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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의 초등학생도 예술의전당 공연을 봅니다.”

예술의전당이 컨텐츠 영상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내건 캐치프레이즈입니다. ‘SAC on Screen(SAC는예술의전당의 영문 명칭, Seoul Arts Center의 약자입니다)’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업의 골자는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공연들을 고품질 영상 컨텐츠로 만들어 시중 극장이나 지방 문예회관에서 상영하겠다는 것이죠. 지난 5월 예술의전당 고학찬 사장이 취임 이후 첫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중점 추진 사업입니다.

당시 기자회견에서 고학찬 사장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공연들이 고화질 영상으로 제작돼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 영화관에서 개봉되고 있다는 예를 들었습니다. 예술의전당 공연도 그렇게 영상으로 만들어 땅끝마을 초등학생까지 볼 수 있도록 할 것이라면서, 국내 처음으로 시도되는 사업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저는 이 사업 계획이 발표를 위해 급조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추진된 사업이라 예산이 미리 책정돼 있지 않았는데, 후원금을 모집해 4억 정도의 예산을 마련하고 8월 가족 오페라 투란도트를 시작으로 8편 정도를 올해 안에 영상 컨텐츠로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1편당 5천만 원이라는 예산으로 고화질 영상에 익숙해진 관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의 컨텐츠를 생산하기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게다가 촬영 배급과 관련한 저작권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저작권 때문에 공연 촬영,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같은 해외 유명단체의 내한공연에서 흔히 듣는 얘기가 리허설 15분 촬영, 3분 이하 방영이런 식의 조건입니다. 연습할 때 15분간만 촬영을 할 수 있고, 이를 편집해서 방영하는 것도 3분 이하로 제한한다는 얘깁니다. 그나마 상업적인 용도가 아니라 보도용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전체 공연 실황을 녹화한 영상을 방송으로 내려면 거액의 중계료를 지불해야 합니다. 이 영상을 입장료를 받는 극장이나 공연장에서 튼다면 또 조건이 달라집니다.

기본적으로 공연을 촬영하고 이 영상을 상영하기 위해서는 이 공연 제작에 관련된 모든 당사자들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당사자에는 제작자와 출연진뿐 아니라 연출, 조명, 무대, 의상, 작가 같은 크리에이티브 스태프들까지도 포함됩니다. 이 중 한 사람이라도 ‘No’를 하면 공연 촬영과 상영이 불가능합니다. 당사자들 모두를 접촉해 허락을 받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돈도 많이 듭니다. 개런티가 상당히 올라가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런데 예술의전당이 영상으로 만들겠다고 한 공연들 대부분은 예술의전당 공연이 아니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공연입니다. 이게 무슨 차이냐고요? 사실 예술의전당 공연 중에 예술의전당이 직접 제작한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예술의전당은 많은 경우 공연을 제작하는 단체나 개인에게 공연할 공간을 빌려주는 역할에 그치지요. 쉽게 말하자면 공연장 대관과 제반 서비스를 제공하는 임대업자라는 얘깁니다.

예술의전당은 국립 오페라단, 국립 발레단, 국립 현대무용단 등이 제작한 공연들을 영상으로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공연들은 예술의전당이 공연 관련자들과 계약을 하는 당사자도 아닙니다. 저작권 전문가인 홍승기 변호사는 그런 면에서 예술의전당은 직접 공연을 제작하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큰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 예술의전당은 자신이 권리를 갖고 있지도 않은 다른 단체 공연에 대해 영상화 사업을 하겠다고 할 처지가 아니라면서 말이지요

어떻게 예술의전당 브랜드로 이런 공연들을 대상으로 영상화 사업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좀 세게 말하자면, 예술의전당이 남의 공연으로 생색을 내려 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사업을 어떤 식으로 추진할 것인지, 비용은 어떻게 부담할 것인지, 이런 것들이 다 세세하게 협의가 되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술의전당은 사전에 이 단체들과 구체적인 협의를 하지 않았고, ‘이런 사업을 하려고 한다는 통보 정도만 해줬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술의전당이 영상 컨텐츠로 만들겠다고 발표했던 여러 작품 가운데 예술의전당 가족오페라 투란도트정도가 그나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추측했었습니다. ‘투란도트 8월에 공연할 예정이었습니다. 예술의전당이 직접 제작하니까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기에 가장 유리한 공연이었죠. 여기까지가 예술의전당이 처음 이 사업을 발표했던 5월의 상황입니다.

, 8월이 됐습니다. 오페라 투란도트는 최근 공연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영상 컨텐츠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술의전당이 직접 제작하는 공연이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악보 대여 단계에서부터 벽에 부딪혔습니다. 푸치니의 투란도트악보에 대해서는 이탈리아의 악보 출판사 리코르디가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공연할 때마다 악보를 빌려서 사용하고 그에 대한 돈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냥 공연 몇 번만 할 때와, 이 공연을 영상 콘텐츠로 만들어 유료 상영할 예정일 때는 당연히 대여료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리코르디를 대행하는 한국측 에이전시는 이전에는 국내에서 이런 식의 악보 대여 계약을 해본 적이 없어서 정확히 얼마나 올라갈지는 모른다고 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악보 대여료만 3천만 원에 이를 것이라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결국 예술의전당은 일찌감치 투란도트를 영상 컨텐츠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포기했습니다. 영상 컨텐츠 사업을 위한 예산이 확보되기도 전이었거든요. 또 예산이 있었더라도 한 편당 5천만 원이라는 금액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을 겁니다.

지금까지는 주로 저작권 문제를 살펴봤지만, 만약 저작권 문제가 다 해결되더라도, 예술의전당 공연으로 만든 영상 컨텐츠가 과연 얼마나 매력적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실황 영상을 보면 때로는 현장에서 보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무대를 포착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볼 만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밋밋한 실황 중계가 아닙니다. 17대의 카메라가 동원되고, 정밀한 리허설을 여러 차례 거친 결과입니다. 이런 영상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도 돈이지만 대단한 노하우가 필요합니다. 과연 한국에서도 이렇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국내에선 아무도 가 본 적이 없는 길이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단번에 쉽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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