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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락송은 나에게 중국 사회를 이해하게 하는 거울 같은 중국 드라마이다. 이전에 쓴 글에서도 여러 번 언급한 바 있지만, 이 드라마는 환락송이라는 이름의 아파트 같은 동 22층에 사는 여성들의 일과 사랑 이야기이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여성들은 각각 우여곡절 끝에 자신들의 사랑을 찾아가게 되는데, 이 중에서도 가장 내 관심을 끌었던 사람은 이른바 푸얼다이’(富二代.재벌 2와 유사한 느낌의 표현)로 나오는 취샤오샤오라는 인물이었다.

 
취샤오샤오는 엄청난 부를 일군 부모 밑에서 큰 귀한 딸이다. 공부에 소질은 없어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미국 유학 길에 올랐고, 아버지는 마약만 하지 말라는 조건 하에 유학 가는 딸에게 거액의 용돈을 안겨줬다. 걱정 없이 돈을 펑펑 쓰고 미국에서 놀다 돌아온 취샤오샤오는 학업엔 소질이 없으나 눈치가 빠르고 수완이 좋아 직접 회사 경영에 나선다. 배다른 오빠와 후계자 경쟁을 하는 것이다.

 
취샤오샤오에게는 젊은 나이에 이미 중국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다 깨친 듯한 노련함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어울린 비슷한 푸얼다이 부자 친구들과 어울리며 어디에 투자하면 좋을지 논하기도 하고, 사업상 사람을 만날 때는 밀고 당기고, 필요하면 비위도 잘 맞추는 솜씨가 뛰어나다. 도움이 필요할 때 누구를 찾아야 하는지, 어떤 끈을 잡아야 중요한 사람과 연결되는지도 잘 안다. 어린 시절부터 사업하는 부모를 보고 자랐기에 생긴 감각이랄까.

 

그런데 취샤오샤오가 잘 생긴 의사 자오치핑에게 반했다. (위 사진. 자오치핑 역의 배우는 '랑야방'의 정왕 역으로 나왔던 배우 왕카이다. 정말 잘 생겼다!) 자오치핑은 처음엔 취샤오샤오에게 관심이 없다가, 점점 그녀의 거침없는 솔직함과 자유분방함에 매력을 느끼고 마음을 열게 된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연인 관계가 되고 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취샤오샤오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니, 이는 자신이 자오치핑에 비해 무식하고 교양이 없다는 것이다.

 
자오치핑은 학창 시절엔 우등생으로 살았고,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고, 다방면에 교양이 풍부하다.  어머니는 교수, 아버지는 엔지니어로 큰 부자는 아니지만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다. 사실 드라마 초반에는 자오치핑이 취샤오샤오의 아파트 같은 층 친구인 관지얼과 우연히 만나는 장면이 등장해, 혹시 이 두 사람이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한다. 관지얼 역시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클래식 음악 애호가로, 두 사람이 잘 어울릴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자오치핑은 교제 초기에 취샤오샤오에게 클래식 음악회에 같이 가자 권유하지만, 취샤오샤오는 흥미 없다며 거절하고, 그는 혼자 음악회에 간다. 바로 그 음악회장의 음반 판매점에서 자오치핑과 관지얼이 마주친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한 장밖에 안 남은 브람스 CD를 동시에 사려 했던 인연으로 클래식 음악에 대한 대화를 잠깐 나누게 된다. 자오치핑은 브람스 음악에 대한 견해를 이야기하며 관지얼이 품위가 있다고 칭찬하고, 관지얼은 자오치핑에게 첫눈에 반한다. 잘 생겼을 뿐 아니라 클래식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고 부드러운 남자라니. 관지얼에게 이상적인 남성상이 아닐 수 없다. (아래 사진, 관지얼의 넋나간 듯한 표정을 보라.)



 
이후 관지얼은 자오치핑이 취샤오샤오의 남자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오치핑과 취샤오샤오가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라고 생각한다. 관지얼은 취샤오샤오와 친구 사이이긴 하지만, 클래식 음악이나 문학에는 전혀 관심도 없고 무식한 취샤오샤오가 어떻게 자오치핑과 어울리는 짝이 될 수 있는지 의아하게 여긴다. 그리고 실제로 이 문제가 취샤오샤오와 자오치핑 두 사람의 관계에 장애물이 된다.

 
드라마에는 다른 사람들이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을 이야기하는 줄 모르고 엉뚱한 농담을 한다든지, 음악회에 가서 계속 졸다 나오고서도 연주단체를 잘 아는 척하려다 이름을 잘못 말한다든지, 이렇게 취샤오샤오의 교양 없음을 드러내는 에피소드들이 종종 등장한다. 무식한 부잣집 딸과, 부자는 아니지만 똑똑한 남자의 연애. 어찌 보면 참 전형적인 상황이다.

 취샤오샤오의 돈 많은 친구들은 자오치핑이 자신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며 두 사람의 교제를 말린다. 이들은 자오치핑이 돈은 없는데 자존심은 센 사람이라며 두 사람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을 거라고 걱정한다. 취샤오샤오와 친구들이 종종 가는 클럽의 술값을 알게 된 자오치핑이 깜짝 놀라는 장면도 나온다.

 그럭저럭 지속되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결정적인 두 차례 위기에 무너진다. 그 첫 번째는 취샤오샤오가 갑자기 출장 차 상하이를 찾아온 자오치핑의 어머니와 만나게 되면서 시작된다. 취샤오샤오는 자오치핑이 교수인 어머니와 함께 어려운 한자 맞추기 게임을 하며 즐거워하는 걸 보며 자신의 무식함을 다시 한번 절감한다. 취샤오샤오는 자오치핑과 어머니가 자신을 무식하다고 비웃지 않을까 걱정한 나머지, 자오치핑과 헤어질 때 몰래 그의 전화기를 켜두고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는다. 어머니와 대화 도중 취샤오샤오가 대화를 엿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자오치핑은 불같이 화를 내고, 취샤오샤오는 내가 무식하다고 싫어할까 봐 겁이 났다고 변명한다.

 
두 번째 위기. 취샤오샤오는 자오치핑을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그의 차에 아주 좋은 카 오디오 시스템을 장착해주기로 한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자오치핑을 위한 선물이다. 취샤오샤오는 자오치핑의 차를 빌렸다가 수리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친구가 운영하는 튜닝숍에 맡겨 아주 비싼 오디오를 달아달라고 한다. 이 사실을 몰랐던 자오치핑은 취샤오샤오가 출장을 간 사이 예정보다 일찍 차를 찾으러 직접 튜닝숍에 찾아가고, 차를 단순히 수리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자오치핑은 자신의 차 값보다도 훨씬 비싼 수리 견적-오디오 값이 포함됐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에 경악한다.  

평소 두 사람의 관계가 못마땅했던 취샤오샤오의 친구는 여자친구에게 빌붙어 사는 기생 오라비 같은 놈이라고 자오치핑을 모욕하다 몸싸움까지 벌인다. 이날 밤 자오치핑은 괴로워하며 술을 마시고, 강변에 차를 세운 채 어마어마하게 큰 볼륨으로 오디오를 틀어놓고 음악을 듣다가 취샤오샤오에게 전화해 이별을 통보한다. 취샤오샤오도 두 사람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별을 받아들인다. 자오치핑은 이미 차에 설치한 오디오 값은 월부로 갚겠다고 한다. 자오치핑은 좋아하지만, 취샤오샤오는 좋아하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클래식 음악이, 두 사람의 관계가 깨지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드라마에서 취샤오샤오와 자오치핑이 서로 다른 음악적 취향으로 교제에 어려움을 겪는다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바로 또 다른 주인공인 관지얼과 그의 남자친구 시에통이다. 시에통은 시즌 2에 새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위 사진) 관지얼은 상당 기간 남몰래 자오치핑을 연모하면서 취샤오샤오보다는 자기가 자오치핑과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무명 록밴드 보컬인 시에통의 공연을 클럽에서 보게 된다. 관지얼은 시에통의 노래에 관심을 갖고, 두 사람은 공연이 끝난 후 양꼬치를 함께 먹으며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시에통은 관지얼이 자신의 노래가 좋다고 하자, ‘구식에 별 볼 일 없는 노래라며 자조하고, 관지얼은 그렇지 않다며 시에통의 노래에 대한 감상을 자세히 이야기한다. 편곡은 약간 구식이지만, 가사와 음악의 어울림이 아주 좋다, 전반부는 답답하고 울적한 느낌이 지배하지만, 후반부 고조되는 부분에서는 모든 것이 역전되어, 마치 갇혀있던 울타리를 박차고 솟아오르는 듯한 느낌이다, 블랙 메탈에서 영향을 받은 것 아니냐…….

시에통은 자신의 음악에 대해 열정적으로 얘기하는 관지얼에게 갑작스런 호감을 느끼며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본다.   
 
너 음악 좀 들을 줄 아는구나?”

. 사실 나는 클래식 음악을 더 좋아해. 어릴 때 바이올린 배운 적 있어. 하지만 그만뒀어. 완전히 황폐해졌지.”

음악은 황폐해진다는 게 없어. 영원히 네 핏속에 남아있는 거라고

 
두 사람은 계속해서 음악의 기원과 본질 등등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이어간다. 그러다 관지얼이 의식감’(이걸 뭐라 번역해야 할지 애매한데, ‘의식에 쓰이는 음악을 말하는 듯)이 가장 뛰어난 음악이 뭐라고 생각해?’ 라고 물었더니 시에통이 클래식 음악가 이름과 곡명을 대고, 관지얼은 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더 열정적으로 대화에 몰두한다.    

시에통: “브루크너!”

관지얼: “테 데움(종교음악의 일종. ‘테 데움을 중국에서는 신의 은혜에 감사하는 노래라는 뜻으로 감은곡이라 부른다)?!”

시에통:“모차르트, 브람스, 말러 레퀴엠. 9번 교향곡 제 1악장. 선현들이 길을 밝게 비춰주지(음악사의 선현들이 현재 음악도가 가는 길을 안내해 준다는 뜻)“

관지얼: “의식감, 주제감이 강한 음악들이 대부분 다 교향악이야. 교향악은 마음을 모아 협동해야 하고고된 수련 과정이 필요해. 지휘하는 사람이 있어야 해. 네가 너희 밴드 지휘하는 것과 비슷해.”

시에통: “내가? 내가 지휘를 한다고?”

관지얼: “그럼!”

이 장면에서 두 사람 사이에는 스파크가 일어나는 것 같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서 자신과 음악적 취향이 통한다는 뜻밖의 매력을 찾아낸 것이다. 시에통은 록음악도 들을 줄 아는관지얼에게 매력을 느낀다. 관지얼 입장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안 그래도 시에통의 음악에 끌렸던 관지얼은 시에통이 클래식 음악에도 조예가 있는 걸 알고 더욱 큰 호감을 갖게 된다. 클래식 음악이 두 사람을 이어주는 강력한 촉매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관지얼은 몇 년간 변변한 곡 하나 쓰지 못해 밴드 해체 위기에 처했던 시에통에게 창작의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그는 새로운 열정으로 작곡에 몰두해 근사한 신곡을 완성한다. 전형적인 예술가와 뮤즈의 관계이기도 하다. 관지얼은 이제 자오치핑을 잊고 브루크너와 모차르트, 브람스, 말러를 선현으로 부르는 록밴드 리더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음악적 취향이 뜻밖에도비슷한 두 사람의 결합이다.  

환락송이란 드라마 제목은 주인공들이 사는 아파트 이름이면서, 베토벤의 교향곡 합창에 등장하는 환희의 송가를 이르는 말이다. 클래식 음악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아서 그런지, 이 드라마에는 클래식 음악과 관련된 상황이 자주 등장하고, 개인의 음악적 취향이 등장인물간의 관계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종종 사회학자 부르디외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생성과 관련해 논한 4가지의 자본을 떠올리곤 했다. 바로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상징적 자본이다. ‘경제적 자본은 말 그대로 경제적 부를 가리키는 것이고, 문화적 자본은 취미나 예술에 관한 감흥, 교양, 지식 등을, 사회적 자본은 인간관계나 인맥 등을 가리킨다상징적 자본은 이 세 가지 자본에 기초해 얻어지는 사회적 명예나 권위 등을 말한다.  


부르디외는 특히 문화적 자본의 하나인 음악에 대한 개인의 기호가 그 사람의 계급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종종 그 사람의 지적 수준을 과시하는 좋은 기회가 된다. 만약 어떤 두 사람이 음악에 대한 기호가 비슷하다면, 이들은 서로 지적 수준이 통하는 비슷한 계급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취샤오샤오는 경제적 자본은 있으되 문화적 자본은 부족한 부유층, 자오치핑은 경제적 자본은 좀 부족하나 문화적 자본은 풍부한 지식인 계급인 셈이다. 이 드라마에는 취샤오샤오를 비롯한 부유한 등장인물이, 능력 있는 친구와 영향력 있는 인사를 동원해 쉽게 문제를 해결하는 상황이 종종 등장한다. 중국식 꽌시의 중요성과 함께, 경제적 자본뿐 아니라 사회적 자본 역시 풍부한 부유층의 상황을 보여주는 듯하다. 시즌 2 말미에서는 취샤오샤오와 자오치핑이 차이를 극복하고 다시 이어지게 되는데 이 두 사람의 혼인이 이뤄진다면 문화적 자본과 경제적 자본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겠다. 

중국은 중국식 사회주의를 내세운 공산당이 통치하는 국가다. 하지만 중국에 살면서 내가 느낀 것은 중국이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국가이기도 하다는 점이었다. 그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중국의 자본주의적 풍경은 내가 한국에서 봤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과연 중국에서 자본주의적인 계급 형성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는 것을, 드라마를 보면서도 느낄 수 있었다.

환락송은 시즌 1 2가 모두 한국에서도 케이블 TV를 통해 방영되었다. 국내 방영분을 본 적이 없어 등장인물의 이름을 어떻게 표기했는지, 대사를 어떻게 번역했는지 모른다. 혹시 내가 쓴 글에 이름 표기나 번역이 어색한 부분이 있더라도 양해해 주시길. 그나저나 내가 환락송드라마 보고 쓴 글이 여러 편 쌓였다. 환락송은 자본주의 고도화, 여전히 강력한 전근대적 관습, 개방적인 연애관과 보수적인 결혼관의 충돌 등등, 온갖 모순 속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중국의 오늘을 보여주는 거울 같은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환락송을 보면 할 이야기가 많아진다. 앞으로 또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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