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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흥행 열풍과 함께 퀸의 리드 보컬 프레디 머큐리의 삶이 다시 조명되고 있습니다. 저는 앞서 쓴 취재파일에서 프레디 머큐리가 발레 공연에 출연했고, 뮤직비디오에 발레 시퀀스를 포함시킨 정도로 발레를 사랑했으며, 퀸의 음악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발레 작품이 많다는 내용을 소개했는데요, 이번 글에서는 이어서 프레디 머큐리와 오페라 얘기를 하려 합니다.

 프레디 머큐리는 발레뿐 아니라 오페라'광'이었습니다. 프레디가 오페라를 좋아했다는 얘기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도 나오고, 그가 작곡한 퀸의 음악에서도 오페라의 영향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하드록에 오페라와 아카펠라 등 전혀 다른 장르가 섞인 6분짜리 대곡이었죠. 이 노래가 실린 퀸의 네 번째 정규 앨범 이름은 'A Night at the Opera'였고요.

마리아 칼라스 '하바네라' 1963년 함부르크 공연실황, 카르멘 서곡 연주 이어 2분 10초부터 출처 : 워너클래식 유튜브채널


영화에는 프레디 머큐리의 취향과 감정선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오페라 아리아들이 삽입되었습니다. 그가 음반사와 다음 앨범에 대해 논의할 때 틀어주는 노래가 바로 마리아 칼라스가 부른, 오페라 '카르멘' 중의 '하바네라'입니다. 마리아 칼라스는 오페라의 전설로 통하는 소프라노이고, 오페라 '카르멘'은 속박을 싫어하고 감정에 솔직한 자유로운 영혼의 집시 여인, 즉 '보헤미안'의 이야기입니다. 프레디 머큐리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낼 뿐 아니라 '보헤미안 랩소디'와도 연결점이 있는 곡이죠. 음반사에서는 오페라를 누가 듣냐고 질색하지만 프레디 머큐리는 자신의 음악적 소신을 밀어붙입니다.

프레디 머큐리가 여자친구 메리에게 구혼할 때는 푸치니가 작곡한 오페라 '나비 부인'의 '어떤 개인 날'이 울려 퍼집니다. '어떤 개인 날'은 '나비부인'의 여주인공 초초상이 사랑하는 남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애틋하게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러나 나비부인의 기다림은 비극으로 끝나고 맙니다. 프레디와 메리의 결혼이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고하는 듯하죠.

왕자님 들어보세요. 몽세라 카바예 노래, 1975년 출처 : Noé Hernández Rodríguez 유튜브 채널  


프레디 머큐리가 메리와 결별한 후에도 이웃집에 살며 창가에서 전화를 거는 장면에서는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 중의 아리아 '들어보세요 왕자님'이 흘러나옵니다. '투란도트'는 자신에게 구혼하는 남자들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맞추지 못하면 모조리 죽여버리는 냉혹한 공주 이름인데요, 몰락한 왕국의 왕자 칼라프는 투란도트에게 반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구혼하려 하고, 왕자를 짝사랑해온 시녀 류가 제발 그러지 마시라고 눈물로 말립니다. 류가 왕자에게 애원하며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노래가 바로 '들어보세요 왕자님'입니다. 동성애인 자신과 메리가 함께 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메리를 여전히 사랑하는 프레디의 속마음을 드러내는 음악이기도 합니다.

영화에 삽입된 '들어보세요 왕자님'은 스페인 출신의 소프라노 몽세라 카바예(Montserrat Caballé)가 부른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프레디 머큐리의 삶에 큰 영향을 준 오페라 가수입니다. 몽세라 카바예는 1933년생으로 당시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던 소프라노였습니다. 오페라를 사랑했던 머큐리는 1983년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카바예가 출연한 베르디 오페라 '가면무도회'를 보고 곧바로 그녀를 숭배하게 되었습니다. 프레디 머큐리는 '몽세라'를 자기식으로 '몽시(Montsy)'로 부르며, 자신이 팬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히곤 했습니다. 1986년에는 스페인 방송에 출연해 몽세라 카바예를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고, 함께 공연하고 싶다고 얘기합니다.

머큐리의 '구애'가 통해서 드디어 두 사람은 만나게 되었습니다. 스페인 언론 엘 파이스는 '프레디 머큐리와 몽세라 카바예는 어떻게 음악 역사를 만들었나'(2018년 10월 8일) 기사에서 두 사람의 첫 만남을 자세히 묘사합니다. 1987년 초, 두 사람은 몽세라 카바예의 고향, 바르셀로나의 호텔 리츠에서 처음으로 만납니다. 프레디 머큐리는 이날 피아노에 앉아서 그와 마이크 모런이 함께 작곡한 "Exercises in Free Love'를 즉흥적으로 연주했습니다. 머큐리는 몽세라 카바예가 함께 노래하는 데 동의한다면 그녀가 부르게 될 부분을 팔세토(고음을 내는 가성 창법)로 불러서 들려줬습니다. (머큐리의 팔세토는 놀랍습니다. 이 노래에 가사를 새로 붙여 카바예가 함께 부른 'Ensueño(꿈)'가 이후 '바르셀로나' 앨범에 실리게 됩니다.)

 "프레디가 피아노에 앉아서 즉흥연주를 시작했을 때, 진정한 음악가가 지금 내 앞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몽세라 카바예는 바로 프레디 머큐리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첫 만남의 인상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카바예는 싱글뿐 아니라 앨범을 함께 내자는 데 동의합니다. 두 사람은 함께 발매할 앨범의 타이틀 곡으로 먼저 '바르셀로나'를 녹음하기로 했습니다. '바르셀로나'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주제가로 쓰일 곡으로, 소프라노의 목소리와 어우러져 오페라 적인 느낌이 납니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프레디 머큐리는 평소와는 달리 턱시도를 점잖게 빼입고 카바예와 함께 엄숙하게 등장해 노래합니다.

두 사람의 목소리와 활동해온 장르가 너무 달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느낌이 서로 통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당시 카바예의 공연 스케줄이 너무 빡빡해서 머큐리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자신이 소프라노 파트를 팔세토로 녹음한 '가이드 보컬' 테이프를 카바예에게 보내줬다고 합니다.

프레디의 마지막 앨범이 된 '바르셀로나' 앨범은 싱글 녹음 이후 18개월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발표됐는데, 두 사람의 스케줄을 맞추기 힘들어서, 그리고 머큐리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해서였습니다. 프레디 머큐리는 몽세라 카바예에게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고 털어놓았고, 카바예는 비밀을 지켰습니다. 머큐리의 병은 점점 깊어졌지만 두 사람은 종종 함께 노래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한 공연 중 가장 유명한 것이 1987년 5월 스페인의 이비자 페스티벌 '쿠 나이트클럽'에서 열린 '바르셀로나'의 첫 라이브 무대입니다. 프레디는 카바예에게 '내가 당신을 록커로 만들었네요' 하고 농담하곤 했습니다.

 1987년 '바르셀로나' 오리지널 데이비드 말렛 비디오 출처 : 프레디 머큐리 솔로 유튜브채널 


프레디 머큐리의 마지막 라이브 무대 역시 몽세라 카바예와 함께 했습니다. 프레디 머큐리는 1988년 10월 8일, 바르셀로나 'La Nit(카탈로니아 어로 '저녁'이라는 뜻)' 야외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바르셀로나' 등을 불렀습니다. 1988년 하계 올림픽 개최도시였던 서울에서 공식 올림픽 기(Flag)가 출발해 다음 올림픽 개최지인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는 걸 기념하기 위한 공연이었습니다. 투병 중이었던 프레디 머큐리는 수척한 모습이지만, 열정적인 무대로 객석을 뒤흔들었습니다.

 1988년 '바르셀로나' 라 니트 페스티벌 공연, 프레디의 마지막 라이브 공연  출처 : 프레디 머큐리 솔로 유튜브 채널  


 "우리는 뜻깊은 노래들을 함께 만들 기회를 가졌어요. 난 우리가 정말 특별한 것을 창조했다는 사실에 감동했어요. 곧 떠나게 될 것이고, 자신이 곧 떠날 것을 아는 사람과 함께 노래하고 그의 마지막 작별을 함께 할 기회를 얻는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죠." (카바예)

몽세라 카바예는 프레디 머큐리 말년의 예술적 동반자이자 특별한 친구였습니다. 머큐리는 자신보다 13살 많은 카바예를 존경했고, 카바예는 머큐리의 단순 담백한 성격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의 '프레디 머큐리: 위대한 수수께끼' 기사(2012년 9월 17일)를 보면 두 사람이 나눈 음악적 교감과 우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카바예는 머큐리가 자유자재로 고음을 내지르지만 원래 목소리는 바리톤이라며 바리톤 곡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제가 그에게 말했어요. 우리 바리톤과 소프라노 듀엣을 한 번 해봐요" (카바예)
 "안돼요. 내 팬들은 나를 록가수로만 알고 있어요. 내가 바리톤을 하면 누구 목소리인지 알아차리지 못할 거예요." (머큐리)

이전에도 오페라 팬이었던 머큐리는 말년에 더욱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카바예는 머큐리가 살아있었다면 클래식 음악에 더욱 천착했을 거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좀 더 클래식한 뭔가를 함께 하자고 얘기했었죠. '오페라의 유령(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오페라 스타일로 작곡한 유명 뮤지컬)'을 함께 녹음하자는 얘기도 했어요. 프레디는 '오페라의 유령'을 굉장히 좋아했거든요."

 머큐리의 병이 깊어져 침대를 떠나지 못하게 됐을 때, 카바예는 그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오페라의 유령' 에 나오는 노래를 녹음해서 전화로 들려줬습니다.

 "나는 그에게 전화해서 스피커를 전화기 가까이 대고 틀어줬어요. 그는 굉장히 행복해했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했죠. '고마워요, 몽시. 난 이걸 정말 듣고 싶었어요.' 그게 내가 그와 한 마지막 대화였어요."

 프레디 머큐리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막 8개월을 앞둔 1991년 11월, 4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날 그는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머큐리가 에이즈로 세상을 떠났기에, 머큐리와 카바예가 함께 부른 '바르셀로나'는 올림픽 '공식' 주제가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스페인 출신 테너 호세 카레라스와 사라 브라이트만('오페라의 유령' 초연 주역으로 유명한 영국의 뮤지컬 배우)이 공식 주제가 '영원한 친구(Amigo Para Siempre)'를 함께 불렀습니다. '바르셀로나'는 그러나 올림픽 개막식이 시작될 때 방송되었고, 영국 BBC는 '바르셀로나'를 올림픽 중계방송의 타이틀 음악으로 썼습니다.

 몽세라 카바예는 계속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99년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열린 바르셀로나의 스타디움에서 카바예는 다시 한번 '바르셀로나'를 불렀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프레디 머큐리는 스크린으로 함께 했습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개봉을 앞두고 있던 올해 10월 6일, 몽세라 카바예는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50년간 90개 이상의 역할을 맡았고, 4천 회 이상 오페라 무대에 섰던, 세기의 소프라노였습니다. 몽세라 카바예의 부고를 알린 전 세계 언론의 기사 제목에는 '프레디 머큐리와 함께 노래했다'는 사실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오페라를 사랑했던 프레디 머큐리와 소프라노 몽세라 카바예. 두 사람은 지금쯤 다시 만나 함께 노래하고 있을까요. 아무래도 '바르셀로나'를 다시 한번 들어봐야겠습니다.           

*SBS 뉴스웹사이트 취재파일로 썼습니다. 지난해 12월 쓴 글을 게을러서 이제야 올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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