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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은 아이돌그룹 ‘엑소(EXO)’에 푹 빠져 산다. 엑소 노래를 듣고 부르고, 춤도 따라 추는 건 기본이다. 엑소 관련 기사와 프로그램은 빠짐없이 챙겨본다. 사춘기 딸과 대화가
쉽지 않지만 엑소 얘기를 하면 그나마 대화가 된다. 처음엔 “엑소? 술 이름(XO라는 이름이 붙은 술이 있다) 아니야?’ 했던 나도 이젠
10명이 넘는 엑소 멤버들을 제법 구별한다. 자꾸 들으니 노래도 친숙해졌다.
지난해 말 엑소가 인터뷰를 위해 SBS 보도국을 방문했을 때(위 사진. 크리스 탈퇴 전이었다), 딸이 가장 좋아하는 멤버인 디오에게
사인을 받았다. 사인 음반을 받아든 딸은 ‘엄마, 사랑해!’를 외쳤다. 10년
만에 처음 듣는 말이었다. 딸은 엑소를 직접 보는 게 평생의 소원이라 했다. PC 방에까지 가서 콘서트 예매를 시도했지만 실패해 낙심한 딸에게, 어렵게
표를 구해 건네줬다. 딸은 괴성을 지르며 팔짝팔짝 뛰더니 10년 만에 두 번째로 ‘엄마, 사랑해!’를 외쳤다.
엑소 콘서트에 간 딸은 밤늦게 상기된 얼굴로 돌아왔다. 보아하니
공연 내내 감격과 흥분 상태였고, 공연 끝나고도 함께 갔던 친구와 한참 수다를 떨고 온 듯했다. 억지로 재우지 않았으면 또 날 붙들고 엑소 얘기로 밤을 지샐 기세였다.
딸은 며칠 후 또 엑소가 출연하는 공연에 갈 예정이다. 날마다
공연 ‘예습’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엄마한테는 툭하면 짜증이면서 엑소는 왜 그렇게 좋을까. 저럴 시간에
공부나 하지, 내심 못마땅해 하다가 슬며시 딸이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저렇게 뭔가 열렬하게 좋아해 본 적이 언제였지? 요즘 내가
저렇게 손꼽아 기다리는 공연이 있나?
돌이켜보면 과거 나에게도 ‘아이돌’이 있었고, 미치도록 보고 싶은 공연이 있었다. 아파서 학교는 조퇴하고도, 내 첫 ‘아이돌’이었던 야구선수 박철순의 사인회는 만원버스를 타고 찾아갔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보고 당시 이미 주름 자글자글했던 로버트 레드포드에 반해 그가 나온 영화는 모조리 찾아보던 시절도 있었다. (아래 사진은 당시의 영화 리플렛. 앨범에 꽂아놓았던 걸 최근 발견했다)
내가 동경했던 피아니스트 부닌의 첫 내한독주회는 대학입시 실패의
시름마저 잊게 할 정도로 황홀했다. 음반을 하도 많이 들어서 외우다시피 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실제로 브로드웨이에서 봤던 날, 감격에 겨워 함께 갔던 일행과 새벽까지 공연 얘기 나눴던 기억도 생생하다. 영국 지방도시에서 연수 받던 시절, 피아니스트 폴리니 공연을 보기 위해 런던으로 '상경'해 하룻밤 자고 돌아왔다. '드디어' 폴리니를 만난 감동은 컸다. 이제 할아버지가 된 폴리니에게 사인 받고 나서, 왜 한국엔 안 오냐고, 한국에 꼭 와달라고 졸랐다. (아래 사진. 이건 '팬질' 맞다)
사실 1998년 가을 처음 문화부에 배치돼 공연 취재를 시작했을 땐 나날이 감동의 연속이었다. 공연을 취재하고 예술가를 만나는 일 자체가 기쁘고 즐거웠다. 지금 딸이 끊임없이 엑소 얘기를 내게도 하는 것처럼, 나도 이 좋은 걸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공연을 보고 가슴
뛰는 감동을 느끼거나, 공연을 정말 손꼽아 기다리는 일은 줄어들었다.
좋은 공연이 줄어들어서 그런 걸까.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걸까. 공연 관람이 ‘평범한 일상’이
되면서 내 마음의 ‘촉수’가 무뎌진 걸까. 얼마 전 문화부를 떠난 후로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 공연에 전만큼
관심을 갖지 못하니 보고 싶은 공연도 별로 없고, 공연을 못 보는 게 아쉬운 줄도 모르는 지경이 되었다.
요즘 딸의 엑소 ‘팬질’을 보니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오르며 약간 부럽고 아쉬워진다. 그러면서도
‘에이, 저런 건 젊어서 가능한 거지’, 하고 고개를 젓는데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바로 조용필
콘서트를 취재하며 만났던, ‘오빠!’를 연호하고, 꺅꺅 환호성을 질러대던 중장년 아줌마 관객들의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면 ‘팬질’에는 나이가 없는 법. 엑소
팬으로서 행복을 누리고 있는 딸을 부러워만 할 게 아니라 나도 공연 ‘팬질’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공연을 만나야겠다. 내게 영감을 줄 예술가를, 가슴 벅찬 감동을 안겨줄 공연을 손꼽아
기다린다.
*'클럽 발코니 매거진 6월호에 기고한 글을 약간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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