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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사 첫 수업 시간에 교수는 중국의 고대왕조에 대해 조사해 오라는 숙제를 내줬다. 교수는 얼리토우(이리두) 유적에서 알 수 있는 'Xia dynasty(夏왕조)'의 특징, 그리고 '리슈에친(이학근)'이라는 중국 사학자의 연구에 대해 조사해 오라고 했다. 

그런데 교수가 수업 교재로 쓰는 책 두 권(The Cambridge Illustrated History of China, The Open Empire)을 아무리 읽어봐도 하왕조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저 얼리토우 유적이 하왕조와 관계 있다고 이야기되는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하왕조에 대해서는 사료가 부족하다, 이 정도였다. 책과 함께 다른 자료를 찾아보니, 하 왕조 이후의 상 왕조는 갑골문의 발견으로 어느 정도 정보를 알 수 있으나, 상 왕조에 대해서는 사료가 없어 역사학계에서 그 연대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실재 여부를 놓고도 의견이 갈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리슈에친은 1996년 중국정부의 제창으로 시작된 하상주 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을 이끈 학자다. 하상주 단대공정은 중국정부가 중국 고대문명의 연대를 확실히 밝혀 '중국 5천년 문명'의 전모를 알리겠다는 의도로 시작한 학술 프로젝트다.
엄청난 예산 지원을 받으며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2000년, 연구활동의 결과인 '하상주 연표'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하나라는 기원전 2070년 경에 건립되었고, 하나라와 상나라의 교체기는 개략 기원전 1600년이며, 상나라와 주나라의 교체기는 기원전 1046년이라 했다. 

그러나 여러 자료들을 찾아보니, 하상주 단대공정의 연구 결과는 역사학계에서 공인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연구 방법론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복잡하기도 하거니와 내 전문분야도 아니기 때문에 생략한다.
하지만 국가가 주도하는 연구 프로젝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의적으로 연구를 끼워맞춘 듯한 정황이 있고, 그 결과 국제 학계에서 비판을 받았고, 연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에 대해 중국 학자들이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고고학 전공자와 사학 전공자가 포함된 우리 과의 다른 학생들도 나와 비슷한 의견이었다. 그
러나 다음 수업 시간에 이런 얘기들을 했더니 교수는 확신에 찬 어조로 얼리토우 유적은 하왕조의 것이 확실하다고 했고, 리슈에친의 '업적'을 이야기했다. '국가가 주도하는 연구 프로젝트였다면 학자들도 부담을 가지지 않았겠느냐'고 했더니, '그럴 리가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명확한 역사적 증거가 있다며 다음에 보여주겠다고 했다. 

이 날 교수의 태도는 실망스러웠다. 외국 학자들은 중국인이 아니라서 잘 몰라서 그런다는 식으로 다른 가능성을 차단해 버리니 더 이상 토론이 진전되지 않았다. 우리에게 '명확한 증거'를 보여주겠다던 교수는 아직 그 '증거'를 보여주지 않고 있다. 사실 보여준들 안 보여준들 별 상관없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 '증거'라는 것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으니까. 

정말 백번 양보해서 교수의 주장이 맞을 수도 있다. 중국에 대해선 잘 모르거나, 혹은 무시하는 외국인 학자들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엄정한 사료 분석과 연구를 바탕으로 해야 하는 역사학에서, 이 정도의 연구만 가지고(그것도 문제가 많다고 지적된 방법론을 사용한) 다른 가능성을 깡그리 부인해 버리는 태도는 옳지 않다. 중국의 '자국중심주의'를 다시한번 실감했고, 중국의 학계가 다 이렇다면 문제가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고 있자니 그 수업이 생각난다. 국가가 정하는 한 가지 관점으로 역사를 가르치려는 시도. 한국이 중국보다 앞선 분야가 아직은 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게 될까 봐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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