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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림부에서 1년 동안 무상으로 제공받을 수 있다면 다음 중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1. 과일 2. 채소 3. 망고
이 질문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셨는지? 아. 망고도 과일인데 왜 따로 분류해 놓았냐고? 빙고! 그럼 다음 질문은 어디가 이상한지 살펴보시길.
“문화가 있는 날, 우리 동네 공연장에서 듣고 싶은 소규모 클래식 공연의 장르는 무엇인가?”
1. 기악 2. 성악 3. 타악
이 질문에도 비슷한 오류가 있다. 망고가 과일에 속하는 것처럼, 타악 역시 기악의 한 장르다. 그런데도 굳이 타악을 별도의 문항으로 만들었다. 망고가 비교적 희귀한 과일인 것처럼 타악 역시 쉽게 접하기 힘든 장르다. 이 문제에 대해 이미 적절한 지적을 한 바 있는 피아니스트 조은아 교수의 글(http://www.hankookilbo.com/v/6b0699db710f4610bce36d360f76c64d)에 따르면, ‘한 해 입학한 음대생 120명 중 단 2명만 타악 전공자일 정도’다.
이 이상한 질문은 문화융성위원회가 주최하는 ‘문화가 있는 날 작은음악회’의 수요조사 설문이었다.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은 ‘문화가 있는 날’로, 공공예산 지원을 받아 전국 각지의 공연장에서 무료 클래식 음악회가 열린다.)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가 공연장 관계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이 수요조사의 결과는 이랬다. 기악 독주 10% 기악 앙상블 29% 성악 독창 11% 성악 합창 19% 타악 독주 6% 타악 앙상블 25%.
문화가 있는 날 작은음악회를 기획하는 사람들은 고민에 빠졌다. 이 수요조사 결과에 따라 전체 음악회의 31퍼센트를 타악기 프로그램으로 짜야 한다는 관의 지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타악은 연주자 숫자도 적을 뿐더러 레퍼토리도 현대음악에 편중돼 있다. 타악기만으로 편성된 곡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문 작성자나 대답한 사람들이 난타나 사물놀이를 떠올렸던 것 아닐까? 하지만 난타나 사물놀이가 클래식 음악회 프로그램이 될 수는 없다.
논리적으로도 오류가 있고, 음악계 현실에도 맞지 않다고 기획자들이 지적했지만, 한번 관에서 정한 지침은 변경할 수 없다고 했단다. 참 답답한 노릇이다. 이게 바로 최근 음악계에서 화제가 된 ‘망고는 과일에 속하지 않는다’는 희한한 사연이다. 이 사연이 널리 알려지면서 개선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희한한 사연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문화가 있는 날 작은 음악회가 열리는 지방 공연장 직원들이 보였다는 행태도 참 희한하다.
“대강 하고 가세요. 관객들 오는 것도 귀찮아서 홍보도 안 했어요.”
문화가 있는 날 연주를 위해 지방문예회관을 찾아간 음악가에게 공연장 스태프가 이런 얘기를 했다니,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연주자의 앙코르 연주에 퇴근 시간이 늦어진다며
스태프들이 싫은 기색을 보였다는 건 애교에 속한다. 공연 홍보를 전혀 하지 않고 안내 직원도 배치하지
않아 찾아온 관객들이 ‘오늘 공연을 하기는 하는 거냐’고
물어보는 상황도 연출되었다. 공연이 임박했는데도 난방비 아깝다며 난방을 가동시키지 않는 곳이 있었는가
하면, 공연에 필수적인 음향 장비와 무대를 전혀 준비해 놓지 않거나,
악기 조율은 연주자가 직접 하면 되는 거 아니냐며 조율 상태가 엉망인 악기를 방치한 곳도 있었다. 미리
공지한 사인회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아 연주자가 직접 사인회를 위한 탁자를 들고 나르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공공 예산 지원받아 음악회를 여는데, 문예회관 직원들은 알 바 아니고 연주자들이 알아서
공연하고 가면 그만이란다. 왜 편하게 지내는데 이런 일을 만들었는지 귀찮아 죽겠다, 공연을 널리 알리기는커녕 관객이 안 오면 좋겠다, 이런 상황이라면, 제 발로 찾아오는 관객들까지 쫓아낼 판이다. 과연 지방문예회관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묻고 싶다.
건물만 번듯하게 문예회관이니 아트홀이니 지어놓으면 무슨 소용인가. 직원들은 건물 관리만 하면 된다는 얘기인가. 서울시내 곳곳에서 ‘우리 동네 음악회’를 열어온 서울시립교향악단 관계자는 ‘서울에도 그런 곳 많아요’ 했다. 물론 모든 공연장 직원들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강 하고 가세요’ 하는 곳이 적지 않은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망고가 과일에 속하지 않는다’는 식의 애초의 이상한 설문 역시 별 생각 없이 대강 만들어진 것이었을 터이다.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도 ‘관에서 정해준 건데, 대강 맞춰서 하면 되지 뭘 그렇게 따지느냐’고 했을 것을 것이다. 문예회관 담당자들은 ‘어차피 예산 지원 받아서 하는 건데 대강 때워야지’ 했을 것이다. ‘대강 하고 가세요’의 연속이다. 하지만 ‘대강 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덕에 음악회는 내실 있게 만들어졌고, 더욱 많은 관객들이 소중한 문화 향유의 기회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대강 하고 가세요’가 어디 음악계만의 문제이겠는가.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바로 ‘대강 하고 가세요’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강 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 사회는 조금씩 진전해 왔는지도 모른다. ‘대강 하기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을 응원한다.
*방송기자클럽회보 4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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