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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멍크 디베이트 홈페이지(http://www.munkdebates.com/about)
지난 일요일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우연히 EBS에서 방영하는 토론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토론 프로그램 이름이
‘멍크 디베이트(Munk Debate)였다. 주제는 ‘21세기는 중국이 주도할 것인가?’ 안 그래도 중국을 무대로 한 조정래 소설 ‘정글만리’를 막 읽은 후라 관심이 갔다. 토론자들의 면면도 쟁쟁해서 계속 보게
되었다. ‘21세기는 중국이 주도할 것’이라는 명제에 찬성하는
(pro) 쪽은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와 데이비드 리 칭화대 교수,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con) 쪽은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파리드 자카리아 타임 편집장이었다.
사회자가 있고, 두 사람씩 한 편이 되어 ‘토론
배틀’을 벌이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멍크 디베이트는 토론
전에 청중을 상대로 그 날의 주제에 대한 찬반 여부를 묻는다. 토론이 모두 끝난 다음에 다시 조사해
청중의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본다. 토론 전 청중의 입장은 찬성(pro),
반대(Con), 미정(Undecided), 이렇게
세 가지인데, 토론이 끝나면 미정이었던 청중도 어느 쪽이든 입장을 정해야 한다. 토론 후에 단순히 찬성 반대 입장의 수를 보는 게 아니라, 누가
새로운 지지표를 더 많이 얻었느냐에 따라 토론의 승패가 결정된다.
처음부터 이 프로그램을 보지는 못했는데, 이 날 토론 전에는 중국이 21세기를 주도할 것이라는 데 찬성하는(Pro) 청중이 39%, 반대하는(con) 청중이
40%, 그리고 생각을 정하지 못했다는 청중이 21%였다고 한다. 토론 후에는? 찬성이 38% 반대가 62%로 나타났다. 찬성 편에 섰던 청중의 수는 그리 많이 바뀌지
않았지만 토론 전에 생각을 정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반대 편에 섰다. 그러므로 ‘중국은 21세기를 주도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을 펼친 자카리아-키신저 팀이 이긴 셈이다.
물론 키신저나 자카리아 역시 중국의 영향력이 국제사회에서 커진다는 사실을 부인하진 않았지만, 대체로
정치적 발전 없이 지속적인 발전은 어려울 것이라는 견해를 바탕으로 중국의 성장에 한계가 있을 거라는 견해를 보였다. 중국이 급속 성장과 함께 나타나는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여유가 없을 거라는 예측이었다. 일리 있는 부분도 있었지만, 너무나 서양 중심적이거나, ‘중국은 국제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된다’는 식의, 하나마나 한 당위적 얘기를 한다는 느낌도 있었다.
이에 비해 역사학자인 니얼 퍼거슨은 중국이 21세기를 주도할 정도로 영향력을 더욱 키울
것이라는 데 낙관하는 견해를 펼쳤다. 훈수 두는 듯한 당위론보다는 현실적으로 들렸다. 그러나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에 대해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평가한 대목은 거슬렸다. 같은 편인 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의 토론에는 별 내용은 없었고 외교적 수사가 많다는 느낌이었다. 학자라기보다는 중국 외교관 같은 인상을 줬다. 아무리 중국인이라고는
해도 학자로서의 객관성을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면에서 데이비드 리가 이 팀의 점수를 좀 깎아먹지
않았을까 싶다.
알고 보니 2011년에 벌어진 이 토론의 내용은 곧 ‘21세기
패자는 중국인가’ (Does the 21st century belong to China?)라는
제목의 책으로도 나와 있었다(한국어로도 번역됐다). 쟁쟁한
석학들의 논전이 책으로도 엮일 만큼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나로선 토론 내용도 흥미로웠지만 이런 토론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도 흥미로웠다. 토론이 뜨거워지면서 중간중간에 서로 얼굴을 붉힐 법한 이야기도 나왔지만, 유머로 받아넘기고 응수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신경전을 벌이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태도가 좋아 보였다.
이런 토론을 가능하게 한 ‘멍크 디베이트(Munk
Debate)’가 궁금해져 찾아봤다. 멍크 디베이트는 매년 2차례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리는 글로벌 토론회다. 특정 주제에 대해 2명씩 찬성(pro), 반대(con)로
나뉘어 토론한다. 토론 전 청중의 찬반투표와 토론, 객석
질문, 그리고 토론 후 청중 찬반투표와 승패 발표까지, 모두 2시간 정도 걸린다. 토론회를 현장에서 보려면 25달러에서 90달러까지 티켓을 사야 한다.
멍크 디베이트는 캐나다 오리아(Aurea Foundation) 재단 후원으로 2008년부터 시작됐다. 캐나다의 금광재벌 피터 멍크와 부인이 함께
설립한 이 재단은 주로 공공정책 연구와 개발을 지원해왔다. 토론회 이름에 ‘멍크’가 붙은 것은 재단 설립자의 성을 따온 것이다. 피터 멍크는 세계 최대의 금광업체인 배릭골드 설립자다. 헝가리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스위스로 망명했다가 캐나다 토론토 대학에서 공부했다. 1950년대부터 TV 제조업, 호텔 레스토랑 사업 등 다양한 사업 분야에서 성공을
거뒀고, 배릭골드를 설립해 세계 최고의 금광 재벌이 되었다.
해외 원조, 건강보험, 기후변화, 종교, 북미 경제, EU, 이란 핵문제, 부유층에 대한 세금 등, 지금까지
멍크 디베이트가 다뤄온 주제는 다양한 분야를 망라한다. 다음 멍크 디베이트는
11월 15일 토론토 로이 톰슨 홀에서 열린다. 주제와
토론자는 9월 17일에 발표될 예정이다. 홈페이지(http://www.munkdebates.com/)에 들어가면 과거 토론회 주제, 참석자를 확인하고 하이라이트
영상을 볼 수 있다. 토론 주제에 대한 네티즌 의견도 많이 달려 있다. 토론회 전체 영상과 팟캐스트를 이용하려면 프리미엄 회원(연회비 20달러)이나 비디오 회원(연회비 10달러)으로 가입해야 한다. 연회비가 무료인 기본 회원은 토론회 개최 소식 등을 이메일로 안내 받을 수 있다.
18분짜리 단독 강연이 주가 되는 TED토크에 빠져 지낸 시절이 있었는데, 멍크 디베이트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 쟁쟁한 토론자들의 불꽃 튀는 논전을 지켜볼
수 있어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이런 토론회가 한국에서도 가능할까 궁금해진다.
(SBS 뉴스웹사이트에 취재파일로도 올렸다. 쓰다 보니 내 담당 분야인 공연 취재와는 별 관련 없는 글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좋은 걸 발견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싶어 안달이 나는 천성이 있다.
TED에 푹 빠졌다가 올해 ‘천재들의 유엔 TED’라는
졸저를 쓰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뒤늦게 발견한
‘멍크 디베이트’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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