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드라마는 허구다. 그러나 시대적 배경이 있는 경우, 실제 역사와 실존 인물들 사이에 허구를 더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드라마가 역사를 왜곡한다는 불만도 나오지만, 드라마 덕분에 몰랐던 역사와 인물을 새로 알게 되기도 한다. 중국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위장자’(위 사진) 1930년대 중국 상하이를 배경으로 항일 첩보전에 뛰어든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2차 국공 합작으로 국민당과 공산당이 서로 견제하면서도 항일을 위해 협력하던 시기, 상하이 명문가인 밍(
)씨 집안 4남매는 각각 가족까지 속이며 이중 삼중으로 신분을 위장해 첩보전을 벌인다. 이 중 막내아들 밍타이는 홍콩 유학 가는 길 비행기에서 만난 국민당 군 간부에게 납치돼 국민당 군사학교에서 첩보원 훈련을 받는다.

 
드라마에는 국민당의 첩보전을 총괄하는 군통, 군통의 수장인 다이 국장이 언급된다. ‘군통은 국민당의 특무 정보기관으로,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의 준말이다. 드라마에서는 다이 국장이 직접 등장하진 않고 다른 사람이 언급하는 이름으로만 나오지만, 드라마의 원작소설인 첩전상해탄에서는 밍타이가 비행기에서 만난 국민당 군 간부가 바로 다이 국장이다. 하지만 다이 국장의 비중이 그리 크진 않았기에 당시엔 무심히 넘겼다.

 
얼마 후, 나는 칭다오의 손꼽히는 관광지인 팔대관에 놀러갔다가 다이 국장을 다시 만났다. ‘팔대관은 아름다운 해변과 녹음이 우거진 산책로, 유럽식 건물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20세기 초부터 조성된 지역으로 칭다오에 거주했던 유럽인들과 중국인 유명 인사들의 별장이 많다. 가장 유명한 것이 장제스의 별장이었던 화석루인데 호접루(
蝴蝶楼), 나비의 집’(아래 사진)이라는 또 다른 명소도 있다


 
나비의 집이라 해서, 처음엔 나비 표본을 모아 놓은 박물관 비슷한 곳이려니 했다. 알고 보니 1930~40년대 중국 영화계를 풍미했던 전설적 여배우 후디에(胡蝶)를 기념하는 영화박물관이었다. 1935년 후디에는 칭다오에서 겁후도화(劫后桃花)’라는 영화의 주연을 맡았는데 바로 이 집이 주요 촬영지였다. 이름을 읽으면 나비를 뜻하는 단어 후디에(蝴蝶)’와 똑같아 나비로 불렸던 배우를 기념하기 위해, 박물관 이름도 나비의 집이 되었다. 곳곳에 나비 조형물이 설치된 가운데 후디에의 일생을 소개하고 있었다.       

 전시물에는 
상하이 출신의 후디에가 1920년대말 데뷔해 배우로 성공한 후 판요우셩(藩有声)이라는 사업가와 결혼했고, 국민당 군통의 다이리(戴笠)’와 강제 동거한 적이 있으며, 1949년 홍콩으로 이주해 계속 활동하다 숨졌다고 쓰여 있었다. ‘위장자다이 국장은 실존 인물이었던 것이다! 후디에와 동거했던 다이리가 바로 그였다. 
 


 
다이리의 본명은 다이춘펑(
戴春). 장제스를 만나 평생 이 사람의 삿갓()이 되겠다며 다이리(戴笠) 개명했다 한다. 그는 40만의 국민당 비밀경찰을 지휘한 첩보전의 귀재였다. 교묘한 공작으로 장제스의 정적들을 처단했고, 중국 공산당과 일본에 맞서 특수 공작을 펼쳤으며, 중일 전쟁의 승리에 큰 공을 세웠다. 중일 전쟁이 끝나자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던 다이리는 중국 각지에서 공산당 토벌을 위한 정보 수집에 앞장섰으나, 1946년 갑작스런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후퇴하면서 다이리가 살아있었으면 대륙을 잃지 않았을 텐데라고 탄식했고, 저우언라이는 다이리의 죽음으로 중국 공산당 혁명을 10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다이리와 후디에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국민당 총통대리를 지냈던 리중런((
李中仁)은 장제스와 결별하고 미국에 망명했다가 1965년 중국 대륙으로 귀국했다. 리중런은 공산당과 한 때 맞섰던 상대지만, 1938타이얼좡(台児庄) 대첩의 총사령관으로 중일전쟁 승리에 큰 공을 세운 항일영웅이기도 했다. 중국은 그를 예우를 갖춰 맞았고, 리중런은 함께 귀국했던 아내가 사망하자 1966 76세의 나이에 후요우송(胡友松)이라는 27세의 간호사와 결혼했다.
  
 
후요우송의 생모가 바로 후디에였다. (아래 사진. 후디에와 후요우송) 1939년 상하이에서 태어난 후요우송은 어머니 후디에의 성을 따랐고, 후디에는 딸에게 너는 아버지가 없다고 했다. 그녀는 6살부터 생모와 떨어져 양모에게 맡겨져 자랐다. 다이리가 후디에의 의사에 반해 강제로 애인 삼았다는 게 사실인지, 실제로 두 사람 사이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하지만 후요우송의 아버지가 다이리일 것이라는 추측은 정설이 되었다.



 
1969
년 리중런이 사망한 후 그녀는 리중런의 유산과 유품을 중국 정부와 역사박물관 등에 기증했다. 그녀의 여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문화혁명 때 우한으로 하방돼 고초를 겪기도 했고, 한 차례 재혼은 실패로 끝났다. 어머니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홍콩으로 떠났던 후디에는 영화계에 복귀해 1960년 도쿄 아시아 영화제에서 주연상을 받는 등 여전히 명성을 누리다 은퇴하고 1975년 캐나다로 이주했다. 1989년 후디에가 사망하자 영화계는 나비가 훨훨 날아 떠났다며 추모했지만, 정작 딸은 이 소식을 몇 년 후에야 들었다. 후요우송은 1995년 불교에 입문해 묘혜거사라는 법명을 얻었다. 그녀는 타이얼좡 리중런 기념관 명예관장을 지내다 2008년 세상을 떠났다. 사연 많은 일생이었다

 
며칠 전 중국 드라마 일촉즉발’(위 사진)에서 다시 다이리와 후디에를 만났다. ‘일촉즉발위장자와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쌍둥이 형제의 기구한 삶과 항일 투쟁을 그려냈다. 인기 배우 종한량이 쌍둥이 12역을 해서 더욱 화제가 된 드라마다. 이 드라마에서도 국민당 첩보전의 총책임자로 다이 국장이 언급돼 내 귀가 번쩍 뜨였다.

 
일촉즉발은 후디에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내용이지만, 참 공교롭게도 나비(후디에) 그림이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한다. 나는 딱 한 줄 언급된 다이 국장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나비 그림이 등장할 때마다 후디에를 떠올린다. 드라마로 역사를, 역사로 드라마를 다시 본다.  


*'네이버 중국'에 실린 글입니다.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