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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날마다 볼래요…팝스타 콘서트 같았던 발레 관련 이미지

발레 불모지 인도로 간 국립발레단, 두 번째 글입니다. 지난번 글에서는 ‘발레 불모지 인도에서 만난 빌리 엘리어트들’이라는 제목으로 국립발레단이 뉴델리 현지에서 연 발레 발레교실 얘기 전해드렸죠. 발레교실 다음날, 그러니까 10월 26일에는 국립발레단의 첫 인도 공연이 열렸습니다. 공연 장소인 뉴델리 시리 포트 오디토리엄은 뉴델리 아시안게임 때 지어진 극장입니다. 시설이 좀 낡았고, 발레 공연이 열렸던 적이 거의 없어서 국립발레단이 조명과 무대 셋업 하는 데 고생 좀 했다 하는데요, 뉴델리에서는 가장 크고 좋은 공연장이라고 합니다.

사실 인도에서 발레 공연을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취재단 안내를 맡은 인도인 가이드 다네쉬의 말에 따르면 ‘인도는 영화 산업이 너무 발달해서 다른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발전할 여지가 없었다’고 합니다. 미국에 헐리우드가 있다면 인도에는 볼리우드가 있다고 할 정도로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영화가 많이 제작되는 나라입니다. (‘볼리우드’는 ‘봄베이’와 ‘헐리우드’의 합성어입니다. 요즘은 봄베이가 뭄바이로 바뀌었지요. 볼리우드는 인도 뭄바이 지역의 영화산업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인도 영화 전반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많이 쓰입니다.) 12억이 넘는 인도 사람들의 문화생활을 영화가 도맡아 책임지고 있다 보니 발레뿐 아니라 다른 장르 공연도 그다지 많이 열리는 편이 아니라 합니다. 

김수현 취파인도가 발레 불모지라는 점을 감안해, 국립발레단은 발레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갈라 공연으로 프로그램을 짰습니다. 창작발레 호동, 그리고 돈키호테, 라 바야데르(인도의 사원에서 춤추는 무희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다룬 대작 고전발레입니다)의 주요 장면, 그리고 낭만발레의 걸작 ‘지젤’ 2막을 선보였습니다. 두 차례 공연 중 한 차례는 인도 학생들을 위한 특별 공연으로 열렸는데, 뉴델리 시내 20개 학교 학생 1, 800여 명과 교사들이 관람했습니다. 공연 시작 1시간 전부터 공연장 앞에는 공연을 관람하러 온 학생들의 줄이 길게 늘어섰습니다.

대부분 발레를 전혀 접한 적이 없을 텐데, 과연 이 학생들이 생소한 발레를 재미있게 볼 수 있을까. 공연이 시작되자, 제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주 정숙하게 공연을 관람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만, 객석은 제가 본 그 어느 발레 공연보다도 더 뜨겁게 무용수들의 춤에 반응했습니다. 도약이나 회전 등 무용수들이 약간의 기교라도 자랑하는 장면이 나오면 엄청난 박수와 환호성이 객석을 뒤덮었습니다. 남녀 주인공이 포옹하는 장면에서도 뜨거운 반응이 나왔습니다. 마치 팝스타 콘서트장 같은 분위기여서, 관객들이 문자 그대로 ‘흥미진진하게’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김수현 취파객석의 반응이 뜨거우면 무용수들도 힘이 납니다. 국립발레단 무용수들은 신나게 무대를 누볐습니다. 경쾌하게 고난도 기교를 맘껏 뽐내는 장면은 물론이고, 비교적 차분하게 진행되는 지젤 2막 에서도 함성이 자주 터져나왔습니다. 윌리 역을 맡은 무용수들이 순백의 의상을 입고 춤추는 환상적인 군무, 그리고 남녀 주인공의 애절한 사랑으로 관객들을 매료시켰습니다. 공연이 끝나자 관객들은 너도나도 기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열광적인 커튼콜이 몇 차례 이어졌습니다. 

“너무 재미있어서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날마다 보고 싶어요. 발레 못 본 친구들 데려와서 날마다 보고 싶어요.”
“정말 환상적인 공연이었어요. 보면서 마치 천국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저도, 제 아이들도  즐겁게 봤어요.”
“진짜 좋았어요. 이런 공연을 예전엔 한번도 본 적이 없거든요.”
김수현 취파김수현 취파인터뷰를 위해 몇몇 관객에게 마이크를 돌리자 모두 상기된 표정으로 소감을 쏟아냈습니다. 출연했던 무용수들 역시 ‘이렇게 열광적인 반응은 생전 처음’이라며 감격스러워 했습니다. 이 날 관객들은 대부분 사전지식 없는 상태에서 발레를 처음 본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높은 순도’를 자랑하는 관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명세 따지지 않고, 체면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어떤 편견도 선입견도 없이 순수하게 몰입해 즐겼으니까요. 이들은 공연이 완전히 끝나고도 아쉬워 자리를 떠날 줄 몰랐고, 무용수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발레 첫 경험’의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이 중에는 전날 발레교실에 참석했던 학생들도 끼어있었습니다.

옆 줄에 앉아있었던 저는 공연이 진행되는 도중에도 이 학생들이 무대를 경탄과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는 걸 느낄 수 있었는데요, 공연이 끝나고 무대에 올라가 무용수들을 다시 만난 이들의 얼굴은 감격과 흥분으로 달아올라 있었습니다. 발레 무용수가 꿈이면서도 진짜 발레 공연을 본 것은 처음이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뛰었을까요. 이들이 돈키호테에 출연한 김기완 씨와 함께 하던 기념 촬영은 어느새 즉석 수업으로 바뀌었습니다. 학생들은 김기완 씨에게 즉석에서 발레 포즈를 교정 받았고, 한 마디라도 더 듣고 배우려는 열성을 보여줬습니다.

저는 첫날 공연만 보고 한국으로 돌아와 둘째 날 공연은 보지 못했습니다만, 둘째 날 공연 역시 인도 관객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고 합니다. 국립발레단의 해외 교류 활동은 지금까지는 러시아, 이탈리아 등 발레 본고장에서 공연하면서 한국 발레의 위상을 널리 인정받는 데 초점을 맞춰왔는데요, 이제는 한국 발레의 위상이 공고해진 만큼 해외 활동의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추셉니다. 지난해 캄보디아에 이어 이번에 인도에서 공연한 것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뤄진 겁니다. 우리도 발레를 서양에서 배워왔지만, 이제는 다른 아시아권 국가에 뭔가를 전수해 줄 수 있는 위치가 된 거죠.

이번 국립발레단 인도 공연을 보면서 저는 김민기 씨로부터 10여 년 전 들었던 얘기를 떠올렸습니다. 김민기 씨는 지난 2001년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의 중국 공연을 앞두고 ‘한류’에 대한 생각을 들려줬었는데요, 요지는 한국의 문화가 아시아권 국가들에게 일종의 ‘문화적 필터’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김민기 씨는 대중문화, 그리고 중국에 한정해 이야기했었는데, 맥락을 조금 더 확대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듯합니다) 아시아권 국가들보다 더 자본주의화에 앞서나가고 서양문화를 왕성히 흡수해 발전시킨 한국의 문화가, 아시아권 국가들에게 하나의 대안이거나 문화적 지표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물론 일본도 있기는 합니다만, 일본은 침략이라는 역사적 과오가 있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사실 저는 한국 문화가 해외에서 선보이기만 하면 ‘한류’를 붙이는 ‘호들갑’이 달갑지 않습니다. 이번에 인도에서 국립발레단이 성공적으로 공연했다고 해서 갑자기 인도에 ‘발레 한류’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지요. 그렇지만 저는 한국이라는 필터를 통해 인도에 발레를 전한 이번 공연이 분명히 먼 훗날에 열매를 맺을 ‘씨앗’을 뿌렸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애정이 많고, 오래 전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인도 공연도 봤다는 가이드 다네쉬 씨가 ‘이번 공연이 인도에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라고 한 것도 비슷한 뜻이었겠지요. .

발레교실에 참가했던 학생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발레를 본 인도 관객들 중에 훗날 발레 무용수가 배출될지 모릅니다. 이들은 인도의 발레무용수 1세대로 인도 발레를 선도할 것이라는 기대도 해 봤습니다. 이들에게 ‘발레 첫 경험’을 선사한 한국 국립발레단과의 조우는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겁니다. 반드시 무용수가 되지 않더라도, 국립발레단의 공연을 본 사람들, 혹은 공연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한국’이라는 나라를 예전보다는 더 각별하게 느끼게 될 거고요. 국립발레단 단원들에게도 이번 공연은 초심으로 돌아가 무용수로서의 각오를 더욱 다지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김수현 취파

이상이 저의 첫 인도 출장기입니다. 요즘은 짧고 톡톡 튀는 글이 대세라는데, 이렇게 대책 없이 2편까지 길어진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느낀 게 많아서 이 얘기 저 얘기 풀어봤는데요, 많이 공감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SBS 뉴스웹사이트 취재파일로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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