경이 같은 드라마다. 아직 못 봤는데,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진다.

 

*네이버 중국판 엔터트렌드에 기고한 글입니다.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