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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중국어 배우는 사람들 많지만, 저희 회사 보도국에도 중국어에
관심 있는 기자들이 많은데요, 저는 중국 연수 경험이 있고, 저희
부서 기자 한 명은 대학 전공이 중문학이고, 또 한 명은 몇 년 전 중국 장기출장 때 중국어를 접한
경험이 있고, 또 한 명은 중국에 가 본 적도 중국어 공부를 해 본 적도 없지만 아는 중국어 단어 몇
개를 즐겨 사용합니다. 이 몇 사람이 모이면 장난 삼아 중국어로 대화를 하곤 합니다.
중국 장기출장 경험이 있는 기자는 자신의 중국어가 ‘술집 중국어’라고 농담을 하는데요, ‘중국의 술집에서, 술을 마시면서, 몸으로 익힌 중국어’라는 거죠. 실제로 이 기자는 중국어를 체계적으로 배워본 경험은 없지만, 꽤 정확한 중국어 문장을 구사해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할 때가 있습니다. 술이
외국어 능력을 증대시킨다? 그러고 보니 저도 외국인 친구들과 대화할 때 약간의 술이 들어가면 더 말이
술술 잘 나오는 것 같다는 기분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제 근무하다가 한 외신 기사의 제목을 발견하고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Alcohol Helps You Speak a Foreign Language Better 즉, 술이 외국어 구사능력을 향상시켜 준다는 내용이었죠. 타임과 가디언, 네덜란드의 언론들이 보도한 이 기사는 영국의 리버풀 대학과 런던 킹스칼리지,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 대학의 공동 연구 결과를 소개한 것이었습니다.
이 연구팀의 연구 수행 방법은 이랬습니다. 우선 독일어가 모국어이면서
네덜란드어를 배운 사람 50명을 실험에 참가하도록 했습니다. 먼저
참가자 중 일부는 술을 마시고, 일부는 알코올이 없는 음료수를 마십니다. 알코올 섭취량은 참가자의 체중에 따라 약간씩 차이를 뒀지만, 대체로
체중이 150파운드(68킬로그램)인 사람의 경우 맥주 1파인트(568밀리리터) 좀 안 되는 양에 해당합니다. 흔히 말하는 ‘생맥주 500’ 정도 마셨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참가자들은 이후 네덜란드가 모국어인 사람과 2분간 네덜란드어로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들의 대화는 모두 녹음되어 평가자에게 전달됐습니다. 평가자들은
누가 술을 마셨는지는 모르는 상태에서 참가자들의 네덜란드어 구사 능력을 평가했는데, 일정량의 술을 마신
참가자들이 더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유창성, 특히 발음
면에서 평가가 좋았다고 하네요.
술을 마시면 외국어 구사 능력이 향상되는 이유에 대해서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만, 연구팀은
적당한 양의 알코올이 외국어 대화에 따르는 ‘긴장감’을 완화시키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대화할 때 무슨 실수를 하지나 않을까
긴장하고 조심스러워지는 경향이 있는 게 사실이니까요.
1972년에는 미국인의 태국어 구사와 관련한 연구가 있었는데요, 여기에서도
소량의 알코올이 태국어 발음을 향상시켰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럼 알코올을 섭취하면 할수록 외국어 구사 능력이 더 증대될까요? 연구팀은
이 연구에서 알코올 섭취량은 소량이었다는 점을 환기시킵니다. 만약 알코올 섭취량이 늘어났다면 외국어
구사능력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반대의 효과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입니다. 너무 술을 많이 마시면
오히려 외국어가 어눌해질 수 있다는 거죠.
저는 외신을 통해 다양한 연구 결과를 접하면서, 가끔은 참 별 걸 다 연구하는구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 연구도 외국어 공부하는 사람들이 느껴봤을 법한 사안을 실제 실험으로 확인해 본 셈이지요. 사실 저는 술을 마셨을 때 외에, 화가 났을 때에도 외국어 구사
능력이 향상된다는 ‘가설’을 갖고 있는데요, 혹시 이런 것도 연구 대상이 되려나요? 이 역시 제 경험에서 우러난
‘가설’입니다.
몇 달 전 베이징 공항에서, 제가 타야 할 비행기가 5시간
연착된 끝에 취소되었는데, 항공사 직원이 이미 부친 짐을 어떻게 찾는지, 티켓은 어디서 환불 받는지, 자세한 내용은 알려주지도 않은 채 탑승구
앞에서 대기하던 승객들에게 그냥 가라고만 하더군요. 화가 나서 제가 그 직원에게 항의했죠. 도대체 어디로 가서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고요. 결국은 그 직원이
미안하다며 저희 일행을 안내해 줄 사람을 한 명 불러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옆에 있던 제 딸이 그러더군요. “엄마가 그렇게 화 내는 것도 처음 봤고, 엄마가 중국어 그렇게
잘하는 것도 처음 봤어!”
술을 마신 것과 화를 내는 것은 다른 상황이지만, ‘내가 외국어 하다가 틀리지나 않을까’ 하는 긴장감이 줄어든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때 정말 화가 났기 때문에 제가 하는 중국어가 문법적으로 맞는지 틀리는지, 이 단어가 적합한지 아닌지, 따져볼 겨를 없이 그냥 나오는 대로 막 얘기했거든요. 당시 저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최소한 말하는 속도나 발음은 평소보다 훨씬 유창했을 것 같습니다.
외국어로 하는 대화는 심리 상태, 마음가짐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어요. 저도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외국어라는 ‘장벽’ 앞에 움츠러들고 긴장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술을 마시든 마시지 않든, 긴장을 풀고 편안한 마음으로 임하면 외국어 대화도 조금은 더 자연스러워지지 않을까요.
*SBS 뉴스 웹사이트에 취재파일로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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