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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취재 일기

문화부는 '마이너'

soohyun 2013. 10. 21. 22:44

방송사 보도국에서 문화부는 이른바 메이저가 아니다. 소속 기자 수가 적고, 기자가 적으니 생산해 내는 기사 수도 적다. 사건도 많고 속보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서가 있는가 하면, 사람들의 관심이 큰 먹고 사는문제를 다루는 부서도 있지만, 문화부는 다르다. 내가 다니는 SBS는 메인 뉴스인 8시뉴스에 문화부 리포트가 하루 한 건 정도 나간다. 우스개로 백 톱(Back Top)’이라고 불리는 가장 마지막 순서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다. 정부 부처 중에서도 문화부는 마이너인 것 같다. 문화부 예산이 정부예산의 1퍼센트를 겨우 넘었다는 게 뉴스가 됐던 걸 보면.


몇 년 전, 정치부에서 일하다가 문화부로 옮긴 지 몇 달 지났을 때, 아버지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물어왔다. “얘야, 매일 8시뉴스를 보는데 너는 왜 요즘 안 나오냐?” 나는 문화부에 가서도 계속 기사를 쓰고 있었건만 아버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했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8시 반만 되면 드라마를 보기 위해 다른 채널로 돌려서 백 톱인 내 리포트를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치부에 있을 때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말이다. 그나마 백 톱으로라도 나가면 다행이다. 뉴스가 생방송으로 진행돼, 앞부분에서 시간이 넘치면 뒷부분 기사는 진행 도중 빠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방송사 보도국에서 문화부 취재 영역은 대개 영화, 공연, 미술, 문화재, 대중문화, 출판, 종교 등으로 나뉜다. 이 중에서는 영화가 가장 인기 있고 기사가 잘 먹히는분야다. 각 부서에서 발제한 기삿거리를 놓고 8시뉴스 상차림을 정하는 편집회의에 참석해 보면 실감할 수 있다. 문화부 기사 중엔 영화 관련 기사를 발제했을 때 토론이 가장 활발하다. 그만큼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보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분야다. 천만 관객을 기록하는 영화가 1년에 몇 편씩 나오는 나라 아닌가. 요즘은 K-, 한류가 이슈가 되면서 대중문화가 각광받고 있다. 예전에는 연예 프로그램에만 나갔을 법한 내용도 메인 뉴스에 종종 등장한다. 역시 시청자들의 관심이 높은 분야이기 때문이다

나는 공연을 오랫동안 취재해 왔고(한 마디로 공연이라고 하지만, 클래식-국악-연극-뮤지컬-무용 등 많은 분야를 포괄하는 용어다) 최근에는 출판도 함께 담당하고 있다. 얼마 전 만난 출판사 지인이 영화계가 부럽다는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다. 안 그래도 세계 최저 수준인 1인당 독서량이 점점 줄어들고 출판 시장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데, 영화는 온 국민의 문화생활이 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출판은 마이너라는 그에게 공연도 마이너라고 얘기했다. 한편으로는 그래도 책이 공연보다는 더 대중적이지 않은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문화부가 좋아 문화부 근무를 자원했으면서도, 척척 기사가 나가는 메이저부서 기자들이 부러울 때가 있었다. 영화담당 기자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공연뿐 아니라, 짧은 기간이나마 미술과 출판 등 다른 분야도 취재해 봤지만, 영화담당 기자는 한 번도 못해 봤다. 영화는 대부분의 영상이 이미 만들어져 있어서 일일이 다 찍으러 다녀야 하는 공연보다 리포트 제작이 훨씬 쉽다. 영화는 가까운 영화관에서 하루종일 볼 수 있지만, 공연을 보려면 저녁 시간을 내서 딱 그 공연장에 가야 한다. 화제작 하나 나오면 온 국민이 알게 되는 영화와는 달리, 공연은 아무리 잘 나간다 해도 소수만 아는 얘기로 받아들여질 때가 많았다.

기사를 쓸 때마다 이 기사에 과연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까를 고민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있는데 좀 관심이 생겨?’ 하고 물어보는 게 버릇이 됐다. 오죽하면 무용계의 한 지인은 이런 얘기까지 했다. ‘장르에 대한 관심을 제고한다는 측면에서, 미스코리아가 무용과 출신이라는 얘기만 들어도 귀가 번쩍 뜨이고 반가웠다. 이럴 정도로 공연계는 대중의 관심에 목마르다.

내가 쓴 공연 기사가 잇따라 뉴스에 나가지 못하고 사장되는 일들을 겪었을 때 좌절했다. 쇼팽 콩쿠르 출전을 앞둔 임동혁 임동민을 인터뷰한 기사가, 리즈 콩쿠르 수상 직전 김선욱을 인터뷰한 기사가 모두 전파를 타지 못하고 묻혀 버렸다. “공연 뉴스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뉴스구나. 나는 하찮은 뉴스를 만드는 기자구나생각했다. ‘마이너의 설움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한 선배의 이야기에 정신을 차렸다.

공연 뉴스도 중요한 뉴스 맞아. 다만 시급하지 않은 뉴스라서 그럴 뿐이지.”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는 인터뷰에서 이런 얘기를 해줬다.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것은 보이진 않지만 마음 속에 건물을 짓는 일이다.”

나는 시간이 걸려도 마음 속에 큰 건물을 짓고 있는 중이다! 어느 순간부터였던가, 척척 기사가 나가는 메이저부서 기자를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영화 담당 기자도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대중적 관심이 큰 분야는 이에 비례해서 관련 정보도 차고 넘친다. 영화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보고 즐기고 있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화 시장이 더 성장할 여지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공연은 마이너분야라서 기자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이 더 많은 것 같다.

기자 생활 20년의 절반을 공연 담당 기자로 보냈다. 그 동안 공연 시장은 분명히 성장했다. 공연 수도 관객도 늘었다. 뮤지컬 시장이 비약적으로 커졌고, 발레의 인기도 높아졌다. 서울은 많은 클래식 음악가들이 연주하고 싶어하는 도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다양한 장르의 수준 높은 공연들이 열린다. 이런 변화를 지켜보는 게 즐거웠다. 그리고 과거보다 SBS뉴스에서 문화 뉴스의 비중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보잘것없는 능력으로나마 이 과정에 함께 했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낀다.    

물론 아직도 공연은 마이너. 복제가 불가능하고 감상하는 데 어느 정도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장르의 특성상 영영 메이저는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공연은 메이저를 지향할 필요가 아예 없다고, 그냥 소수의 애호가들끼리만 즐기는 장르로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보다는 더 공연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걸 소수만 아는 건 아깝지 않은가.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좋은 것도 계속 나올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아직 공연 보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에게 좋은 공연을 만나는 행복을 널리 퍼뜨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삶에 영감을 주는 예술가들을 더 많이 소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건강한 공연 생태계를 만들 수 있을까. 나는 이렇게 시급하진 않을지라도 삶에 의미있는 뉴스를 만들고 싶다. 오늘 당장 기사 안 나간다고 속상해 하지도 않겠다. ‘백 톱이 자랑스럽다. ‘마이너에서 일하지만 메이저를 지향한다. 이게 내가 공연 취재기자 하는 원동력이다

*클럽발코니 매거진 이번호에 기고한 글이다. 위 사진은 몇 년 전 정경화 선생 인터뷰할 때 같이 일 나갔던 회사 후배가 찍어준 것이다. 이 글이 내 '직업'과 관련된 내용이라, 편집자는 내가 일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싣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기자생활 20년에 남의 사진이나 찍었지 정작 내 사진은 거의 없어서 한참을 뒤져야 했다. 내 사진을 내가 찍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귀한 사진 찍어준 양모씨에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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