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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라는 영화 보신 분들 많으시죠? 영국의 탄광촌 소년 빌리가 발레를 배우면서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담아낸 영화인데요, 발레리노가 된 성인 빌리가 무대에서 도약하며 정지하는 마지막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단순히 어려운 환경 속에 발레리노가 되는 소년의 성공담이 아니라, 광산 노동자 파업이라는 영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과 얽히는 빌리의 가족, 친구들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영화였습니다. 뮤지컬로도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었지요.

영화 빌리 엘리어트이야기를 꺼낸 건 제가 인도에서 빌리 엘리어트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웬 인도냐고요? 지난주 국립발레단의 한-인도 수교 40주년 기념 공연을 취재하기 위해 인도 뉴델리를 다녀왔거든요. 국립발레단은 뉴델리 현지에서 공연뿐 아니라 발레교실을 열었는데, 바로 이 곳에서 저는 인도의 빌리 엘리어트들을 만났습니다.

지난 25일 뉴델리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발레 교실. 국립발레단 김지영 이영철 씨 등 주역 무용수들이 직접 선생님으로 나섰습니다. 발레 교실 참가자들은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지 2-3달 됐다는 남녀 학생 20여 명이었습니다. 나이는 10대부터 20대까지 다양했고요. 사실 저는 이 발레교실을 실제로 보기 전에는 그저 그림 거리정도 되는 1회성 행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발레교실 참가자들의 뜨거운 열정과 진심이 느껴지면서 이 생각이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학생들은 1시간 정도 진행된 짧은 수업이었지만, 그야말로 초집중했습니다. 국립발레단 무용수들의 말 한 마디, 몸짓 하나 놓칠세라 몰두하는 표정이 진지했습니다. 발레를 시작한 지 2-3달 정도밖에 안 됐다는데도 자세며 동작이 안정돼 있었고, 무용수들의 시범동작을 곧잘 따라갔습니다. 프린스 샤르마라는 15살짜리 소년은 비전문가의 눈에도 출중한 자세와 동작으로 시선을 끌었는데, 선생님으로 나선 김지영 씨는 2-3달 배운 걸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며 감탄했습니다.

학생들이 수업 받는 모습을 감격한 모습으로 지켜보는 인도 청년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바로 이 학생들을 지도하는 발레 선생님이었습니다. ‘산제이 카트리라는 이 서른 살 청년은 뉴델리에 센트럴 컨템포러리 발레라는 민간 발레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산제이는 인도 최초의 남자 발레 무용수로 알려져 인도 현지 언론에 소개된 적도 있습니다.

인도는 인구 12억의 대국이지만, 변변한 직업 발레단 하나 없을 정도로 발레의 불모지입니다. 산제이 자신도 20살이 돼서야 인도 미국대사관 부설 발레 강좌를 수강하며 발레에 입문했고, 이후 인도에서는 제대로 발레를 배울 곳이 없어 아르헨티나와 한국 등 외국에서 몇 달씩 머무르며 공부했습니다. 지난해에는 한국 유니버설발레단에서 몇 달 동안 연수단원으로 있으면서 연말 호두까기 인형공연에 파티 손님과 쥐 역으로 출연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한국을 2의 고향이라고 부를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습니다.

인도로 돌아온 산제이는 형편은 어렵지만 정말 춤추고 싶어하는 학생들을 모아 발레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성인과 어린이 취미 발레 강습을 통해 돈을 벌고, 프린스 샤르마처럼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무료로 발레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학생들은 직업 무용수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하루 8시간씩 연습하고 있다 했습니다. 돈이 없어 몇 달째 신는 낡은 발레 슈즈에 구멍이 나고, 발가락이 삐어져 나와도, 이들은 결코 초라하지 않았습니다. 뜨거운 열정과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가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발레 무용수가 꿈이지만, 이 학생들은 이전에는 발레 공연을 실제로 본 적도, 산제이 선생님 외에는 무용수를 실제로 만나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인터넷으로만 봤던 한국 국립 발레단의 주역들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는다는 건 이들에게 정말 꿈 같은 일이었겠지요. 짧은 시간 이뤄진 수업이지만, 엄청난 자극과 격려가 될 겁니다. 이들은 인터뷰 도중 감격에 겨워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습니다. 저까지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학생들이 한국 발레 무용수들의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건 정말 행운입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아요. 정말 감동적이에요......말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네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저는 발레를 정말 하고 싶었지만, 인도에는 선생님이 없었어요. 인도에 발레를 알리는 것, 다음 세대는 제가 겪었던 문제를 겪지 않게 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이 학생들 중에 분명히 훌륭한 무용수가 나올 거라고 생각해요”(산제이 카트리. 선생님 30)

제 꿈은 발레리나가 되는 것입니다.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요. 제겐 오늘이 진짜 중요한 날입니다. 정말 좋습니다. 가슴이 벅차서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축복 받은 느낌이에요.”(푸르바 바트라. 여학생 18)

저는 정말 발레 댄서가 되고 싶어요. 발레 하는 게 너무 좋아요. 동작이 아름답고 우아해요. 우리가 거리에서 춤추면 모두가 우리를 쳐다보죠. 인도에서 발레를 배우는 건 매우 비싸지만, 우리는 장학금을 받고 있어요. 발레 무용수들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발레는 유튜브에서만 봤죠. 오늘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배웠어요. 정말 상상 이상으로 아름답습니다” (쉬반크 차한. 남학생. 20)

최태지 국립발레단장은 인도 학생들의 모습이 남 같지 않다고 했습니다. 한국 발레에도 저런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지금은 한국 발레가 눈부시게 발전해서 다양한 작품이 공연되고 발레 대중화라는 말도 그리 어색하지 않지만, 한국도 발레의 불모지였고 외국에서 누가 오면 조금이라도 새로운 걸 더 익히려고 말 그대로 필사적으로 갈구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겁니다. 남들한테 배우기만 했던 한국 발레가 이제는 가르칠 수도 있는 처지가 됐으니 세상 많이 바뀐 셈이죠. 김지영 씨는 학생들의 순수한 열정을 보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도 했습니다.

저는 처음엔 공연의 부대 행사정도로 생각하고 갔던 발레 교실에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꿈을 키워가는 인도의 빌리 엘리어트들을 만나고, 예상치 못했던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쑥스러운 기념 사진도 찍었습니다. 승리의 V자까지 그리면서요^^) 국립발레단의 공연은 발레 교실 다음날 뉴델리 시리포트 오디토리엄이라는 극장에서 열렸는데요, 발레 교실에 참가했던 학생들은 이 공연도 관람했습니다. 공연 얘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SBS 뉴스 웹사이트 취재파일로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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