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미투’가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다. 자고 나면 터져 나오는 새로운 폭로. 새로 ‘리스트’에 올라가는 유명 인사들. 많은 이들이 은밀하게 저질러온, 입에 담기도 싫은 성폭력 실상이 드러나는 걸 보고 있자니정말 참담하다. 내가 일 때문에 직접 만나기도 했던 사람들이 포함돼 있어서 더욱 그렇다.
‘발성연습’을 핑계로 온갖 추잡한 짓을 저질렀다는 이윤택. 나는 오래 전 이윤택이 연출한 공연 연습을 보러 갔다가 그가 직접 ‘발성연습’을 거론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리허설을 진행되던 중이었는데, 그가 주연 여배우를 가리키며 ‘쟤는 내가 발성부터 싹 뜯어고쳤다’며 자랑했다. ‘쟤 엄청 힘들었을 거야, 나랑 작업하면 처음부터 싹 뜯어고치니까’ 하는데, 물론 그 때는 그의 ‘발성연습’이 그런 의미인 줄 몰랐다. 지금도 그의 자랑하던 표정과 말투가 기억 난다. 내가 그 ‘미친 놈’을 만났었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쫙 돋는다.
수많은 ‘미투’가 쏟아져 나오는 요즘, 나는 우울하다. 사회 초년병 시절부터 내가 겪었던 성희롱이나 성추행이 자꾸 떠오른다. 나는 한국사회에서, 어린이가 아니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성희롱이나 성추행 피해를 살면서 한 번도 당해 보지 않은 여성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혼잡한 전철과 버스 안에서 몸을 만지는 성추행범의 손길도 징그러웠지만, 내가 아는 사람들한테 피해를 입을 때가 더 괴롭고 힘들었다.
처음에는 수치스럽지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혹은 민감하게 반응하면 사회생활 모르는 서투른 사람 취급 받을까 봐, 유야무야 그냥 넘어간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점점 내 ‘대처’도 발전해갔다. 그 자리에서 벌컥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면서 강력하게 항의하기도 하고, 표정 바꿔 정색하고 싫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싫은 자리에 억지로 가야 하는 경우는 점점 줄어들었다. 뭔가 낌새가 이상하면 아예 미리 자리를 피해 버리는 ‘기술’도 익혔다. 내가 점점 '윗사람'이 되어갔고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도 예전과는 달라져서, ‘상대적으로 가벼운’ 남녀차별적 언사는 지금도 가끔 접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심각한 성희롱이나 성추행은 당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꽤 오래 ‘안전하게’ 지내왔다. 그리고 ‘서투르게 대처했던’ 예전의 기억은 묻어버렸다.
그런데 그렇게 묻어버렸다고, 잊어버렸다고 여겼던 예전 기억들이 요즘 자꾸 다시 소환된다. 그 때 왜 좀 더 세게 나가지 못했을까. 욕 한 번 시원하게 해 줬어야 하는데, 왜 나는 바보같이 그 때 당하기만 했을까. 관계를 생각해서 덮고 넘어갈 게 아니라 뺨이라도 한 대 쳐서 정신차리게 했어야 하는데. 그 사람은 나 말고 또 딴 사람에게도 상처를 줬을 텐데. 주변 사람들과 얘기해 보니, 요즘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들 우울하단다. 나도 이런데, 지금 ‘미투’의 당사자들은 그 동안 얼마나 괴롭고 참담했을지 상상도 못하겠다.
사실 나는 요즘 이윤택이니 조민기니, 폭로되는 실상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사람들이 문화계에서만 성폭력이 심각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부작용’이 있을까 봐 걱정이다. 그리고 일부 매체들은 벌써부터 신나게 ‘장사’를 하는 듯해서 꺼림칙하다. 성폭력의 구체적인 정황을 지나치게 강조한 기사가 쏟아지는 상황이 너무나 불편하다.
물론 도제식 관계가 형성되고, 잘 나가는 예술가에게 권력이 몰리고, 바닥이 좁고, 예술가의 일탈에 관대했던 특수성 때문에 문화계의 성폭력이 딴 곳보다 심각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문화계 아니라도 많은 여성들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성폭력을 겪는다. 특히 여성이 소수인 곳이라면, 여성이 다수라도 지위가 낮은 곳이라면, 권위적 문화가 지배적인 집단이라면, ‘성폭력 안전 지대’는 없다고 봐도 된다.
예전에 종종 갑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을을 성희롱해 왔던 사람이 ‘내 딸이 취직한 회사에서 성희롱을 당했다'’며 개탄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아마 최근의 ‘미투’를 보면서 ‘참 미친 놈들이네’ 하고 개탄하고 있을 것 같다. 이윤택도 별 문제라는 의식 없이 성폭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죄질’은 다르나 ‘나보다 지위가 낮은, 혹은 힘이 없는 이성에게 이렇게 해도 된다’고 여겼을 것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성폭력은 ‘소수의 미친 놈’만 저지르는 게 아니다. 성차별적 문화 속에 성폭력의 씨앗이 뿌려지고 자란다. 충격적인 성 추문에만 집중해서 이번 파문이 ‘예술 하는 놈들 다 썩었다’고 욕하고 끝나게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번 파문이 뿌리 깊은 일상 속의 성폭력, 성차별적 문화를 반성하고 고쳐나가는 계기가 되기를 정말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