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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 '안 에키타이=안익태, 이름찾기 왜?' 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나는
또 궁금한 게 있었다. 안익태는 정말 ‘세계적인 음악가’였는가? 안익태가 그 시절 베를린 필을 지휘했던 것이 그의 음악적
능력을 입증하는 것인가?
이경분 교수는 안익태가 베를린 필을 지휘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독일과 동맹 관계였던 일본의 음악가로 활동했던, 즉 친일 행위를 했던 덕분이었지만, 음악적 능력으로 평가를 받았던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안익태가 지휘했던 베를린 필 음악회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했다. 물론 안익태가 유럽의 유명 지휘자들과 대등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시아 음악가들 중에 두드러지는 존재였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당시 베를린 필 단장이었던 베스트만이, 안익태의 스승이기도 했던 일본인 음악가
고노에 히데마로보다 안익태를 예술적 측면에서 더 선호한다고 언급했던 기록을 보여줬다. 안익태 이전에
베를린 필을 지휘한 고노에 히데마로는 일본의 귀족 출신 지휘자이자 작곡가로 독일 최상층부와도 친분을 맺은 거물이었다. 일본인 행세를 하긴 했지만 고노에 히데마로에 비하면 아무런 배경도 없었던 안익태가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건 음악적인 평가도 좋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안익태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찾게 하는 것은, 단순히 ‘한국인 안익태가 그 옛날에 베를린 필을 지휘해서 자랑스럽다’는 차원이
아니다. 이교수는 이런 움직임이 후세의 연구자를 위해 객관적인 역사의 기록을 남기고, 이를 통해 안익태의 일생 전체를 파악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런 면에서 베를린 필이 한 것처럼 한국 이름으로 수정하되 기존의 일본 이름도 병기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 미국, 유럽
곳곳에서 활동했던 ‘코스모폴리탄’ 안익태의 일생은 그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다며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나는 이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안익태의 ‘에텐라쿠’가 담긴 동영상을 이교수가 최근에 발견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내가
알기로는 안익태의 유럽 시절 연주 동영상은 앞서 말한 ‘만주국 설립
10주년 축하 음악회’ 외에는 알려진 게 없었다. 희귀한
영상을 찾았다는 얘기에 귀가 쫑긋해졌다.
이 영상은 헝가리 국립영상물보관소에 보관된 1941년도 헝가리 월드뉴스 영상이었다. 헝가리 국립영상물보관소가 소장자료를 디지털화하면서 최근 온라인에 공개한 것으로 보인다. 부다페스트 페스티 비가도 홀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안익태가 지휘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일본인 지휘자 에키타이 안’으로 선명하게 표시된 자막이 뜨고, 무대에는 커다란 일장기와 헝가리 국기가 나란히 걸려 있다. 음질이
안 좋기는 하지만, 안익태 작곡 ‘에텐라쿠’의 클라이맥스인 듯한 부분이 1분 가량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 악보도 남아있지 않다던 바로 그 곡의 연주 실황이 이렇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 영상의 의미는 안익태의 1940년대 활동상을 담은 희귀한 영상이라는 것 이외에도, ‘강천성악’과 환상곡 ‘에텐라쿠’를 자세히 비교할 수 있게 됐다는 데 있다. 곡 전체가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서 100퍼센트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영상에 담긴 안익태
작곡 ‘에텐라쿠’와 ‘강천성악’의 클라이맥스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 안익태가 환상곡 ‘에텐라쿠’를 개작해 ‘강천성악’이란 이름으로 다시 발표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게 이교수의 얘기였다.
(헝가리 동영상 링크 http://filmhiradokonline.hu/watch.php?id=4404)
이교수를 만나고 돌아와, 기사를 어떤 식으로 풀어가야 할까 생각했다. 안익태 작곡 ‘에텐라쿠’가 담긴 동영상을 새로 입수했다는 식으로 풀어가야 할까. 그러나 사후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헝가리 동영상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송병욱 씨를 비롯한 몇몇 연구자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동영상을 본 송병욱 씨가 안익태의 ‘에텐라쿠’와 ‘강천성악’의 유사성을 논했던 글도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 기사는 ‘동영상 발굴’ 자체를 주제로
내세우진 않았고,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에키타이 안으로만
남아있는 기록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시작됐다는 것을 주제로 쓰기로 했다. 헝가리 동영상은 당시 일본인
에키타이 안으로 살았던 안익태의 친일 행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사용했다. 안익태 ‘에텐라쿠’와 ‘강천성악’의 유사성에 대한 학계의 견해도 포함시켰다. 또 기사를 쓰는 과정에서, 이교수가 나를 만난 후, 빈 심포니 등 안익태가 연주했던 다른 단체에도, 일본인 ‘에키타이 안’으로만
남아있는 기록을 베를린 필이 수정했던 것처럼 고쳐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사실도 기사에
소개했다.
내 기사에 대해 안익태를 미화한다거나, 면죄부를 주려 한다고 오해하는 분들도 간혹 계신
것 같다. 뉴스에서 공개한 동영상은 안익태가 일제 말기 ‘에키타이
안’으로 활동했던 친일 행적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다. 미화와는
거리가 멀다. 내 기사의 의도는 한국인 안익태가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 음악계에서 ‘에키타이
안’이라는 이름의 일본인으로 활동했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한국
음악계가 ‘일본인 에키타이 안’이 사실은 ‘한국인 안익태’라는 것을 알려나가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친일행적은 충격적이지만 안익태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건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하려는 노력이다.
이경분 교수는 안익태의 ‘잃어버린 시간’을 추적해
그의 친일 행적을 드러낸 연구 때문에 ‘안익태 킬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안익태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인식은 ‘우국의
충정을 지닌 천재 음악가’에서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 매국노’로 단숨에 급전직하했다. 하지만 이교수 자신은 안익태에 대한 일방적인
찬양도, 일방적인 매도도 위험하다고 했다. 안익태를 단순히
‘친일파니까 나쁜 놈이다’라고 규정하고, 더 이상 들여다볼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안익태에
대해선 아직도 연구할 것이 많이 남았다는 것이다.
나는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안익태 기념재단과 안익태 기념관도 찾아갔다. 재단과 기념관은
안익태가 숭실중학교를 다녔다는 인연으로 숭실대학교 안에 있었다. 그러나 건물은 이름만 ‘안익태 기념관’일 뿐이었고, 안익태의
유품이나 관련 자료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나의 기대는 헛된 것이었다. 안익태 유족들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유품들 역시 창고에서 잠자고 있다. 이교수는 연구자들을 위해 이런 자료들이 공개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음악은 참 이중적인 성격이 있어요. ‘음악은 그냥 음악이다’, 하면 맞는 말이죠. 베를린 필 사람들이 나치 시대가 끝나고 나서
‘나는 음악만 했어, 베토벤만 연주했어’ 한 건 틀린 말은 아니죠. 독일 음악이 좋아서 최선을 다해서 연주했고, 이걸 좋아하고 감동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죠.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음악은 정치적인 매체이다’, 이 말도 맞아요. 설사 본인은 음악만 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정치적 목적에 이용될 수 있는 거죠. 안익태도 ‘나는 커리어를 위해서 했고, 일본 사람들보다 더 음악을 잘하기 위해서 했다’고 얘기했죠.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일본, 더 나아가서는 나치의 프로파간다에 이용된 것도 사실이잖아요.”
이경분 교수의 이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제 시대 변절했던 많은 예술가들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친일은 그 시대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는 그저 예술만 했을 뿐이다’라고. 1938년 한국환상곡을 초연하며 조선의 독립을 염원했던 안익태가 어떻게 일장기 앞에서 열정적으로 연주하는 일본인
음악가 에키타이 안이 되었는지, 그리고 광복 후 어떻게 다시 애국애족을 부르짖는 음악가로 돌아왔는지, 아직도 전체가 드러나지 않은 그의 삶의 궤적을 연구하는 것은, 한국
현대사의 숙제 하나를 푸는 일에 다름 없을 것이다.
*SBS 뉴스웹사이트에 취재파일로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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